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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니코 길란다이오 (Domenico Ghirlandaio) : 사도들을 부르심 (Calling of the Apostles : 1481)

by 이종한요한 posted Jan 2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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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irlandaio,_Domenico_-_Calling_of_the_Apostles_-_1481.jpg


제 목 : 사도들을 부르심 (Calling of the Apostles : 1481)

작 가 : 도메니코 길란다이오 (Domenico Ghirlandaio 1449 1494)

크 기 : 프레스코 (Fresco, 349 x 570 cm)

소재지 : 바티칸 식스티나 경당 (Cappella Sistina, Vatican)

 

지난 2014413일 프란치스코 교종 즉위 일주년이 되는 날 이태리의 좌파 신문인 일 템포( Il Tempo)1면 표지 기사를 다음과 같은 글로서 시작했다.

 

성 프란치스코가 흰옷을 입고 로마에 나타났다.”

 

항상 약자와 고통 받는 사람들의 권익을 우선시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좌파의 상징적 위치에 있어야 하는 법이나, 안타깝게도 복음 전파의 사령탑인 교황청은 어떤 때 세상의 좌파로부터 비난 대상이 되어 오던 처지였고, 이 언론 역시 좌파의 언론이었는데, 일년 간의 교종의 행보를 보니, 이분이야 말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에 걸맞는 예수의 모습을 보이는 교종임을 예찬하는 것 이었다.

 

역사를 좀 배운 사람이라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원인을 제공한 중세의 부패에 주인공들이었던 교황들에 대한 기억은 있으나, 이들이 했던 문화 예술에 대한 공헌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중세 교황들의 문화 예술에 대한 공헌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은 바티칸에서 교황 선거 장소로 채택되고 있는 식스티나(Cappella Sistina) 경당이며, 교황 시스틴 4세에 의해 건축되었다.

 

교회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지닌 좌파 언론을 위시해서 온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는 프란치스코 교종이 예수회 출신인 것과 대조적으로 프란치스칸 교황이었던 식스토 4(1471 - 1484)는 전형적인 중세 교황의 그림자의 족적을 남기면서도, 문화와 예술에 대한 대단한 안목으로 오늘 로마를 찾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으니, 지금 교종과 또 다른 행적의 어두움 속에서도 밝은 면모를 보이고 있다.

 

식스토 4세 교황은 재임 중, 중세 교황이 저지를 수 있는 여러 실수들을 과감히 저지런 교황이었는데, 큰 것만 열거해도 먼저 자기 가족들에 대한 지극한 애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치로 그의 조카 6명을 추기경에 임명함으로서 중세 교황사에 치명적 굴욕으로 남은 족벌주의(nepotism)의 창시자가 되었다.

 

당시 추기경들의 수효가 34명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교황의 조카 사랑은 부적절의 도가 넘어 수치와 안타까움으로 기억되는 사건이다.

 

그 외 성직매매를 통해 돈을 챙겼고, 개인적인 분노를 교황답게 표현해서 앙숙관계에 있던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집안의 살인 교사를 하는 등 어두운 족적을 남겼으나, 그가 여러 부적절한 방법으로 모은 돈은 모두 로마의 발전기금의 밑거름으로 사용했다.

교황은 이 경당을 건축하면서 당시 이태리의 한다한 작가들을 불러 성당 전체를 장식했는데, 성당 벽면은 산드로 보티첼리, 피에트로 페루지노, 도메니코 길란다이오, 코시모 롯셀리 같은 르네상스 작가를 불러 들여, 구약과 신약의 사건을 주제의 작품을 남겼다.

 

그 후 그의 조카인 교황 율리오 2세가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라는 작품을 남기면서 이 경당은 르네상스 예술의 진수를 보관하는 보석상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첫번째.jpg


작가는 피렌체 출신의 르네상스 화가로서 한때 미켈란젤로의 스승 역할을 했을 만큼 역량이 있는 작가로 교황의 요청에 의해 이 경당 벽면에 작품을 남겼다.

 

이 벽면 작품들은 구약과 신약의 주제를 절묘히 선택하여 신앙의 편협한 표현에 의해 너무도 억압된 인간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만든 르네상스 작품답게 신앙을 하늘처럼 넓게 표현했다.

작가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부르심이라는 이 주제 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주제의 작품도 남겼으나 이것은 벽면을 수리하면서 없어졌다.

 

이 경당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던 교황은 크기에 있어서도 상징성을 부여해서, 일찍이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 지었다는 성전과 똑같은 규모(길이 40.24m, 너비 13.41m)로 정하면서, 성서적인 정통성을 바탕으로 1475년 피렌체의 건축가 조반니(Giovanni de'Dolci)를 통하여 완성하였다.

 

구약의 모세를 그리스도의 예표로 설정하고 신약에 제자들을 부르시는 그리스도로 이어지게 만들면서 이 작품들은 단순한 성당 장식용이 아니라, 가톨릭 신앙의 내용을 극명히 표현하고자 했던 르네상스 교황의 신앙관이 담긴 것이기에, 현대의 사고방식으로 이해가 힘든 교황으로서의 기행 속에서도, 그의 신앙관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다음 성서의 내용을 그린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숫가에서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 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데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 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마태 4: 18- 22)

 

작가는 먼저 이 내용을 시각적인 표현으로 잘 정리해서 관람자들에게 체계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뒷면에 예수님께서 아버지 제베데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고 야고보와 요한을 보고 계시는 장면과 다른 편엔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두 제자들을 서로 다르게 등장시키고 있다.

