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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아스 스토메르 : 하갈을 아브라함에게로 인도하는 사라(1637-1639)

by 이종한요한 posted Feb 0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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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raham(원본).jpg

제목 : 하갈을 아브라함에게로 인도하는 사라 (1637- 1639)

작가 : 마티아스 스토메르

크기: 켐퍼스 유채 : 113cmX 168

소재지: 독일 베르린 국립 미술관

 

   오늘 세계인들의 이목은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가 제안하는 인질 교환에 집중되고 있다. 전쟁의 참상을 알려서 전쟁의 광기를 줄이겠다는 충심으로 활동하던 일본 언론인을 납치해서 한명을 살해하고 다른 한명의 교환조건을 제시하며 약속 일정을 지키지 않으면 다시 참수하겠다는 끔찍한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종교가 지닌 폭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단체가 이슬람 교리에서 시작된 종교 집단인데, 어떻게 이런 짓들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해 누구나 의아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해답은 구약 성서 창세기 16장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늙도록 후손을 보지 못해 고민하는 아브라함을 위해 그 아내 사라가 자기의 몸종 하갈을 시켜 후손을 보도록 배려하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몇년 전 이와 비슷한 내용의 씨받이라는 영화가 있었으나 현대적인 시각에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성서에 나타나고 있다.

 

   하갈은 오늘날 이집트가 아니면 아라비아 출신의 여인으로서 사라의 몸종이던 처지였다. 자기의 주인인 사라가 제안하는 것을 받아들여 아브라함의 자식을 낳아주면 자기의 비참한 신분이 격상되리란 생각에 하갈은 아브라함과 잠자리를 함께 하면서 쉽게 임신을 해서 아들을 낳았다.

 

   이것은 하갈 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도 마음의 근심을 덜어줄 기쁜 사연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지 못했던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아들을 낳은 몸종 하갈이 상전인 사라를 무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불임으로 아브라함의 아기를 낳아주지 못한다는 것에 마음의 큰 부담을 느끼며 살아야 했던 사라에게 하갈의 출산은 자기 마음의 근심을 덜어준 큰 은인인게 사실이었으나, 하갈의 돌변한 태도는 새로운 심리 문제를 만들게 된다. 한마디로 상전과 몸종이라는 철저한 수직적 관계에서 남편과 자식을 사이에 두고 사랑싸움을 해야 하는 연적의 관계로 변하게 된다.

 

   이런 심정을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부당한 일을 겪는 것은 당신 책임이에요. 내가 내 여종을 당신 품안에 안겨 주었는데, 이 여종이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나를 업신여긴 답니다. , 주님께서 나와 당신 사이의 시비를 가려 주었으면.” (창세16,5)

 

   대범한 성격에다 아내 사랑이 극진했던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이런 불평에 시원스러운 해결책을 제시한다.

여보, 당신의 여종이니 당신 손에 달려 있지 않소. 당신 좋을 대로 하시구려. 그래서 사라가 하갈을 구박하니, 하가르는 사라를 피해 도망쳤다.” (창세16,6)

 

   상전의 미움을 피해 도망치는 하갈 역시 마음에 대단한 응어리가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주인인 사라의 분부를 받들어 늙은 영감의 자식을 임신한 것은 대단한 일인데, 자기의 이런 은혜를 구박으로 보답하는 상전의 태도는 그편에서 보면 대단한 배신인 것은 사실이었다.

 

   상전의 구박에 눈물을 쏟으며 도망치는 하갈에게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 다음과 같이 알린다.


너의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에게 복종하여라

내가 너의 후손을 셀 수 없을 만큼 번성하게 해 주겠다.

 

보라, 너는 임신한 몸 이제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리라.

네가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셨다.

그는 들나귀 같은 사람이 되리라.

그는 모든 이를 치르고 손을 들고 모든 이가 그를 치르고 손을 들리라.

그는 자기의 모든 형제들에게 맞서 혼자 살아가리라.”(창세 17,9-12)

     

나는 네가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에게서 임금들도 나오게 될 것이다.”(창세17,7)

 

   하느님의 뜻에 따라 돌아온 하가르는 가슴에 한을 품은 채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아 주었는데,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여든 여섯 살이었다. 이 아들 이스마엘이 바로 오늘 아랍인들의 조상이 된다.

 

   그런데 애꿎은 일이 생긴다. 아브라함이 아흔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아내 사라에게서 기적적인 일이 생겼다. 그 늙은 나이에 임신을 한 것이다. 기쁘다 못해 어리둥절한 아브라함은 사라가 낳은 아들에게 그가 웃다는 뜻이 있는 이사악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 때 소실 하가르가 낳은 이스마엘은 열 세살이었고, 당연히 늦둥이 이사악은 자기 이복 동생이었으나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이사악이 젖을 떼는 날은 우리에게 돌잔치처럼 즐거운 날인데, 그날 사라는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를 집에서 쫓아내었다. 사막으로 내던져져 그기서 이스마엘은 자라면서 들나귀처럼 야성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

 

   같은 아버지의 핏줄을 이었지만 처음부터 원수로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가르의 아들 이스마엘은 아랍인의 조상이고, 이사악은 유대인들의 조상이다. 여기에서부터 이스라엘과 아랍의 적대 관계의 원인 제공이 시작된다.

