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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심판 : 조르지오 바사리 (Giorgio Vasari)

by 이종한요한 posted Nov 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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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최후심판 (1572-1579)

작    가 : 조르지오 바사리 (Giorgio Vasari)

크    기 : 프레스코

장    소 : 이태리 피렌체 대성당 둥근 천정(Cupola)


최후심판은 중세 교회 미술에서 매력적이면 중요한 주제였는데 이것은 신자들이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신앙 안에서 충실 하라는 교훈적인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잦은 전쟁과 수시로 발생해서 사람들을 공포에 빠트린 페스트의 창궐로 생명에 대한 극단의 위협 아래 살아야 하는 중세기 사람들에게는 최후 심판이 두려움과 동시에 현세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란 그리움으로도 등장하면서 신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최후 심판에 대한 관심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중세 초기 유럽 사회는 이민족들과 무슬림들의 침입으로 유럽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대단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교도들의 침략으로 대량 학살, 재산 약탈, 촌락의 방화와 같은 불행한 일들이 겹치면서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언제 이런 불행을 당할지 모른단 생각으로 공포감을 느낄 때 수도자들은 요한 묵시록의 이해에서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발견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천년왕국이 끝나게 되면 사탄이 나타나 백성들을 현혹시켜 그들에게 성스러운 진영을 공격하게 만들고 일시적으로 이들이 승리한 것처럼 되나 최후의 승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백성에게 있으니 너무 두려워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 주제를 선택했으며 묵시록의 다음 내용을 증거로 제시했다.


“나는 또 한 천사가 끝없이 깊은 구렁의 열쇠와 큰 사슬을 손에 들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늙은 뱀이며 악마이며 사탄인 그 용을 잡아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끝없이 깊은 구렁에 던져 가둔 다음 그 위에다 봉인을 하여 천 년이 끝나기까지는 나라들을 현혹시키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탄은 그 뒤에 잠시 동안 풀려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묵시 20:1-3)


이 과정이 바로 중세 크리스챤들이 겪고 있는 불안과 고통의 과정으로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은 희망을 약속 한다.


“천 년이 끝나면 사탄은 자기가 갇혔던 감옥에서 풀려 나와서 온 땅에 널려 있는 나라들 곧 곡과 마곡을 찾아 가 현혹시키고 그들을 불러 모아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들의 수효는 바다의 모래와 같을 것입니다. 그들은 온 세상에 나타나서 성도들의 진지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도성을 둘러쌌습니다. 


그 때에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 와서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그들을 현혹시켰던 그 악마도 불과 유황의 바다에 던져졌는데 그 곳은 그 짐승과 거짓 예언자가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괴롭힘을 당할 것입니다. 


나는 또 크고 흰 옥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사라지고 그 흔적조차 낮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묵시 20: 8-11)


중세 수도자들은 유럽 크리스챤 국가들이 무슬림이나 다른 이교도들로부터 겪고 있는 고통과 현실적인 부조리를 바로 묵시록에서 발견하여 자신들이 언젠가 현세의 고통을 이기고 승리하리라는 희망을 제시하기 위해 최후심판 신앙을 강조했다.


이것은 당시 그들이 겪고 있는 역경의 이해에 큰 힘이 되었기에 교회 전체에 빠른 속도로 확산되면서 중세 고딕 양식의 많은 성당에 최후 심판의 묘사가 거의 필수적으로 등장하면서 신자들에게 불안을 극복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처럼 심판이란 하느님이 우리에게 돌이킬 수 없는 벌을 주시고자 하는 계획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의 표현임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심판이 하느님의 집에서 시작될 때가 되었습니다.”(1 베드 4:17)


그래서 중세 고딕 대성당 정문엔 거의 예외 없이 중간 문에 최후의 심판에 대한 조각을 남겼고 그 외 성당 안에 프레스코화나 다른 것으로도 최후의 심판이 필수적인 것으로 성당에 남게 되었다.


이것은 중세 교회가 처했던 어려운 상황을 신앙으로 극복하기 위한 지혜롭고  효과적인 처방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있는 “꽃들의 성모 대성당 : Santa Maria dei Fiori”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피렌체 대성당은 유럽의 여러 성당들 중에서도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성당 건축 과정 역시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닌 곳이다.


피렌체 공국이 상업과 무역으로 경제적으로 성장해지자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성당을 지어 하느님께 봉헌하자는 열망이 도시 전체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영글기 시작했고 여기에 이 도시를 지배하던 메디치(Medici)가문의 협력도 일조를 하게 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라.”는 격언을 현실화시켜 예술 문화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를 함으로서 피렌체 시가 오늘도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 남게 되는 절대적 역할을 한 집안이었다.


