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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영성체 (First Communion: 1896) : 파블로 피카소 ( Pablo Picasso : 1881-1873)

by 이종한요한 posted Nov 2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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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첫 영성체 (First Communion: 1896)

작가 파블로 피카소 ( Pablo Picasso : 1881-1873)

크기 : 118 * 166 (cm)

소재지 : Barcelona, Picasso Museum


 

       예술사에 있어 20세기를 통털어 피키소 만큼 영향을 끼친 예술가는 없다그는 작품의 심원성과 작풍의 다양성으로 예술가들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입체파의 창시자로 르네상스 시대 이후 불변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소실점과 원근법을 무시하고 여러 시점에서 본 모습을 한 화면에 동시에 구현한 혁신적인 작품으로 회화의 역사를 완전히 바꿨다.

또한 그는 하나의 스타일에 안주하지 않고 어느 시대 예술가들도 시도하지 않았던 다양한 분야에서 상상도 못한 표현을 위해 평생 동안 도전했다회화뿐만 아니라 조각도자기판화 작품 등 도전하는 것 마다 새로운 영역을 창출하면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아흔두 살의 인생을 장수하면서 사망할 때까지 80여 년간 작품 활동을 했고 5만여 점의 작품을 남겼는데이 중에서 대표적 걸작이라는 것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하나같이 독창적인 작품성을 인정받는 참으로 대단한 작가였다.

 

1881년 스페인 마르욜카에서 교직에 있는 부모 슬하에 태어났고 그의 작가로서의 자질을 어릴 적부터 발견한 부모에 의해 그는 4살에 미술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이 작품은 아들의 예술성을 인정한 그의 부친의 권고에 따라 15세에 처음으로 바르셀로나 미술전에 출품했던 작품이며 그의 초기 작품이 그렇듯 사실주의 작품으로 시작한 것이다이것으로 그의 작가로서의 역량이 공적으로 인정받은 작품이다.

 

그의 여동생 롤라(Lola)의 첫영성체 장면을 작품화 한 것이다첫영성체는 가톨릭 신앙의 표현에서 대중적이면서 참으로 심원한 신앙내용을 표현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 여정에서 신앙의 시작은 유아 세례이다태어나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의 신앙에 의해 신자로서 입적되는게 세례라면 첫영성체는 처음으로 자의에 의해 크리스챤으로서 하게 되는 하느님께로 헌신의 약속이다비록 사목자나 부모나 교리교사의 도움을 받긴 해도 자의적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첫 체험이다.

 

first-communion.jpg

 

       이 작품은 가톨릭 신앙의 아름다움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표현함으로써 15세의 소년으로서는 믿어지지 않는 알찬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자기 여동생이 첫영성체 복장을 하고 제단 앞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있다.

 

이 소녀는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을 모신다는 마음에 정성을 다한 경건한 긴장 상태에 있다이 소녀의 맑고 아름다운 마음을 대변하는 소녀는 자기 몸 전체를 감은 흰색의 첫영성체 복을 입고 있다.자기 나름 대로 예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맑은 마음의 상징이 바로 흰옷으로 드러나고 있다.

 

소녀는 무릎을 꿇고 예수님이 계신 제단을 바라보고 있는데제대포 역시 예수님의 마음의 상징인 듯 흰색이어서 소녀의 맑은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하며 예수님이 받아 주신다는 표현으로 드러나고 있다.

 

소녀가 바라보는 제단 위에는 촛불이 켜져서 주위를 비추고 있다. “나는 길이요 빛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주님 말씀처럼 주님을 모시고 그분의 제자로 살고픈 소녀의 맑은 마음의 안내자로 주님이 도우시겠다는 상징으로 드러나고 있다.

 

15세 소년인 작가는 첫영성체 장면을 사진 찍듯 정확히 그린게 아니라 소년으로서 범상한 신앙의 내용을 담았다는 것이다작가는 이 작품 안에 자기가 담고 있던 신앙을 동생에게 투사했고 이것이 성 미술로서 작품성을 더 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서구식 가톨릭 신앙을 비꼬면서 가톨릭 신자는 일생에 3번 성당에 가는데유아세례 때 ,결혼식 때 그리고 멋대로 살다가 장례식을 성당에서 하는 것으로 끝낸다고 한다.

 

그런데 첫 영성체는 초기 신앙 표현이면서도 자발적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나의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순수하면서도 자발적인 신앙의 표현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어떤 이들은 첫영성체의 결심과 감동을 일생을 이어가면서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첫영성체의 기억으로 신앙의 학교를 졸업하기도 하나 첫영성체는 대단한 감동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공적으로 자질을 인정받았고 이후에도 전통적인 표현인 예수님이나 성인들의 삶 신앙을 주제로 한 작품을 그렀으나 그의 작풍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제도적인 신앙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되었다.

 

예술적 표현의 다양성처럼 그의 사생활 역시 잦은 이혼과 결혼으로 이어지면서 제도적 교회가 요구하는 틀에 박힌 조건들을 준수할 마음이 없었기에 그는 자연스럽게 제도적인 교회에서 이탈한 삶을 살았다.

 

우리는 보통 수계 신자와 비수계 신자라는 구분으로 쉽게 사람을 분류하는데작가의 삶은 바로 이런 구분의 아쉬운 면이나 생각할 면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비록 제도적 교회의 가르침을 떠났으나 그의 신앙 표현은 제도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복음적인 차원에서 어떤 예술가도또한 당시 교회도 하지 못했던 파격적인 예언적 방법으로 표현했다.