 

  오늘 일부 이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폭력은 바로 여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abraham(원본)1.jpg


   부부의 금실이 좋으면서도 후손을 낳아주지 못하는 칠거지악 [七去之惡]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몸종 하가르를 씨받이로 선택해서 남편이 아브라함의 잠자리를 찾아 간다.

 

   이 두 여인의 모습은 인생살이에 다반사로 등장하는 현실을 보이고 있다. 모든 것을 다 가졌는데, 하나가 없어 고통스러운 인간상과 아무것도 없어 비참한데 하나를 가져 삶의 숨구멍이 트인 인간상이다.

 

   사라도 한 시절 대단한 미모를 뽐낼 때가 있었다.

 

   아브라함과 함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나안 복지를 향하는 과정에서 기근을 만나 잠시 이집트에 갔을 때 사랑의 미모에 홀린 이집트 고관들이 그녀의 미모에 현혹되기에, 여기에 두려움을 느낀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닥칠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라를 아내가 아닌 누이로 소개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그는 미인이었다.(창세 12,10-20참조)

 

   그러나 나이는 속일 수 없어 아무리 뜯어봐도 매력이라고는 찾을 때가 없는 그런 모습이 되었다. 그녀 목의 주름살을 가리고 있는 화려한 비단옷은 그의 아무것도 아쉬울 것이 없이 그의 현재 처지를 알리고 있으나 그가 걸친 우중충한 색깔의 옷은 그의 얼굴이 보이는 이제 인생의 황혼에 서있다는 서글픔을 알리고 있다.

 

   여기에 비해 하가르는 흰 속옷에 붉은 외투를 걸친 싱싱한 몸뚱이 하나 외에 아무것도 없는 벌거벗은 인간이다. 그의 흰 속옷은 그의 처녀성을 표현한다면 그의 붉은 외투는 생명의 씨앗을 키울 수 있는 기름진 토양을 상징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두 가지를 다 갖고 싶어하나 하느님은 하나만 선택하도록 매 순간의 결단을 요구하신다.


abraham(원본)2.jpg

  

   늦은 밤 곤한 잠에 떨어졌던 아브라함은 예기치 못한 두 여인의 방문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후손을 낳아줄 수 없다는 결격 사유 외에 너무 사랑스러운 아내이기에 만족하게 살아온 그에게 아내 사라는 느닷없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아내의 몸종으로 여겨 눈도 거들 떠 보지 않았던 하가르가 새로운 가능성으로 닦아온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 사라의 불임증을 안타깝지만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며 살아온 그에게 아내는 하가르를 통해 후손을 얻을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가능성을 받아 들여 아들 이스마엘을 얻게 되나 이것은 오늘까지 불구대천의 원수로 지내면 오늘의 인질 문제의 원인 제공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인들이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히면서 침략과 약탈 테러와 인질극을 벌리는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 낸다.”는 속담처럼 이차 대전이 끝나면서 이스라엘인들은 고향을 찾아 왔으나, 이 고향이라는 곳은 사실 이스마엘의 후손인 팔레스틴인들이 몸 붙여 살던 고향이었다. 이스라엘 인들은 대단한 지성과 외교력으로 아랍인들을 지능적으로 괴롭히고 있다 못해 이제는 그들을 추방하거나 아니면 담벼락을 쌓아 숨구멍을 막는 악행으로 온 세계의 비난을 받으며 항상 아랍인들의 테러에 시달려야 하는 또 다른 약속민족으로 남아 있다.

 

   한 아버지를 둔 아랍인과 이스라엘인은 잠시도 편치 않는 인생을 살고 있으며, 이 원인 제공의 순간이 바로 지금 벗은 모습의 아브라함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성서는 여기에 대해 아무런 해답도 주지 않고 그냥 오늘 불구대천의 원수로 지내는 두 민족의 갈등 원인만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신앙적 차원을 보면 후손을 얻기 위한 아들을 얻는 것을 삶의 우선순위로 여긴 아브라함은 결국 최선이 아니었기에 얻은 자식에 의해 오늘 중동 분쟁의 씨앗이 되었고 아무런 해결책도 없는 수렁에서 허덕이게 만들었다.

 

   작가는 오늘 세계가 겪을 중동 분쟁에 대한 전혀 예감도 없는 상태에서 제작한 이 작품이 오늘 세계인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할 수 있는 시사적인 내용을 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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