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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1889년 그리스도의 브룻셀 입성 

            (Christ's Triumphant Entry into Brussels in 1889)

   가 : 제임스 앙소르( James Ensor 1860- 1949)

   기 : 캠퍼스 유채 252 X 430.5cm

소재지 : 미국 로스엔젤스 폴 게티 (Paul Getty) 미술관

오늘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양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교는 퇴락하고 있다. 유럽의 유서 깊은 성당이나 교회는 텅텅 비면서 그 비움의 자리를 관광객들이 채우는 것을 보면 착잡한 생각이 드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중에서도 기복성이나 현세적 이익과 종교를 직결시키는 교파는 신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지역적으로는 특히 남미에서 복음주의 탈을 쓴 개신교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많은 사회적 문제도 만들고 있다.

우리나라는 크리스찬 전파가 일천한 처지에 세계적으로 신자가 많은 교회  50개 중 26개가 있으며 이런 교회의 하나같은 특징은 현대인들의 구미에 맞는 비 복음적인 개인주의 차원의 신앙을 강조하는 게 특징이며 이것은 이제 큰 사회문제도 만들어 비신자들에게도 큰 실망을 주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양상은 의식이 있는 사람들을 종교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고 있으나 이런 이상한 종파는 그 신자들을 결집해서 또 하나의 신진 세력이 되고 있다. 선거를 앞둔 우리 현실에서 이런 광신자들을 모우기 위해 결집하고 있는 정치세력을 보면 오늘 현실적으로 종교의 대종은 멸시나 무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전통적 그리스도교가 이렇게 교세 위축 현상을 보이는 것은 여러 측면 즉 교회 내부 요인과 외부 사회 요인이 병존해 있다. 내부 요인으로는 교회가 성서가 강조하는 세상을 향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는데 있다.

교회가 제시하는 복음적 이상은 주님이 말씀하신 빛과 소금이나 교회에 몸 담고 있는 신자들이나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공의회가 제시한 대로 “죄 많은 인간”들이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모습을 보이기보다 실망을 줄 수 있는 게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드러나고 있다.

또한 교회 제도 역시 복음의 유연성과 활기 보다는 경직된 어떤 땐 시대착오적인 법이나 전통의 주장으로 복음이 강조하는 참신한 예언성 보다는 생기 없는 고루한 모습으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여기에 겹쳐 세상은 너무도 빨리 변하기에 사람들 역시 어떤 영원한 것에 대한 갈망 보다는 현실 적응에 더 관심이 쏠리고 있기에 이런 경향에서 종교는 그리 매력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종교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제쳐 진 상태가 이어지고 있으며 이것은 종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에게 그리 편한 심사는 아니다.

이 작품은 오늘 우리들의 이런 현실을 너무도 잘 반영해주는 작품이다.

작가는 예수님의 수난 직전 수난의 장소로 결정된 예루살렘을 향해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으며 바로 지금 시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교회는 부활절 전 한 주간을 성주간으로 정해 예수님 삶의 진면모를 집중적으로 정리 체험하게 만들고 있다. 마치 입시 공부를 하던 학생이 시험 한 주간을 앞두고 총복습을 하는 것과 같은 기간이다.

작가는 먼저 신앙을 떠난 무신론자이다. 벨기에는 가톨릭 국가이지만 작가는 제도적인 종교에 대한 실망으로 무신론자로서 사회주의자로 변신된 삶을 살면서 엉뚱하게 신앙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작품은 당연히 그의 인생 철학에 따라 반그리스도교 성향의 작품이 되기 쉬웠으나 작가는 엉뚱하게도 교회가 외치는 호교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유럽의 정신적 토대와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떠나 방황하는 유럽 사회를 풍자하는 작품을 남겼다.

한마디로 무신론자의 눈으로 본 그리스도교를 떠나고 있는 유럽 사회의 문제점과 허상을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작가는 성서의 다음 장면을 재현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시하신 대로 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암나귀와 어린 나귀를 끌고 와서 그 위에 겉옷을 펴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앉으시자, 수 많은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나무 가지를 꺽어다가 길에 깔았다. 그리고 앞서가는 군중과  뒤따라가는 군중이 외쳤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이렇게 하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니 온 도성이 술렁거리며 “저분이 누구냐?”하고 물었다.” (마태오 21,6-10)

이처럼 성경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시민들이 들떠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하며 열렬히 그분을 환영하였다는데, 작가의 작품에서는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브뤼셀에 들어오시는데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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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자신을 감춘 채 단 한 명도 예수를 쳐다보지 않고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다.

이처럼 환영받지 못하는 예수는 성서처럼 당나귀를 타고 입장하고 있지만 당당한 구세주라기보다 귀가하는 초라한 패전병 같이 보인다. 사실 예수는 그림의 상단에 조그맣게 묘사되어 관람자조차 그분의 존재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앙소르는 종교적 주제를 통해 근대 사회가 갖는 본질적인 병폐를 고발한다. 산업 혁명 이후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는 물질적인 풍요뿐 아니라 실증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져와 종교적인 믿음, 신앙심을 퇴색시켰다.

