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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베리니 파운 (Barberini Faun)

by 이종한요한 posted Sep 1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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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바르베리니 파운 (Barberini Faun: 기원전 2C)


크   기 : 실물크기 대리석


소재지 : 독일 뮌헨 글립토테크(Glyptothek, Munich) 미술관




1620년 바티칸에 있는 성 안젤로 성 근처에서 희랍 시대 조각 한 점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큰 화제거리가 되었다. 이 조각은 그리스 신화의 사티로스(satyrs)의 조각으로 술의 신 바쿠스를 수행하는 반수반인(半獸半人)의 신이며, 여자와 술을 좋아하는 신화의 신이었다.




그는 음악도 좋아하기에, 연회에서 빠질 수 없는 신이며 부정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 삶의 쾌락을 주관하는 신으로 통하고 있었기에 여러 관점에서 사람들의 흥미를 끌던 신이었다. 또한 이 신은 너무 여자를 좋아해서 많은 염문을 뿌렸기에 현재 이 신의 이름은 호색(好色)'이라는 형용사의 근간이 되었다.




이런 연유로 이 신에 대한 이미지는 그리 건전한 것이 될 수 없었으나, 이태리에도 이 시기에 르네상스의 바람이 불면서 인간적인 것에 대한 극도의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던 시기였기에 기원 전 2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희랍 조각가가 만든 이 작품은 로마 문화권에서 새로운 동경의 대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나게 된 배경은 도시 국가를 통한 정치 경제적 안정과 이에 자연스럽게 따른 지적 팽창과 변화된 환경에서 오게 된 시민 의식의 성장에 있었다.




성 아우구스티노에서 시작된 하느님 중심의 사고방식에 염증을 느낀 중세인들은 인간 중심으로 찬란한 문화를 이루었던 희랍 문화에 반사적인 동경을 하게 되었고, 교황 역시 희랍 문화에 심취하면서 어떤 때 지나치게 세속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행동을 하면서도 르네상스 문화에 동조 정도가 아니라 이 문화를 펼치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에 들어와 혹독한 박해를 겪고 종교의 자유의 얻으면서 교회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큰 착오에 빠지게 되었다.




학문적인 바탕이 빈약했던 초대 교회에서 당시 로마 제국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플라톤 신학의 관점에서 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 성서적 관점과 다른 것이 정착되어 육체를 위험시하고 경시하는 사상이 교회 안에 퍼지게 되었다.




설상 가상으로 교회 안에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독신생활을 함으로서 결혼이나 성에 대한 가치는 상대적으로 폄하되었고, 원죄 교리는 성을 어떤 차원으로든지 위험한 금기의 영역으로 몰아넣었다.




교회의 성윤리가 성서가 제시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은 바로 여기서 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하느님에 대한 강조가 인간적인 모든 것을 부정시하고 억압하던 사고방식에서 자연스럽게 반발하게 만들었으며 이 여파로 육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희랍 조각에 대해 광적인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대부분의 희랍조각이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이 작품은 또 다른 특징이 있었다.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과 함께 관능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킴으로서 육체적인 표현을 거의 피하던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는 충격적인 것이 될 수도 있었으나, 르네상스 문화에 대단한 호의를 보이던 당시 사회는 과거에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이런 과감한 성적인 표현도 인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인간 삶의 새로운 면모를 제시하는 것으로 폭넓게 받아들여 호의적인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당시 교황 우르바노 8세는 로마의 명망 있는 가문인 바르베리니(Barberini) 가문 출신이었는데, 이 작품에 대단한 관심을 보인 교황은 이것을 자기 소유로 인정할 만큼 이 작품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호색적인 동물성의 표현인 관능의 상징으로 표현되던 사티로스가 이 작품에 와선 인간성에 중점을 두고 표현되면서 비록 다분히 성적인 암시를 주면서도 인간 관능성의 의미를 더 심도 있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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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발달된 늠름한 가슴을 드러낸 사내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눈을 감은 자세로 그가 벌리고 있는 다리 사이에 노출된 성기는 관객들에게 관음증적인 시각으로 이것을 바라 보고픈 충동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




과거 사티로스에서 강하게 표현되던 동물성은 크게 축소되면서, 관람자에게 그가 부러울만큼 아름다운 육체를 지닌 인간임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티로스에게 볼 수 있는 마시고 춤추며 욕망을 한껏 발산한 후의 충족된 모습이 아닌 인간적 여운을 남기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몸 전체와 얼굴에는 관능에 탐닉하며 몰두했던 흔적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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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등 아래 깔고 있는 표범 가죽은 그가 비록 세련된 인간으로 보이지만 동물성을 품고 있는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지금 꿈같이 달콤한 긴 욕망의 시간을 보낸 후 안락한 충족감에 빠져있다. 그의 가슴을 드러낸 몸이나 성기조차 가리지 않고 편한 자세로 누워있는 그의 모습은 모든 인간들의 바램인 욕망의 충족 상태가 더 없이 완벽했다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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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은 그리 밝지만 않다. 대단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갖은 노력을 다해 욕망을 충족시킨 인간의 안락과 만족의 모습이 아니라 허탈과 후회가 어우러진 미묘한 표정이다. 보통 욕망을 충족시켰다는 성취감과는 거리가 먼 욕망의 충족이 곧 행복이 아니라는 감성적 표정을 짓고 있다.




