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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아노 십자가

by 이종한요한 posted Oct 1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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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다미아노 십자가 (12세기)
   가 : 미상
   기 : 목판 템페라 210cm x 130cm
소재지 : 이탈리아 아시시 성녀 클라라 대수도원

이 땅에 프란치스칸 가족이 증가하면서 생기게 된 것이 바로 다미아노 십자가이다.

우리 문화에서는 생소했던 채색 이콘인 이 성화는 이제 교회 안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친숙한 십자가가 되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성화 앞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자주 바치셨다.


 


“지극히 높으시고 영광스러운 하느님이시여.


내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 주소서.


주님, 당신의 거룩하고 진실한 뜻을 실행하도록


올바른 신앙과 확고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시며


지각과 인식을 주소서. 아멘.”


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 앞에서 드리신 기도


 



이 십자가의 기원은 성 프란치스코 탄생 이전인 10세기까지 소급되고 있기에 성 프란치스코의 가르침과는 무관한 것이다.

다만 성인이 이 십자가를 바로 보면서 특별한 신앙 체험을 하게 되면서 이 십자가는 프란치스칸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 십자가가 보관된 다미아노 기도소는 동방의 의사였다고 전해지는 다미아노 고스마 성인에게 봉헌된 소성당이며 규모는 작은 것이었지만 어려운 처지에 있던 신자들이 기도드리기 위해 자주 찾던 법적이며 형식적인 차원의 교회가 아닌 참으로 삶의 어려움 속에서 찾아 지성으로 기도하면서 많은 은혜를 확인한 곳이기에 신앙의 차원에서는 달걀의 노른자처럼 중요한 곳이었다 어느 날 성 프란치스코가 이 성당에 와서 기도하던 중 십자가에서 “가서 나의 집을 고치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자기 삶의 구체적이며 신적인 확신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한마디로 성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중요한 회심의 결단을 실천으로 옮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 말씀을 눈에 보이는 성당을 고치라는 것으로 알아듣고 아시시 주변에 폐허가 된 성당을 수리하다가 나중에 이것은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 영적 실체로서의 교회임을 알고 당시 부패와 사치에 찌든 교회를 새롭게 할 수도회를 창설하게 되었기에 이 사건을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창설사의 중요 부분으로 볼 수 있다.



한데 우리는 이것을 성인들에게 연관되는 불가사의한 기적으로 치부하지 말아야 한다.

그가 하느님의 뜻을 찾던 구도자로서의 구체적인 신앙 체험의 실현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것을 너무도 쉽게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치부하고 보면 가장 사람들 가운데 실현되어야 할 프란치스칸 삶이 현실과 유리된 어떤 가상의 삶이 되고 만다.



크리스천들은 어떤 때 개인의 감성적 체험이든 하느님의 안배이든 하느님께로 회심할 계기가 생기며 성 프란치스코의 이 체험 역시 하느님의 도구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힘을 충전한 기회로 보아야 하며 누구에게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런 기회가 오기에 성 프란치스코처럼 이것을 잘 이용하기 위해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을 키워야 한다.



근대에도 프랑스의 시인이며 지독한 무신론과 공산 사상에 찌들었던 레옹 볼로와의 회심 체험은 인간적인 상상을 초월하는 큰 변화의 산 예로 볼 수 있다.



예리한 감성의 소유자였던 그에게 부유하고 무식한 지도자들이 있는 가톨릭교회의 현실은 더없이 추악하고 인간이 지녀야 할 기본 품위도 지니지 못한 부도덕한 집단이기에 역사에서 사라져야 할 기생충들의 집단으로 여겨 자기의 시심을 이용해서 반교회적인 시를 지어 사람들의 마음을 교회로 떠나게 만들 생각을 하면서 그 장소로 노트르담 대성당을 택했다.



그러나 그 역시 작가적 양심이 있는 인간이었기에 직접 성당에 가서 자기가 확인한 것으로부터 시를 작성해야 자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성탄절 대성당에서 하는 저녁기도인 성식만과(Vesperas) 에 참석했다.



성탄절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를 바치기 위해 성당을 찾은 사람답지 않은 그의 양심의 부담으로 그는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기둥에 몸을 숨긴 상태로 살돈느 소년 합창단이 부르는 성식 만과에 참석했다.



하느님의 영과 교통하기 위해 모인 신자들과 전혀 다른 어두운 감정으로 교회를 헐뜯을 구실을 찾고자 혈안이 된 그에게 하느님의 영이 역사하셨다.


