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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 로렌죠와 살림 베네 형제(Lorenzo e Jacopo Salimbeni)

by 이종한요한 posted Apr 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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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oratorio3.jpg


제   목 :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Crocifissione di Nostro Signore Gesu Cristo)

작   가 : 로렌죠와 살림 베네 형제(Lorenzo e Jacopo Salimbeni : 1416)

크   기 :  프레스코화 (제단전면) 

소재지 : 이태리 우르비노(Urbino) 세례자 요한 형제단 경당(Oratorio di San Giovanni Battista)


중세의 이해에 있어 우리의 수준은 참으로 무식한 수준에 있다. 천 년 이상을 이어온 중세의 역사를 “암흑기”라는 한마디로 속단하는 어이없는 무식이 아직 우리 사회에 팽배한 정서이다.

중세 때 현대적인 시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야만적인 행동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종교재판, 마녀 사냥, 십자군 전쟁과 같은 것이며  삼천 년대를 시작하면서 교황님이 온 세상을 향해 사과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런 잘못은 가톨릭교회의 잘못만이 아닌 당시 인간 삶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면들이 종교적으로 표출된 것에 불과하기에 개신교도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톨릭교회와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이런 면 외엔 중세는 고대의 문명을 근세 현대로 전달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으며 특히 신앙에 있어선 그 순수한 열망으로 현대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중세의 건축인 고딕 대성당의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쏟아지는 빛의 축제는 기계화로 찌들린 현대 문명의 삭막함 속에서 삶의 생기와 천상에의 그리움을 키워주고 있다.


중세기에 형성된 교회 신심 단체 중 형제단(Confraternity)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현대 교회에서도 그 순수함이나 열정에 있어 본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평신도들이 만들어 교회의 인가를 받고 시작한 신심운동으로 신앙의 심화를 통해 단결하고 직업 활동을 통해 교회에 필요한 여러 현실적 사업에 동참하는 것을 목표로 수호 성인을 모시고 출발했다.


한마디로 신앙을 맹목적인 신심 행위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삶을 연결시켜 실재 삶에 있어서도 신앙의 정신으로 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형제단의 구조가 세월이 흐르면서 길드(Guild)라는 제도로 정착되었고 이것은 유럽에서 번성하여 당시 경제·사회 구조에 있어 복음화 역할을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 교회 구조는 속지주의 성격의 본당 구조이며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어려운 구조라면 중세 형제단은 직업별 조직이기에 공감대 형성이 쉬웠고 중세기에 건축된 많은 성당들은 바로 이런 형제단들의 열성으로 이룩된 것이다.


오늘 많은 크리스챤들에게 주어진 문제는 신앙과 일상 삶과의 괴리 현상이라면 중세 형제단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자기 직업을 통해 표현하고자 노력했으니 수미일관의 신앙 자세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모셔진 경당은 세례자 요한을 주보로 모시고 지역 사회에 복음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 시작된 형제단이 모이던 장소였고, 이 작품은 자기들에게 필요한 신앙의 내용을 그림으로 펼친 한마디로 펼쳐진 성서와 같은 성격의 작품이다.


제작에 있어서도 특별한 감각적인 색채를 과감히 사용함으로서  전통적인 종교화가 주는 차분함 보다는 강렬한 생동감을 주는 작품이 되었다.


예수 수난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그 방대한 규모에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서 수난의 의미성을 폭넓고 정확히 표현할 수 있었기에 이 경당은 이 작품이 제작되면서 형제단원 뿐 아닌 많은 신자들에게 감동적인 순례의 장소가 되었다.


이 작품이 있는 우르비노(Urbino)는 예술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지녔던 성주 페데리코 백작(Federico)의 영향으로 르네상스 예술 표현의 보석 같은 위치에 있었다.

이 작품은 성서에 나타난 내용을 이 형제단들의 현실에 맞게 각색한 것이다. 성서의 내용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처지에 맞게 각색한 것이다.


이 작품은 요한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를 맛보신 다음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 그 날은 과월절 준비 일이었다. 다음날 대 축제일은 마침 안식일과 겹치게 되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그냥 두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시체의 다리를 꺾어 치워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병사들이 와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의 다리를 차례로 꺽고 예수에게 가서는 이미 숨을 거두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는 대신 군인 하나가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 이것은 자기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의 증언이다.


그러므로 이 증언은 참되며, 이 증언을 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여러분도 믿게 하려고 이렇게 증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의 뼈는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한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성서의 다른 곳에는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기록도 있다.”(요한19: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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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좌우로 한명씩 십자가에 달려 있고 그 주위를 많은  병사들이 둘러싸고 있다.


왼편에 달린 강도는 자기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발악하는 상태에 있으며 그 주위엔 악마가 맴돌고 있다. 두 강도의 표현에서 성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 않느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것에 대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루카 23:40-42)


작가는 이 내용을 자신의 신앙 감각으로 해석해서 구원의 관건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님이 받으셔야 했던 고통에 대한 수용성 여부로 보며 주님께 욕설을 하는 강도의 잘못은 그분처럼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한 것에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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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파리사이들과 유다인들의 고관들로서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다. 요한 복음에서 유대인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민족에 대한 지칭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사건건 반대하던 사람들의 대명사이며 결국 이들에 의해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게 되었다.


작가는 이 사람들이야 말로 크리스챤들이 피해야 할 인간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아랫부분에 SPOR 이란 군기를 든 일당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 글자는 Senatus Populusque Romanus :로마 제국 원로원)의 약자로  예수님의 죽음은 권력형 비리의 폭력이 개입된 것임을 알리며 형제단의 사람들은 항상 공정하고 바른 양심으로 어떤 경우에도 권력과 집착하거나 비호하는 일이 없어야 함을 알리고 있다

어떤 이유로던지 정치권력에 대한 집착은 신앙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것임을 알리고 있다.