물질 만능의 시대에 초라한 당나귀를 타고 손에 아무 것도 쥔 것 없이 들어오는 가난한 예수가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가난하고 초라한 예수를 만나는 것이 조금도 반갑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시민들은 예수님이 축복을 주기 위해 브뤼셀에 오셨는데 ‘예수 환영’이라는 글 대신에 ‘사회주의 만세(VIVE LA SOCIALE)’라는 환영 현수막을 내걸고 있다. 그들은 빈부격차, 부르주아들의 도덕 불감증, 사회의 구조적 모순 등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도입이 최선이라고 믿으며 종교에 철저한 냉소를 던지고 있다.

작가는 오늘날 교의 종교가 여러 관점에서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제쳐지면서 외적인 몰락 현상을 보이고 있는 현실을 찬양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으면서 이런 현상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근본이 흔들리는데 대한 문제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종교가 필요하고 종교적인 것이 되어야 하나 오늘 종교의 처지가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외침이나 아니면 인간이 더 이상 종교가 필요 없다고 할 만큼 성숙했다는 자만심의 상태에서 종교가 인간 사회의 삶의 질을 파괴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정서가 팽배한 현실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참으로 오늘의 종교 사회의 현실을 심원하게 표시하고 묘사하고 있다.

앙소르가 주는 메시지는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아서 비극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만나기 위해 오심에도 불구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비극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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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속의 예수의 모습은 너무도 초라하다. 예수의 행렬은 아무 관심도 없이 꽉 찬 군중들에 의해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는 정지된 모습이 오늘의 사회 현실임을 제시하면서 종교가 주고 있는 여러 실망도 문제지만 종교를 부정하면서 신이 없는 그곳 역시 정상은 아니라는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작가는 무신론자나 사회주의자의 관점에서 종교에 대해 변화되어야 할 사회상을 제시하고 있다.

많은 호교론자들은 종교의 관점에서 사회의 문제점을 제시한 반면 이 작가는 종교에 대한 무관심한 사회 현상을 제시하고 고발하는 것으로 종교에 대한 사회의 새로운 관점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크리스챤이 종교에 무관심한 유럽 사회를 고발한 것이 아니라 무신론자가 종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당시 이 작품은 기존 성화에 비해 예수님의 모습을 너무나도 파격적으로 묘사해서, 어느 곳에도 전시될 수도 없었고, 40년이 지난 후에 겨우 대중들에게 공개되었을 만큼 당시 사회 정서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과감한 표현의 예언성을 띈 작품이었다.

작가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패러디한 이 작품을 통해 산업혁명 이후 부르주아 계급에 의한 자본주의와 물질적 풍요, 그리고 인간의 쾌락 등에 감추어진 사회정치적 문제를 고발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향해 많은 인파는 몰려들었지만 고개를 돌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현대 사회가 보이고 있는 종교에 대한 반발 이전 무관심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예술적 신념과 표현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항상 인정받지 못한 삶을 살았던 예수의 현실에 비기면서 나름대로의 정당성도 제시하면서 위안을 찾기도 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13,57)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심취한 표현주의란 자연을 사진처럼 그대로 정확히 묘사하지 않고 자신의 사상, 신념들을 주관적으로 표현하여 그리는 기법인데, 작가는 여기에 심취해서 이 분야의 대가가 되었으나 사회적인 인정을 받지 못했기에 자신의 처지가 바로 이 작품의 예수님처럼 소외된 처지임을 간접적으로 알리고 있다.

산업 혁명 후 종교적인 가치관이 급격히 쇠락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 작품을 남긴 작가처럼 우리도 현대를 가톨릭 신자로 살기 위해선 이 작품에서 예수님이 겪으셔야 했던 소외와 무관심을 용기 있게 감내해야 한다.

종교 성직자라고 부르기 민망한 그런 수준의 인간들이 올린 말이나 글에 수많은 댓글이 따라 붙으면서 그는 자신의 부끄러움도 잊고 도취에 빠질 수 있는 것과 반대로 나의 소신이나 신념이 이웃들의 관심에서 제외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독한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갈수록 팽배해지는 현대 세계에서 종교인들이 지녀야 할 새로운 신념 체제 구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역발성인 차원을 제시했다.

작가는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의 바탕 차원이 아니라 이 세상이 보이고 있는 불신의  징표 안에서 다시 하느님께로 회심해야 할 신앙인의 결단을 일깨워 주고 있다.

“거기서 너희는 주 하느님을 찾게 될 것이다.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뵙게 될 것이다. 너희가 곤경에 빠지고 이 모든 일이 너희에게 닥치게 되면 마침내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가 그분의 말씀을 잘 듣게 될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너희를 버리지도 파멸시키시도 않으실 것이며,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계약을 잊지도 않으실 것이다.” (신명 4,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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