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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 백합꽃을 파는 여인 (El Vendedor de Alcatraces) : 디에고 리베라

by 이종한요한 posted Jul 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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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칼라 백합꽃을 파는 여인 (El Vendedor de Alcatraces)

작  가 : 디에고 리베라 (Diego Ribera)

크  기 : 캠퍼스 유채 : 121.92cm x 121.29cm 

소재지 : 미국 샌 프란치스코 미술관 


스페인과 유럽에 피카소가 있다면 멕시코와 중남미에는 디에고 리베라가 있다고 할 정도로 멕시코 인들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있는 거물급 화가이다.


그는 진보적인 성향의 글을 연재하는 잡지의 책임을 맡고 있는 아버지를 둔 덕분에 어릴 때부터 작가로서의 자유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아버지는 아들의 예술가적 취향을 발견하고 작가가 마음껏 작품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벽면 전체를  사용할 수 있는 그림 연습장을 마련해줄 만큼 적극적이었기에 아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신의 기량을 키울 수 있었다.


이런 아버지의 도움으로 예술의 도시 파리로 가서 당시 유행하던 신 인상파부터 큐비즘에 심취하면서 피카소나 모딜리아니 같은 작가들과도 교류하면서 예술에 대한 폭과 함께 깊이를 키울 수 있었다.


그는 예술가임과 동시 사상가적인 성향이 강했기에 1917년 러시아 공산 혁명을 보면서 “예술은 세상과 소통해야 하고 더 나은 사회 건설에 원동력으로 작용해야 한다.” 는 강한 신념을 굳혔기에 멕시코의 민중 미술에 대한 관점을 확립했다.


사람들의 삶을 실상을 그리면서 민중들의 애환에 동참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은 심미안을 키우는 차원의 예술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부정이나 모순을 극복하고 뭣보다 모든 사람이 차별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식 전환의 효과적 수단으로 예술을 이용했다.


특히 억압받는 노동자 농민의 삶에 대한 대단한 애정을 지니고, 이들을 압박하는 기득권자들과 권력자들의 횡포를 고발하며 그들 삶의 허구와 저질성을 폭로하는데 많은 열정을 쏟으므로 건강한 사회 건설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10년 30년 독재로 국민 대다수를 절대 빈곤 상태로 빠트린 독재자를 타도하고자 하는 민중 운동이 있어났으며, 다행히 변호사이며 자유 주의자였던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30년 독재를 무너뜨리며 멕시코 혁명의 씨앗을 뿌렸는데, 작가는 이 혁명의 진행을 보면서 큰 감명을 받았다.


작가의 예술적 기량은 바로 새로운 사회 모든 사람이 평등한 상태에서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성향을 띠기 시작하면서 그의 작품은 바로 이런 이상을 현실화 시키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특히 작품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박해받는 노동자, 농민의 삶이었다. 예리한 사회의식과 예술 감각을 지닌 그는 예술을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개혁의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작품의 주제가 일상 삶의 현실에서 발굴해서 보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기회를 부여했다.


기후와 자연환경이 좋은 멕시코는 어느 나라 못지않게 풍요로운 꽃 문화가 있으며 이런 성향에 의해 자연스럽게 꽃가게나 꽃행상이 많았다.


꽃장수는 얼핏 생각할 때 어떤 상인 보다는 우아하고 행복한 직업인 것 같이 생각하지 쉬우나 사실 그렇지 않았다. 생물이라 시들기 쉽고, 또 외양을 살피는 데 고객들의 기호가 예민하게 작용하는 것이기에 꽃장수로서는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꽃이 아름다운 것만큼 그것을 판매하는 사람에게는 더 부담이 오는 것이다.


작가는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그의 준수한 이상과 예민한 감각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인류를 비참하게 만드는 가난의 이유 분석에 관심을 가지면서 멕시코의 현실에서 원인을 찾게 된다.


멕시코는 독재자를 지도자로 뽑고 그 주위에 부유한 사람이나 권력자들을 벨트로 만들어 소수의 사람들이 부를 지키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은 버려진 존재만이 아니라 착취의 대상이 됨으로 생긴 비참한 가난의 원인을 알았을 때 작가는 분연히 일어서게 되었다.


작가도 가톨릭 국가인 멕시코 출신이고, 어릴 때 주요 관심의 지역은 성당이었으나 멕시코의 혁명으로 드러난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이 주역으로 움직이는 나라의 현실과 교회는 소수의 의식 있는 성직자들을 제외하고 많은 고위나 하급 성직자들을 막론하고 교회의 실리에 도움이 된다는 차원에서 가진 자들의 편에 서는 것이 상례였고 이것은 러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공산 혁명에서 교회 성직자들도 중요한 숙청 대상이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면을 잘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는 교회를 떠나 아예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가 되면서 교회의 존재성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의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바로 꽃장수처럼 겉으로 보기와 내면이 너무 다른 가난한 사람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이해하고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작가의 사명감으로 했다.