그는 성가를 듣는 순간, 마치 강한 전류에 감전된 사람처럼 “여기에 진리가 있다는” 강한 확신을 느끼면서 그가 그토록 증오하던 가톨릭교회의 자녀가 되어 남은 인생을 교회를 옹호하고 돕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하게 되었다. 인간의 머리로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노트르담 대성당엔 그가 교회를 헐뜯을 자료를 찾기 위해 서 있던 자리에 “여기서 레옹 볼로와과 회심했다는” 표지판을 세웠다.


  이런 관점에서 프란치스코의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의 체험 역시 우리와 동떨어진 어떤 기적 체험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가능하고 필요한 중요한 체험의 하나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십자가는 프란치스칸들에게 있어 너무 소중한 감동을 주는 성물로 사랑받아 왔으며 다미아노 수도원에 사시던 클라라 성녀가 새로운 수녀원을 지어 이동할 때 그 수녀원 성당에 모시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우선 이 십자가의 주제는 성 프란치스코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부활하시어 영광중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며 요한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사건을 중심으로 제작된 것이다.



이처럼 이것은 다른 이콘과 달리 예수님은 부활하신 분이요, 악의 승리자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검은 바탕에 도드라지게 등장인물들을 배치하고 있다.



가시관을 대신하여 영광의 관을 쓰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은,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주십시오” (요한 17,1)

작가는 요한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빛과 어두움을 정확히 묘사하기 위해 죄악의 상징인 검은 색 바탕에 승리한 예수님의 모습을 부각함으로 나름의 십자가 신학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우선 중요 부분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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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몸

예수님의 몸이 작품 전체의 중간에서 압도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부로부터 전권을 받은 분이심을 알리는 것이다.



인간으로서도 너무도 비참하고 실패한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비참한 삶을 마치신 그분의 삶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한 영광의 전주곡임을 작가는 알리면서 바로 그 영광의 실상을 죽음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고통스러움을 전혀 느낄 수 없는 평안한 자세로 유연히 펼쳐진 팔은 고통스러운 몸짓이 아닌 평안한 자세로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포옹하는 자세이다.



마치 베드로 대성당의 회랑이 모든 순례자를 껴안는 모습인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을 찾는 팔을 벌려 받아들이려는 아버지의 자세처럼 펼쳐진 것과 같다.




예수님의 몸은 십자가에 묶인 것이 아니라 너무도 편안하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무게의 중심이 없는 듯 공중에 떠 있는 자세여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그분을 세상에 묶어놓을 수 없는 온전히 자유로운 존재임을 알리고 있다.




그분이 극도의 고통의 상징인 십자가의 죽음에서도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그분 삶의 실패가 아니라 영원한 승리이기 때문임을 믿었고 성부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계심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증거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자원하셨기에“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한 15,13)는 자기 사랑의 실현으로 십자가를 보기에 십자가는 그에게 있어 하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 같은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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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후광



우리에게 익숙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후광은 고통스러운 가시관을 쓰시고 모든 인간적인 절망과 고통으로 계시는 모습이었다.


예수님의 후광의 주제는 바로 가시관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예수님의 후광은 군인들과 악당들의 조롱으로 얼룩진 모습이 아닌 영광의 후광으로 대치되어 있다.

그렇나 이 영광의 후광 뒤에는 십자가를 새기고 있어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영광의 시작임을 제시하면서 허황한 승리감에 도취하지 않도록 안배하고 있다.


예수님의 얼굴을 차근히 바라보노라면 고통에 대한 상념 보다는 그 평온한 모습에 마음이 끌리게 된다.

잘 정리된 머리카락은 얼굴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평온한 아름다움과 기품있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그분의 큰 눈은 그분이 “살아 계신 분”임을 알리고 있다.

이것은 묵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 말씀을 확인하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묵시 1,17-18)





또한 예수님의 목 역시 일반적인 표현에 비겨 상당히 크게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 영을 불어 넣어주시는 분이심을 알리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어주시며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을 것이다.” (요한 2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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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옷

전통적인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옷은 가려야 할 부분을 가리는 수준이며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선 전혀 다르게 제시되고 있다.