 

그는 자기 사생활안에서 교회를 떠났으나 그의 삶 안에는 일생을 통해 복음적 가치인 이웃사랑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에 대한 연민폭력에 대한 대단한 거부가 있었기에 그가 유명한 것 만큼 세계적 차원에서 그는 작품을 통해 폭력을 거부함으로써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게 되었다.

 

1937년 4월 26일 작가의 나이 56세로 예술의 경지가 한창 원숙했을 때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Gernica) 라는 마을에 독일 비행기가 대낮에 나타나 마을을 폭격했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민족이 아닌 고유한 언어와 정체성을 지닌 바스크 사람들로서 당시 공화파로서 보수 기득권자들의 집단인 왕당파와는 거리를 두는 관계였다당시 스페인은 군부 독제자인 프랑코 총독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왕당파의 프랑코 총통은 독일 독재자 히틀러와 한편이 되어 자유 세력을 견제했으며이날 독일에서 새로 개발한 무기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게르니카에 와서 폭격을 하는 어처구니 없는 만행을 저질렀고 1540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살해되었다.

 

세월호의 아픔이 있는 우리들은 가톨릭 신자로서 평일 미사도 참석하는 어떤 의미의 대단한 수계 생활을 한다고 볼 수 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프랑코가 어떻게 이런 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처지에 스페인 교회의 지도층은 조용히 침묵했다.

 

이유는 간단하다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프랑코와 대결한다는 것은 교회라는 조직에 손해가 될 수 있으니 이런 경우에 침묵하는 것을 교회는 자신의 지녀야 할 신중성의 태도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는 교회가 이런 경우에 교회의 실재적 이익을 앞세워 침묵하는 사이 제도적인 교회를 떠난 피카소는 분연히 일어났다.

 

그는 비록 제도적인 교회는 떠났지만 복음적 가치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게르니카라는 작품을 만들어 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 박람회에 제시함으로서 복음적 양심을 증거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 우리 교회에서도 이런 관점을 쉽사리 발견되고 있다교회 지도자들이 불철주야 복음을 외치지만 그들의 최종 관심은 복음 보다는 교회의 이익이나 확장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을 지혜로운 처신으로 여기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피카소는 이런 면에서 오늘 교회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다시 생각해야 할 부분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교회는 결국 기득권자 힘있는 자들의 편에서서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돕자는 구호만 남발하기에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회안에서 복음을 발견하기 힘들게 되기에 결국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교회에 대해 실망하는 것은 교회가 외치는 복음 때문이 아니라 그 위선성 때문이다성서에 말씀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실천을 강요하면서도 자신은 실천치 않는 그 이중성의 태도이다.

 

교회는 입으로는 복음을 외치지만 실질적으로 복음을 보이지 못하나 작가는 복음을 외치지는 않았으나 복음을 실제로 보임으로써 특별한 크리스챤의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피카소의 인간애와 불의에 대한 고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들 듣고 그는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그였지만 열강의 세력 다툼에 의해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우리 민족을 주님이 말씀하신 이웃으로 생각하며 그는 분노하면서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작품을 통해 열강의 만행을 고발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피카소는 어떤 면으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가로서 비수계 신자였으나 교회가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침묵하는 순간에도 그는 분연히 일어나 작품을 통해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친구인 히틀러와 동맹해서 자기 동족을 살해라는 프랑코는 교회 차원에선 대단히 열심한 신자였다평일 미사도 빠짐없이 참석하는 모범신자였다.

 

그러나 복음과 교회 조직 유지 중 어느 것이 크리스챤 삶에서 더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하는지 말하면 누구나 복음의 실천이 우선 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인정하고 외친다.

그러나 복음의 실천이 교회의 현실적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손실이 오는 순간에는 침묵하다가 교회 이익이라는 차원으로 돌아서는 것이 오히려 지혜롭고 신중성있는 태도라는 것이 오늘까지도 이어지는 교회 현실이다.

 

작가는 이런 면에서 교회를 떠난 신자라는 관점 보다 교회 밖에서 교회가 실천하기를 주저하는 복음적 외침을 과감히 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공의회 문헌 사목 헌장의 다음 구절은 작가의 작품성에 너무 어울리며 자기 조직의 이익을 복음 보다 더 비중을 두면서 복음을 화려한 말로 우회시하고 있는 교회에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이런 면에서 피카소는 성미술의 관점에서도 교회의 구조적 결점을 메워줄 수 있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작가로 볼 수 있다.

 

기쁨과 희망슬픔과 고뇌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목헌장 1)

 

오늘 우리 교회는 사회 정의 실천의 투사처럼 행동하고 있으며 사회의 많은 부정이나 부패 고발에 앞장서고 있다이것은 어디까지나 교회가 정의에 앞장서고 있다는 과시로서의 효과는 있겠으나 그러나 교회가 정의를 외침으로 어떤 불이익이 오는 순간아니면 교회안의 정의에 대해선 놀랍도록 침묵하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아쉬운 면이 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주님이 그토록 질책하신 회칠한 무덤과 같은 모습을 어떤 때 교회가 보이고 있는 현실에서 피카소는 전통적인 신앙 생활 보다 순수한 복음 자체에 더 매력을 느끼면서 교회가 실천이나 증거를 어려워하는 자리에서 용감히 복음을 외쳤다는 것은 참으로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피카소는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기에이 작품처럼 성화를 그려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

 

그는 교회 밖에서 살면서도 일생을 교회가 선포하기를 주저하는 순간 가난한 자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특히 권력형 폭력에 대해 강하게 저항하고 고발함으로 가톨릭 신자로서 보여야 할 큰 증거의 삶을 산 교회의 아쉬운 부분을 보완해 준 자랑스러운 가톨릭 신자라 볼 수 있다.

 

Massacre in Korea.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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