그는 여러 장의 꽃장수를 그렸다. 분홍빛 화사한 꽃을 지게에 기고 있는 남자 꽃장수와 이 작품 외에도 꽃장수와 관계되는 여러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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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화사하고 깨끗하게 보이는 칸나 백합이 관객의 눈을 유혹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갈망하는 모든 이상적인 것을 다 품고 있는 것 같은 아름다운 색깔의 꽃이 우리를 자극하면서 극단의 행복과 평화를 느끼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잠시 눈을 아래로 돌려 보면 좀 황당한 감정에 빠지게 된다. 꽃을 담은 거대한 큰 바구니를 한 여인이 지고 있다. 이 무게나 볼륨이 주는 부담이 얼마나 힘든지는 이 여인이 꽃을 묶는 바구니의 끈을 자기의 머리 부분에 묶어 입술로 그것을 고정시키고자 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이 꽃을 상하지 않게 하기위해선 자기 몸 전체를 혹사해도 괜찮다는 모습이며 단말마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모습이다. 꽃의 화사한 이미지와 전혀 다른 비참한 인간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여인은 바로 이렇게 힘들게 꽃을 운반해서 제 값을 받고 잘 팔면 그 이상 바램이 없다는 그런 희망 하나로 이 고통을 견디고 있다.


이 여인이 꽃을 다 팔지 못하면 생계를 위협하는 고통이 닥치게 되고, 이것은 일회성으로 끝날 수 있는 게 아니라 매일의 꽃이 피고시들 듯 매일 계속해야 하는 고된 직업이기에 작가는 바로 이 부분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처지가 얼마나 절박한지를 알리고자 한다.


꽃은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이들이 다 좋아하는 것이기에 이 작품은 꽃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구체적으로 꽃의 아름다움을 더 가까이 즐기고자 하는 꽃 애호가들에게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으로 끝나는 꽃에 대한 이미지가 아니라,  인간 삶의 질을 비참하게 만들고 불평등 사회를 만드는 부정적 의미의 가난의 문제에 눈뜨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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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사생결단의 긴장으로 꽃바구니를 지고 있는 여인의 뒤에 한 남자를 배치했다. 여인의 앞쪽에는 그 남자의 것으로 여겨지는 튼실한 발이 양쪽에 있다. 역시 아름다운 꽃 중간에 보이는 대머리 남자의 발로서 추측되며 이 여인의 힘겨운 처지를 도와주고 있는 고마운 존재의 인상을 받게 만든다.


이 남자의 존재는 여인이 혼자 있다면 꽃 무게를 감당치 못하고 넘어져서 꽃을 상하게 만들면서 장사를 망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으나, 이 남자의 존재로 안정감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


작가는 이 남자를 바로 가난한 자들에게 대한 순수한 애정을 지니고 이 세상에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기의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런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구체적 애정을 마치 힘겨운 꽃바구니를 지고 있는 여인의 뒤에서 도우는 남성처럼 행동으로 표현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화려한 꽃묶음을 힘겹게 지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예술적 정서의 전달 보다 정치적 의도의 목적성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작가의 사회주의자적인 정서의 강력한 표현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혼신의 다하는 노력을 하고 있는 이런 무산층 계급의 존재성을 이해하면서 이들에게 현실적인 관심을 주는 것이 바로 인류의 중요한 사명이라는 것을 전하고 있다.


이 여인이 지고 있는 꽃이 화병에 몇 송이 꽂혀 있다면 더 없이 아름다울 이 꽃이 이 여인을 힘겹게 하는 짐으로 표현되면서 착잡한 감회를 느끼게 된다. 아름다운 꽃 그림이지만 식당이나 휴게실에 걸어두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상쾌함보다 불편한 감회에 빠트릴 수 있는 그런 작품이다.


자기의 몸집보다 더 큰 꽃 덩이는 아름다움의 상징이 아니라 고통과 힘겨움의 상징이 되고 있음을 작가는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작가는 또한 무거운 꽃 덩어리에 힘겨운 이 여인과 같은 사회적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노동자의 삶이 기여하고 있는 사회적인 밝은 면을 깨우치고 있다.


모든 이를 기쁘게 하는 꽃을 선사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사회적으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불만과 열등감에서 순수한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자기 품위에 대한 이해를 깨우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작가는 신앙을 떠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입장에서 작가 생활을 했으나, 그가 전하고자하는 메시지는 크리스챤적인 복음 정신과 너무나 일치하고 있다.


복음이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라면 작가는 세상의 현실에서부터 복음으로 올라가는 방법을 취하고 있으며 지난 공의회는 이런 사람들을 “익명의 크리스챤”이라고 분류하고 있다.


예수회 출신의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신부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에 있어 산파 역할을 한 신학자이신데, 요한 23세 교황과 마찬가지로 공산 주의자와도 함께 나눌 것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약한 이와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불쌍한 이와 가련한 이에게 정의를 베풀어라.”(시편 82:3)


예언자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께 이르기까지 성서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마태오 복음 25장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 심판 때에 우리가 헴 바칠 유일한 기준이 세상에서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 모습 안에 있는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처럼 대하는 것이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 네가 나그네 되었을 때 따뜻이 맞아 들였다.”(마태 25:35)


예수의 가르침 중에 이처럼 이웃 사랑의 실천을 구체적으로 강조한 것이 없는데, 이 작품은 바로 공산주의 시각에서 인간다움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 크리스챤들이 반성해야 할 중요한 것은 무슨 교리 내용을 깊이 믿지 않았다거나 가변적인 법을 소홀히 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인 인간 사랑의 표현에 있어 크리스챤이 아닌 사람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작가가 크리스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면서도, 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는 누구 못지않게 열정을 가지고 실천했다는 점은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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