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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성탄 : 운보 김기창 베드로

by 이종한요한 posted Dec 2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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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 예수의 탄생.jpg


제   목 : 예수 성탄 (1954)

작   가 : 운보 김기창 (베드로)(1913- 2001)

크   기 : 76 X 63Cm

소재지 : 서울시 서울 미술관

 

성탄은 하느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심을 경축하는 크리스챤의 축일이다하느님은 비가시적인 분이시지만 인간이 되심으로 우리와 같은 가시적인 존재가 되었기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그분의 모습에 대한 관심이다.

 

가톨릭 교회 역사가 200년 남짓인 우리나라 교회의 현실에선 자연스럽게 서양에서 정착된 예수의 모습을 아무 부담이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 역시 서양인들이었으니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예수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 탄생하셨다는 사실에서 크리스챤들은 자기와 가장 가깝고 친숙한 예수의 모습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모습은 처음에서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면서 후광이나 신성에 관계되는 맣은 부분이 강조되다가 중세기에 들어오먼서 서서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강조되면서 그분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라는 인간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 후 그리스도교가 서양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화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 지역인들의 정서에 어울리는 예수님의 모습이 정착되면서 이것은 예수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차원에서 의미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우리 교회 역시 서양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드리면서 자연스럽게 서양풍의 성화와 서양풍의 건축을 교회 양식으로 받아 들이게 되었는데, 작가의 작품은 이런 관점에서 이 땅에서 토착화된 성화의 시발점이라는 면에서 대단한 의미성을 지닌 것이다.

 

예수의 모습을 만족성에 따라 표현하는 것이 신앙의 보편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내용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을 다음 성서 구절에서 그 당위성을 찾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 1-2)

 

세례를 받은 크리스챤들은 그가 어떤 민족이나 문화에 속하던 다 예수의 생명에 동참하며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기에 그가 속한 문화와 예술 전통은 예수님의 모습을 표현하는게 가장 이상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작가는 어린 시절 장티푸스를 앓다가 고열로 인한 언어장애를 지니게 되었다. 한 마디로 정상적인 삶을 사는데 언어장애라는 큰 시련에 도달한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여장부다운 지혜로운 결단을 내렸다.

 

언어적 능력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그림을 가르쳐 아들의 인생을 열어주기로 하고 당시 크리스챤으로서 거의 독보적인 화가였던 이당 김은호(1892-1979)화백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게 했다. 이당의 도움으로 작가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자신의 소질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이당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김기창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림을 배운지 6개월 만에 조선미술전람회(선전)`판상도무(板上跳舞)`로 입선해 일찍이 대가의 소질을 보였다.

 

아기 예수의 탄생.jpg


이 작품은 작가가 이 땅에 그리스도교 예술의 토착화를 위해 처음으로 시도한 작품이라는 데 큰 의미성이 있으며, 한국적 성화로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것이다. 작품은 빠르고 부드러운 운필과 뛰어난 구성력 등 운보의 회화적 성취를 보여준다.

 

작가는 조선 시대 복색의 인물들과 전통 한옥이 세필로 묘사돼 세련되면서도 자연스러운 느낌의 풍속화를 연상시킨다. 작가는 이 작품을 6,25동란으로 온 국민이 고통을 받던 시기에(1952-1953) 예수님의 일생을 30장의 주제로 완성했는데, 그 중 성모영보에 이어지는 두 번째 작품이다. 한마디로 작가 나름대로의 신앙이 여과된 성서적 신앙의 시각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작가가 이 작품을 계획하는데에는 당시 감리교 신자였던 작가에게 예수님의 일생을 작품화해보라는 서양 선교사의 권고에 힘입은 바가 큰데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결단이었다.