아무리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 해도 인재가 없으면 할 수가 없는데, 당시 이 도시에는 다른 곳에서 백년 만에 하나가 나올 까 하는 천재 수준의 인재들이 모여 있었고 브르넬리스키(Brunelleschi)와 기베르티(Ghiberti) 바사리(Vasari)같은 천재가 심혈을 기울였기에 이 성당이 완공될 수 있던 때였다.


피렌체시가 다른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선호하던 고딕 양식을 뒤로 하고 희랍 예술에 매혹된 로마인들이 선호하던 르네상스 양식의 새로운 양식으로 대성당을 계획하면서 이 도시의 지도자 메디치는 이 성당의 핵심 부분과 같은 둥근 천정(Cupola)에 고딕 대성당에 필수적이었던 최후의 심판을 그리기로 하고 당시 예술서의 작가로서 화가로서 건축가로서 명성을 떨치던 조르죠 바사리(Giorgio Vasari)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그는 당시 프레스코화에 조예가 있다고 평가되던 페데리코 쥬카리를 조수로 채용해서 이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이 작품의 기본 구도로 묵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 구절을 택했다. 하느님의 뜻에 충실했던 의인들의 승리를 암묵적인 묘사로 미리 제시한 것이다.


“그 어좌 둘레에는 또 다른 어좌 스물 네 개가 있는데, 거기에는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쓴 원로 스물네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묵시 4:4)


당시 가톨릭교회는 자기들의 부패를 극복하지 못함으로 생긴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개신교의 출현으로 상당한 고통을 받으면서 각성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반종교 개혁 운동이었으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대단히 개방적이면서 예민했던 피렌체 시도 이 운동에 동참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이들이 그전까지 볼 수 없었던 크고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자 하는 열망 역시 하느님의 영광을 보여줌으로서 가톨릭교회가 지닌 매력을 증거의 차원에서 과시하고자 하는 면이 있었다.


이들이 최후 심판의 작품으로 크리스챤들에게 구체적인 희망을 주고자 한 것은 성서의 다음 구절을 재현한다는 면에서도 큰 뜻이었다.


“그때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큰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민족들이 가슴을 치면서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마태 24:30)


그 외 마태오 복음 25장 31-46절은 최후의 만찬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여기에서 받게 되는 충격과 감동을 신자들의 일상생활에서도 체험하게 만드는 것은 신앙교육 차원에서도 도움이 된다고 여겼기에 교회 미술에 필수적인 것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아무리 이런 좋은 의도라 해도 최후 심판이라는 어감은 사람들에게 죽음 후에 받을 자신의 벌을 생각하며 뉘우치라는 협박 수준의 강요로 들릴 수도 있으나 이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들은 이 점을 고려하여 해학적이면서도 당시 개선되어야 할 사회의 부조리나 부패한 모습을 풍자함으로서 광대나 탈춤 공연이 보이는 것처럼 통쾌함도 주었다.


특히 지옥도의 부분에선 무서움보다 마음의 체증이 내려가는 통쾌한 서민정서를 표현했다.


고딕 대성당에 있던 지옥도에선 심판주이신 주님으로부터 지옥행을 선고받은 사람들 중에 당시 사회와 교회의 실세였던 왕 주교 귀족들이 굴비처럼 엮여 지옥으로 가는 모습이 발견되는데, 이것은 이들로부터 시달림을 받던 서민들에게 통쾌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일으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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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주이신 주님께서 성모님과 세례자 요한과 여러 성인들과 천사들 주위에 앉아 계신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자로 부활하신 모습인데, 십자가 고통의 그림자가 전혀 없는 건장한 남성의 모습이시다.


그분이 들고 계신 손에 보이는 못 자국 외엔 고통이나 실패의 모습이 전혀 없는 밝고 건강한 남성의 모습이시다.


작가는 이 작품을 계획하면서 자기의 창의성 발휘 이전 당시 신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던 혁신적인 면을 도입했다. 즉 로마의 시스티나 경당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심판(1536)의 도상을 원용한 것이다.


이 작품은 등장인물 전체가 나체로 등장함으로 당시 유럽 사회에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예수님 역시 과거와 같은 성성(聖性)을 강조하기 위한 섬약한 남성이 아니라 희랍 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나 로마의 쥬피터 신처럼 늠름한 남성미를 자랑하는 젊은이의 모습이었다.


작가도 여기에서 주님을 이런 젊은이로 등장시킴으로 교회의 개혁과 승리의 상징으로 제시하게 되었다. 또한 이것을 성서의 다음 구절의 당위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은 모두 아들에게 맡기셨다.(요한 5:22).”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그에게 심판하는 권한도 주셨다.”(요한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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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 25장에 등장하는 최후 심판은 오른편과 외편으로 구분되어 있다. 오른편에는 의인들로 구원 받을 사람들, 왼편엔 악인으로 지옥으로 갈 사람들로 표현되고 있으나 여기엔 3층의 수직으로 맨 위에 심판자이신 주님이 계시고 그 아래 성인들이 있으며 맨 아래 지옥으로 향할 사람들이 배치되어 수직적인 위계가 강조되고 있다.