금실로 바느질한 아마포 옷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구약에서 사제직을 수행하던 다윗 왕과 같은 존재가 입은 옷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마태 12,4)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인류를 구원하실 대사제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실패의 상징이 아닌 영광의 상징임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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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손 아래쪽과 하늘의 천사들



   예수님 머리 윗부분에 10명이 넘는 천사들이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옹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천사들은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옹위하고 있으며 모두 환호작약하는 모습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많이 그린 지오토(Giotto)를 위시해서 예수님의 수난 장면과 연관되는 성화에 등장하는 다른 성화에서 천사들은 주님의 수난을 생각하며 하나같이 슬퍼하는 모습인데 여기선 하늘로 영광스럽게 오르시는 주님을 옹위하기에 밝고 기쁜 표정이다.



 이 천사의 밝은 표현이 작가의 대단한 독창성이며 이 성화의 성격을 더 선명하고 경쾌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못으로 박혀 상처 입은 손 아래에도 4명의 천사가 있는데, 하나같이 예수님의 못 자국을 바라보며 경이의 눈길을 보인다.



이것은 천사들은 예수님 수난의 저편에 있는 승리의 영광을 미리 감지했기에 영적인 의미를 확인하고 미리 기뻐하는 모습이다.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이사 53,5)



수난의 여정에 드러나는 예수님 수난의 진면모인 영광과 승리를 참으로 실감 나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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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팔 아래의 인물들



예수님의 팔 아래 오른쪽엔 성모님과 사도 요한 오른쪽엔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맨 왼쪽이 예수님의 도움으로 아들의 병을 고친 이방인 백인대장이며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우선 이 십자가는 다른 작가들이 십자가 밖에 모셨던 등장인물을 다 십자가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 또한 특징이다.



이들 모두가 주님의 구원 사업의 협력자이며 동반자임을 알리기 위한 파격적 표현이었다.

여기 등장하는 다섯 인물들은 자기의 특성을 보일 수 있는 다양한 복장을 하고 있으면서도 키는 꼭 같이 그렸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 모든 인간은 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동질성이 정체성임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 인물들은 다양한 복장을 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닮았다는 것이 특징이다.

모두가 큰 눈, 작은 입, 모두가 계란형 얼굴을 하고 있다.



이것은 성서의 다른 구절을 상기시킨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로마 8,29)



하느님의 구원받을 존재로서의 인간은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모습을 세상에 보이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바로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의 공통점은 주님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함께 한 존재임을 알리면서 크리스천들이 실재 삶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보일 수 있는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알리고 있다.

껍질만 하느님으로 포장하고 사는 사람들, 사제복이나 수도복을 입고 살면서도 자기 안의 삶에만 몰두하기에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보이기보다 실망 요인이 되는 계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우선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다.

보통 통념적인 성화에서 십자가 양편에 등장하던 성모님과 사도 요한을 여기선 한쪽으로 모았는데 이들 표정 역시 하나같이 밝은 표정이다.



두 분의 손은 십자가를 향해 나란히 있는데, 이것은 그분의 부활을 확인했다는 기쁨과 희망의 손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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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



작품의 제일 왼쪽에 백부장을 등장시키는데 이 사람은 크리스천이 아닌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으로부터 극단의 칭찬을 들은 인물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




교회 전례는 성체를 영하기 전 바로 이 백부장의 기도로서 성체를 배령하게 만들 만큼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다.



이 백부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었을 때 십자가를 지키며 참으로 위대한 고백을 했다.



“참으로 이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셨다.” (마르 15,39)



이 백부장의 뒤엔 조그만 소년이 있는데, 바로 주님 생전에 치유받은 아들로 볼 수 있다.



이 백부장은 다른 등장인물과 달리 머리 뒤에 후광이 없다.

그러나 한 손엔 막대기를 쥐고 있고 다른 손은 펼쳐 세 손가락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다.



막대기는 그가 생전에 지은 카파르나움 회당을 상징한다면 세 손가락은 삼위일체 신앙을 상징하는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 해석이나 이 작품의 백미는 바로 이 백부장이고 우리의 신앙이 순수성을 더하기 위해선 바로 이 백부장의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의 연륜을 더하면서 우리에게는 군더더기 붙을 수 있다.

무슨 직책이 감투로 둔갑할 수 있고, 연륜이 기득권으로 표현되면 그 신앙은 겉은 미끈하지만, 자세히 바라보면 생명을 찾을 수 없는 박제품이 되고 만다.



이 백부장의 모습은 바로 우리가 오늘날 빠지기 쉬운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고 멋지고 아름다운 신앙을 살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제공하고 있다.



가톨릭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감동적이며 멋진 삶의 자리가 될 수 있는지 백부장의 신앙은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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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아레초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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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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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페이지 가온 2022.10.16 05:54:13
    성화를 바라보면서.... 자상한 설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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