 

오늘날에도 이 땅의 개신교 신자들의 대종은 우상숭배와 예술을 구분못하는 무지와 편견에 의해 또한 성미술에 대한 무지한 오해와 편견에 의해 성서적 내용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데 거부반응을 보이는데, 반세기 전 성모영보를 시작으로 성서를 그렸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히 열린 시도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아직도 이 땅의 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미국이 개신교의 원조로 여기며 시위를 할 때 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나와 우리나라가 마치 미국의 식민지 같은 수치스런 불쾌감을 주고 있는데, 예수님을 한국인의 모습으로 표현했다는 자체가 개신교도로서는 대단히 열린 사고로 볼 수 있다. 가히 혁명적이라 볼 수 있으며 오늘 태극기 부대의 개신교 신자들의 비크리스챤적인 사고방식을 깨우칠 죽비로 볼 수 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성서의 다음 내용을 그린 것이다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1-7)

 

서양식 작품에 너무나 익숙한 우리들에게 성화라고 부르기엔 좀 생경스러운 느낌의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를 연상시키는 배경으로 성탄의 내용이 펼쳐지고 있다.

 

작가는 우선 이 작품 전체에서 예수님을 갈릴래아의 어부나 나자렛 목수의 아들이란 성서의 설정과는 달리 우리 정서에 걸 맞는 고귀한 인품을 갖춘 선비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역사가 전혀 다른 현실에서 이 땅에서 에수님을 갈릴래아의 어부나 목자로 표현하는 것은 개념 전달에 있어 큰 혼란이 올 수 있기에 작가는 선비를 통해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성서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지가 말구유로 표시되고 있으나 작가는 우리들의 삶에서 너무도 친근한 동물인 소가 머물고 있는 외양간을 배경으로 하면서 농경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한없이 인간에게 친근감을 주고 있는 소를 배경으로 함으로서 구세주의 탄생 분위기를 우리의 정서에 연관 시켜 따스하게 만들고 있다.


옆으로 동네 아낙네들이 출산한 산모인 성모님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인데 하나 같이 성탄을 기쁨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적 성탄화에서 볼 수 있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정서가 아닌 해산한 가정에서 볼 수 있는 축제적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성모님이 동네 아낙네들에게 아기 예수를 보이자 경배를 하는 앞에 숫닭 한 마리가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성서에 나타나는 닭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배반을 알리는 상징으로 드러나고 있으나 여기에 우리 민족 고유의 상징이 드러나고 있다.

 

숫닭은 새벽을 알리는 나팔수이다. 새벽은 이제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시간이기에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란 상징이 있는데, 예수의 탄생은 바로 인류 구원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란 상징을 숫닭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요셉의 뒷편엔 여물을 먹고 있는 당나귀가 있는데, 이것은 얼마 후 헤로데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이집트로 피난 가야 하는 성 가족을 도울 상징성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다.

 

작가가 그린 많은 작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 작품이 동족상잔의 전쟁 기간 중에 탄생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김기창은 6.25 전란 시 아내 박래현의 처가집이 있는 군산 인근의 자그마한 농촌 마을 구암동에 피난짐을 풀었다. 여기에서 작가는 조선 시대의 풍속에 따라 30점의 성화를 완성하게 된다.

 

가장 암울한 시기에 민족수난의 가혹한 현실 속에서 간절한 심경으로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구하였다. 이 어려운 시기에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어떤 의미의 기도로 볼 수 있다.

 

피난 시절이라 미술 재료를 구하기 힘든 여건 속에서도 나는 다른 모든 일을 전폐하고 이 성화 제작에 내 온 심혈을 다 쏟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작가는 유년 시절부터 개신교 신앙의 가정에서 성장하였고 개신교 신자였던 좋은 스승을 만났기에 예수님의 일생을 다루는 대작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한 작가가 여러 면에서 악재의 연속인 전쟁 시기에 불과 1년이라는 시간에 이런 대작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이 작품에 얼마나 심취했는지를 알리는 좋은 증거가 된다. 작가의 이런 극적인 작품 제작 과정은 요한 묵시록을 저술한 사도 요한이 묵시록의 서두에서 남긴 다음 말씀을 연상시킨다.