한 마디로 악인들이 더 득세하는 것 같이 보이는 세상의 단면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항상 악인들이 더 힘을 쓰는 것 같은 현실에서도 의인의 밝음이 드러나듯 여기에서도 엉뚱한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로마 제국의 군인 대장인 백부장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작가는 또한 회원들에게 성서의 기억을 일깨우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 주님의 옷을 모두 벗긴 후 그 옷을 로마군인들이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다는 일화도 전하고 있다.(루카 23:34-35)


이 세상엔 항상 악이 더 강한 힘과 결집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의인의 힘은 악인의 힘과 다른 차원에서 엄청난 위력이 있음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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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편엔 착한 사람들의 그룹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왼편과 달리 화려한 옷을 입은 바리사이나 귀족이 아니라 당시 예루살렘 주위에 살던 평범한 사람들인데, 검은 옷을 입고 말 위에서 창을 들고 있는 사람은 론지노(Longino)이다.


전승에 의하면 로마 군인으로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후 회개한 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성인이며 그러기에 베드로 대성당 제일 앞부분에 창을 든 성인으로 서있을만큼 공경을 받던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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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편에 일군의 여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고 충격을 받아 실신한 성모님을 부축하여 위로하고 있다. 붉은 옷을 입고 서서 통곡하는 모습의 여인은 성녀 막달래나이고 실신한 성모님 곁에 있는 여인들은 루카 복음 8장에 등장하고 있는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이다.


여기에서 르네상스의 성화의 특징인 인간 감정의 자연스런 표현이 드러남을 볼 수 있다.


이 형제단이 있던 우르비노는 르네상스의 대표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라파엘로 산치오의 고향일 뿐 아니라 성주인 페데리코 백작 역시 대단한 교양인으로 작은 공국을 보석처럼 아름답게 가꾼 위인이기에 이태리 어느 도시 보다 인간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르네상스의 도시였는데, 이 작품에도  바로 이런 인간이 표현하는 감정들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에 많은 천사들이 등장하는 천사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역시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통곡하는 모습들이며 등장인물 중  파리사이나 유대 고관들이나 군인들을 제외한 천사들과 많은 사람들은 통곡을 하고 있다.


과거의 성화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인간적인 감정 처리에서 자유로워야 하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천사들과 인물들의 격정적인 감정 표현은 르네상스의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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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예수님 위에 펠리칸이 자기 가슴을 쪼아 새끼들을 먹이는 장면이 있다.

 

펠리칸(Pelican)은 사다새 과에 속하는 새로, 부리 밑의 큰 주머니가 있어 먹이를 먹은 후 새끼에게 주려고 입에 토하면 새끼들이 받아  먹는 특수한 성격의 새인데, 상징적인 표현을 좋아 하던 중세 인들은  이 새를 성체와 성혈을 통해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예수님께 비겼다.


즉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이 새에 비겼기에, 사제의 제의나 많은 교회 장식에 이것을 많이 사용했다.


새끼들에게 자기 가슴살을 쪼아 먹이고 있는 둥지 아래엔 뱀들이 새끼를 잡아먹기 위해 둥지 주위를 넘실대고 있으나 자기 가슴살을 쪼아 새끼를 먹이는 어머 새의 생명을 건 튼튼한 보호가 있기에 뱀은 기승을 부리지 못하고 있으며 그 주위에는 생명나무가 자라고 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시작되는 인간의 영적 성장과 구원을 확실히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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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형제단 회원들에게 이 경당은 펼쳐진 성서와 같기에 복음을 자기들의 생활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자리였기에 네 면의 벽 전체에 성서에 대한 내용과 자기 형제단의 수호자로 모신 세례자 요한의 행적을 그렸다.

이 벽면을 세례자 요한에 관계되는 내용으로 루카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일화와  성모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제단 전체를 차지하고 있으나 벽면을 통해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일생을 그림으로서 성서 전체를 섭렵하도록 배려했으며 더욱이 밝고 생동감 있는 처지로 십자가 죽음의 슬픔 보다 부활의 생명과 승리를 암시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작가가 활동하던 시기의 이태리는 르네상스 운동에 의해 인간적인 표현이 강조되던 때였고 이 작품이 있는 우르비노는 이태리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르네상스의 도시였다.


작가는 이런 특성을 고려해서 작품에 생동하는 인간을 표현함으로서 성화가 과거의 사실을 알리는 생명 없는 그림이 아니라 당대에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힘과 방향 제시를 하는 이정표로 표현했다.


요한의 수난 복음의 내용이나 밝고 화려한 색상과 등장인물들의 역동적인 몸짓을 그림으로서 주님 죽음에 대한 애환이 아니라 강한 생명의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서 부활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주님 머리 위에서 자기 가슴살을 쪼아 새끼들을 먹이는 펠리칸 주위에 생명나무가 자라는 것으로 십자가 사건은 주님 사람의 강력한 표현이며 최고의 승리임을 표현하고 있다.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얼굴을 두건으로 가리고 횃불을 들고 행렬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현대적인 시각에서 좀 생경스럽게 보이나 오늘 신앙 생활에 생각할 점을 제시하고 있다.


중세 형제단은 자기들의 봉사나 봉헌이 전적으로 하느님을 위한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기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서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얼굴을 가렸다.


다 이웃인 처지에 얼굴을 드러내면 자신의 선행이 드러난다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교회 안에서 성금을 전달하는 단체나 개인이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성금의 내역이 적힌 팻말을 들고 환히 웃으며 찍은 사진들을 이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자기의 선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얼굴을 가리고 행렬했던 중세 형제단들의 순수한 복음적인 태도가 우리들에게 신선함으로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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