 

중앙에는 불림을 받은 두 사람 가운데 베드로는 노란색의 옷을, 안드레아는 초록색 옷을 입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크게 등장시키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직의 고귀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 생업의 도구였던 그물을 과감히 버리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제자로서의 삶을 맹서하는 제자들을 통해,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고통을 통해 영광으로라는 크리스챤 신앙의 역설적인 면을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두번째.jpg


작가는 성서의 내용을 시각적인 방법으로 표현한 후 즉시 작가가 몸담았던 피렌체를 배경으로한 그곳에 풍경을 재현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피렌체 출신으로 명성을 떨치던 사람들을 등장시키면서,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의 영광을 예찬하며, 푸른 옷을 입고 등을 돌리고 있는 여인들은 당시 피렌체에 살고 있던 시민들의 상징이다. 이것은 예수의 부르심은 과거의 사건만이 아니라,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의 표현이다.

 

세번째.jpg


작가는 이 부분에서 그리스도 제자의 진면모를 성서에서 시작해서 현실 세계로까지 이어지도록 연결시키기 위해 당시 로마에 거주하면서 여러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위대한 피렌체 출신의 인사들을 초상화 형식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왼편이 피렌체 거주인이라면, 이쪽의 인사들은 피렌체 출신으로서 로마에 거주하고 있는 명사들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대부분 인물들은 당시 피렌체 사회를 주름잡던 명사들로 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다 실재 초상화 형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로마 주재 피렌체 은행의 지점장으로서 후에 식스토 4세 교황의 재무 담당이 된 죠반니 또르나부오니 (Giovanni Tornabuoni)는 당시 교황청 금고를 담당하고 있던 메디치 은행의 책임자이며 작가의 큰 후원자이기도 했기에 등장시켰다.

 

그는 그 후 식스토 4세 교황과 메디치 가문이 불목했을 때도 변치 않는 자세로 불편을 지킨 사람이다. 이는 불편한 관계에 있던 교황과 메디치 집안의 중간에서 지혜로운 처신으로 서로의 갈등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 앞에 세련된 검은 옷을 입고 약간 슬픈 표정으로 서 있는 소년은 그의 아들 로렌죠로 후에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바티칸 은행의 관리 책임을 맡았다.

 

다른 주위 사람들은 당시 피렌체 공국에서 불우 이웃에 대한 애덕실천과 탁월한 교양으로 평가받던 또르나부오니(Giovanni Tornabuoni) 집안 가족들이다.

 

작가는 이 가문을 신앙적 차원에서 피렌체의 명문으로 제시하기 위해 그 친척들까지 예수님의 제자군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소년 로렌죠 뒤에 짧은 흰 수염이 있는 인물은 피렌체 르네상스 역사에서 기억되는 인물이다. 그는 그리스 출신으로 동방 교회의 학자로 일하다 동로마제국이 멸망할 때 콘스탄티노플에서 피렌체로 망명한 탁월한 신학과 철학자인 요한 아르지로오폴루스 (John Argyropoulos)이며, 서방교회에 동방의 신학과 철학을 소개하고 많은 희랍어 서적을 라틴어로 번역함으로서 서방교회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메디치 집안은 돈만 밝히는 재벌이 아니라 피렌체를 중심으로 예술과 학문의 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함으로서 르네상스 문명 창출에 큰 기여를 했는데, 메디치 집안은 망명한 이 학자를 정중히 대우하여 그의 활동을 한껏 도우고 집안 자녀들의 개인교수로 삼았다.

 

이런 배려로 메디치 가문 뿐 아니라 피렌체 사회에 신학 철학 수사학에 탁월한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 후 르네상스에 대한 탁월한 감각이 있던 교황은 그를 로마로 초대했고 작가 당시는 이 학자가 세계의 수도인 로마에 체류하면서 대단한 인문주의자였던 교황 식스토 4세를 도운 인물이다.

 

작가가 이런 인물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평가한 것은 대단히 파격적이며 예언적 표현이다. 그리고 현대 공의회 문헌이 강조하는 성화 성소의 보편성즉 모든 크리스챤들은 성덕에 불림을 받은 형제와 자매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인식이 바로 이 작품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식스토 4세 교황은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문제가 많은 교황이었으나, 당시 현실에서 문화와 예술의 발전에 대단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식스티나 경당을 오늘의 모습으로 남김에 일조를 했던 공로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오늘도 식스티나 경당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는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더 감상하고 싶어도 인파에 떠밀려 나아가야 하는 한마디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작품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복음을 시각적으로 감상하고 있다.

 

앞면에 복음적 내용을 상기시키는 세 장면과 함께 양쪽으로 작가 당대에서 예수의 제자 역할을 하던 로마에서 살고 있던 고귀한 인품의 피렌체 인들을 등장시킴으로서 인간성의 존중을 강조하던 르네상스라는 시대 흐름 안에서 작가가 활동하던 시대를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과 고귀한 인품의 사람들을 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울타리 안에 담고 있다.

 

그 후 건축된 베드로 대성당의 회랑이 큰 팔을 벌리고 베드로 사도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상징처럼 참으로 새롭게 표현되는 복음적 표현처럼 신선하고 감동적이다.

 

작가는 당시 시작되던 키아로시쿠로(Chiarosicuro) 기법으로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밝아지면서 청아한 하늘을 배경으로 일군의 새들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처럼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으로 예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며 실천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전개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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