성인들 중에는 당시에 인기 있던 성 프란치스코, 또 수도승 운동을 일으킨 성 베네딕토처럼 알만한 성인과 함께 여러 이름 없는 성인들 특히 많은 평신도들이 등장하면서 불교에서 말하는 사부대중을 표현하고 있다.


묵시록 7장에 나타나고 있는 이스라엘 12지파에서 선발된 십사만 사천명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다는 낙관적인 견해의 표현이며 최후심판이 결코 징벌의 차원이 아니라 구원을 확인하는 희망의 차원임을 알리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위에서도 이것을 반대로 가르치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집단이나 성서의 어떤 부분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며 최후 심판을 공포의 자극제로 유혹하는 유사 종교 집단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사실 최후 심판은 이런 견해와는 전혀 다른 건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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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또한 이 작품을 기획하면서 성서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던 단테의 신곡(La divina commedia:1321)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는데, 단테는 피렌체 출신으로 교회의 부패를 공격하다가 추방되어 라벤나에서 일생을 마쳤지만 그의 예언적인 정직한 표현은 오늘도 그를 시성(詩聖)으로 추앙되고 있는데, 작가는 바로 이런 단테의 영감을 작품에 담는 혁신적 시도를 했다.


하느님의 사랑과 지옥의 존재성을 조화시키지 못하는 사람에게 성서는 다음과 같이 지옥의 존재에 대한 정당성을 제시하고 있다.


“나를 물리치고 내말을 듣지 않을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요한 12:48)


이것은 당시 희랍 문화에 대한 대단한 매력을 느끼던 피렌체 시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단테는 다른 사람의 인도로 지옥과 연옥 천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지옥과 연옥의 안내자는 로마의 시성이며 유명한 서사시 “에네아스”의 저자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70-19BC)의 안내를 받고 천국 편에선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영원한 연인인 베아트릭스의 인도를 받게 된다.

단테가 이교도인 로마의 시인을 안내자로 설정한 것은 교회의 한계를 교회 안에 가두어두지 않고 세상 안으로 펼치고자 하는 혁명적 시도이며 여기에서 단테는 두 명의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35-1303)과 첼레스티노 5세를 과감하게 지옥으로 보내고 있다.


보니파시오 8세는 처음으로 교회 안에 성년을 선포한 교황이었다. 그는 유명한 정치가 집안 출신으로 식탐과 호색에 권모술수까지 겸비해서 순수함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던 추악한 인간이었기에 단테는 지옥으로 보냈다.


비록 교황이라도 순수하지 못한 추악한 삶을 사노라면 갈 곳이 지옥뿐임을 과감히 알리면서, 악마가 새로 입소한 추악한 삶을 살았던 인간들을 혹독하게 대하는 장면인데, 이것은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 1441-1523)가 오르비에또 대성당에 그린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


시뇨렐리는 인체의 과장된 근육을 표현하기 위하여 나체 남성상을 많이 그리면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에도 큰 영향을 준 작가였기에 이 지옥도에 대한 이해가 당시 사람들에게 친근감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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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 많은 작가들은 성화에 자신의 초상화나 자녀의 초상화 아니면 그 작품을 봉헌한 사람의 초상화를 남기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프레스코를 담당한 두 명의 조수들, 빈첸죠 보르기니와 페데리코 쥬카리가 성인도에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자리에 있기는 좀 부담스러운 존재라는 자의식이 있었던지 이 성인들을 경호하는 기사의 복장으로 서 있으나 당당한 모습이다.


이들이 당당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은 이 작품 제작에 대한 자기들의 자부심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 외 이 작품 제작에 큰 도움을 준 메디치 가문의 여러 사람을 등장시켜 보은의 마음을 표하기도 했다. 당대 사람들이 다 얼굴을 알만한 그런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것은 단순한 자기 과시의 차원이  아니라 이 작품의 현실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즉 최후심판이란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역사적 교훈이 아니라 자기들이 살고 있는 당대에도 해당되는 것이며 신앙의 내용은 언제나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실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중세 대성당의 이 작품 위치는 대부분 정문에 조각으로 아니면 성당 내부에도 벽면으로 했기에 보기가 쉬웠으나 이 작품은 성당의 둥근 지붕(Cupola)에 그려진 것이기에 망원경 없이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는 그런 위치에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성당에 들어와서 가장 높은 곳에 이 작품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고개를 위로 향해 이것을 보는 동작만으로도 언젠가 하느님 앞에 서야 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가다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사실이다.


한마디로 작품에 대한 감상보다는 성당에 들어와 마음이 정화된 상태에서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면에서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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