그가 무슨 이유로던 욕망을 따른다는 것은 그 자체가 멸망과 실패로 이어지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윤리성의 신봉자였는지, 아니면 이 욕망의 추종 과정에서 어떤 후회스러운 일이나 실망스러운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면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후회와 실망을 표현하고 있다. 결과론적으로 이 사나이는 욕망의 충족이 곧 만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욕망에 대해 부정적인 가르침으로 일관하면서 욕망의 억압이 곧 성덕인양 표현하기도 했으며, 교회 안에 수도생활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정결에 대한 가르침이 편협하고 왜곡되어 욕망에 대한 모든 표현은 죄의 근원이며 영적 죽음의 단계로 여겨지게 되었다.




독신생활에서는 욕망의 승화만이 하느님이 주신 육체성을 바로 사용하는 유일한 길이란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 이 육체성을 바로 사용하기 위해선 역사에서 많은 금기 사항을 남겼는데, 가장 힘있고 무서운 것이 바로 미래의 벌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오늘 전통적으로 성을 죄와 연결되던 차원으로 다루었던 윤리는 퇴색되었으나, 아직 교회안의 신자생활에는 그대로 통용되는 현실에서 성서에 바탕을 둔 성을 단순히 종족 번식의 수단만이 아님을 알리고 있다.




성은 사랑의 중요 표현 수단이라는 성서에 바탕을 둔 성에 대한 태도를 알리고 있는데 이것은 학문적인 차원에선 인정되고 있으나, 실재 신자생활에서는 아직 수면 아래서 동면상태에 있는 것 같은 현실에서 하느님의 선물로서의 밝은 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



묵시록의 저자는 대 바빌론 제국이 어이없이 멸망한 것이 바로 음란죄와 연관되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너졌다! 대 바빌론이 무너졌다! 바빌론은 악마들의 거처가 되고 더러운 악령들의 소유가 되었으며 더럽고 미움 받는 온갖 새들의 집이 되었다. 모든 백성이 그 여자의 음행으로 말미암은 분노의 포도주를 마셨고 세상의 왕들이 그 여자와 놀아났으며 세상의 상인들이 그 여자의 사치 바람에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그 여자와 함께 음란한 일을 하고 방탕한 생활을 한 세상의 왕들은 그 여자를 태우는 불의 연기를 보고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입니다.”(묵시 18: 2-3 :10)




육체를 욕망의 도구로 만들면 지옥불은 면키 어렵다는 금기의 일방적인 강조는 육체적인 것이 죄로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리면서 다음과 같은 성서 말씀이 대단한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다.




 “제게서 욕망을 멀리하여 주소서.”(코헬 23, 5)





오늘 교회 성윤리에서 확인되는 성은 오로지 자녀 출산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것에서 일보 후퇴해서 사랑의 길로 가는 데에 성생활의 합당한 역할을 긍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실재에 있어 교회의 분위기는 성은 곧 죄와 지옥과 멸망과 직결되는 위험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작품을 만든 이는 그리스도 이전이기에 성서의 어떤 가르침과도 무관한 사람이었으니, 당시 희랍인들의 사고에 큰 영향을 주었던 에피큐루스(Epicurus :주전 341-270)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에피큐로스의 도덕은 쾌락주의(hédonisme,그리스어로 hedone)는 쾌락(plaisir)를 뜻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 것은 이 학자의 쾌락주의는 통념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에피큐로스의 쾌락은 향락과 무절제(과도함)에 대한 변명으로 일관되고 있지 않다. 그가 제시한 이상적인 쾌락은 통념적인 의미의 쾌락과 전혀 다른 것이다. 그는 멋지고 가치있는 덕으로서의 쾌락은 삶을 절제 있고 사색적으로 살았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한 마디로 절제가 바로 행복으로 이어지는 쾌락의 중요 조건임을 알리고 있다. 이 작가의 쾌락에 대한 태도는 교회의 태도와는 다른 관점이면서 교훈을 주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신은 마음껏 마시고 춤추고 즐기면서 관능을 최고도로 즐겼으나, 그에게 남은 것은 크리스챤적인 죄책감이 아니라 삶의 허탈감과 허망감이다. 즉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이런 신의 삶을 따라 살면 인생이 행복할 수 없다는 실재적인 경고를 주고 있다.




미래 세계를 믿지 않던 희랍인들에게 있어 크리스챤들과 달리 내세와 미래의 차원에서 행복이나 불행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의 행복이 유일한 가치 있는 것인데, 이 작품의 신은 쾌락에 대한 무절제한 몰두는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다.




크리스챤인 우리들은 욕망을 절제하지 않으면 미래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강박감 하나로 이 세상 삶을 산다는 것은 오늘날 큰 설득력이 없다. 이제 크리스챤들은 성서가 제시하는 성의 밝은 면에 눈떠야 하는데, 이 작품은 크리스챤들이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해 익혀야 할 새로운 면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쾌락에 마음껏 몰두하는 것이 현재 인생의 최고의 기쁨이며 가치라는 것에서는 벗어났을 때 크리스챤 삶이 현실에서부터 멋진 삶이 될 수 있다.




쾌락의 충족과 인간다움이 비례되는 것 같은 암시를 받고 있는 현대에서 이 작품은 성의 억압 상태에서 미숙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관음병적인 차원이 아니라  크리스챤들이 지녀야 할 사려 깊은 절제적 삶의 태도를 설득력 있게 알리는 좋은 묵상 재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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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페이지 step 2018.09.16 21:27:58
    지포텍 이라고 찾아 보니 찾을수 없어서요, , 참고로~~
    https://blog.naver.com/chanwoolee/221355856982
    글립토테크 미술관 (Glyptotek)
    ​글립토테크란 조각관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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