 

여러분의 형제로서,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환난을 겪고 그 분의 나라에 같이 참여하며 함께 인내하는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 파트모스라는 섬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나는 성령에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소리처럼 울리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앝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아에 보내라.” (묵시 1:9-11)

 

한마디로 작가는 서양적인 표현의 성미술을 전부로 여기던 시기에 우리 민족의 정서에 가장 부합 하는 표현으로 예수를 그린 것은 혁명에 가까운 대단한 예언적인 시도로 볼 수 있다.

 

작가가 꿈 속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은 내 삶 중에서 가장 기뻤던 일이며, 그가 그린 많은 작품 가운데서 <예수의 생애> 연작이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고 밝힌 것은 그가 이 작품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깊은 신앙 체험을 했고 이것이 작품 제작에 근본적인 원동력이 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두운 동굴 속에는 한줄기 빛이 어디에선가 비껴 들어오고 있었고 나는 그 빛줄기 아래에서 예수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통곡하고 있었다. 통곡을 끝내고 문득 정신을 차리니, 나는 동굴이 아닌 햇빛이 눈부신 방에 앉아 화필을 들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깜빡 졸았고 졸다가 예수의 괴기한 꿈을 꾼 것이었다.”(김기창 성화집 예수의 생애(1978)중에서)

 

개신교 신자였던 작가는 우연한 인연으로 가톨릭에 개종해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아 열심한 가톨릭 신자로서 인생을 마쳤는데 그의 개종 이유는 종종 회자되는 무슨 교리적인 차원이 아니었다.

 

이 땅에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는 묘한 불편한 정서가 있는데 개신교 신자들은 가톨릭 교회가 자기들의 종갓집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무지나 편견에서 연루된 망언과 망동을 서슴치 않는 일방, 가톨릭 교회 역시 자기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개신교의 분열성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작가는 다행스럽게 그가 개신교에 머물 때에도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에도 오직 예수만을 삶의 표적으로 여겼기에 차이가 있을 수 없었다. 산에 정상에 오른 후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똑같이 보이는 것과 같은 경지이며 작가는 이런 면에서 개신교 신앙도 편협하거나 왜곡된 것이 없이 반듯이 산 자랑스러운 크리스챤이었다.

 

그의 가톨릭으로 개종 동기 역시 참으로 신비스런 감동을 주고 있다. 역시 화가이며 작가가 자기를 도우라고 하늘이 보낸 선녀로 생각하던 부인 박래향이 셋째 딸을 임신했을 때 꿈속에 그 딸이 수녀가 되는 꿈을 꾸자 작가는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라는 작품을 남겼다.

 

사랑하는 딸이 수녀가 된다는 것은 개신교 신자로서는 참으로 특별한 체험이었고 더 신기하게도 그 딸이 장성해서 꿈처럼 마더 데레사의 영성을 사는 사랑의 선교회 수녀가 되자, 작가는 1985년 김 수환 추기경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으면서 종교만 바꾼 것이 아니라 가톨릭 신자로서의 신앙생활에 더 없이 만족하고 충실했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의 성체 성사를 모시고 성체 앞에서 기도할 수 있는 기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는 가톨릭 신자가 된 후 예수의 성체가 꿈에도 보이고 백주에도 보였다.”

 

오늘 이 작품은 바티칸 현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 미술계의 원로이신 최순우 선생의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이 작품이 종교화의 영역을 뛰어넘어 우리 민족 정서의 긍정적인 표현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을 알리고 증거하고 있다.

 

이 성화 연작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생애를 담은 것이어서 더 그러하지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진 그 간절한 자세는 더 할 나이없고 또 한국 초라한 초가집들과 평범한 한국 시골의 풍경들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지만 결코 어색하지도 천박하지도 않는 것은 한국 작가로서 그의 두드러진 기량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는 개신교 신자로서도 바로 살았고 가톨릭 신자가 된 후에도 멋지게 산 자랑스러운 크리스챤이다. 식민지 시절 친일 성향의 작품에 동참했다는 실수를 인정한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삶에 모든 것을 다 바친 혼신의 정성어린 작품은 그를 멋진 인품의 인간으로 기억되게 만들고 있다.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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