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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와 그의글4

by 김상욱요셉 posted Sep 0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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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클라라회의 창립: 1202년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이 함께 살며 설교하는 모습을 보았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의 삶의 모습을 보고 프란치스코를 비밀리 만나면서 프란치스코처럼 복음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다. 아시시 주교 귀도의 승인을 받아, 클라라는 성지주일에 집을 몰래 빠져 나왔다. 포르치운쿨라에서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에 의해 머리카락을 자르고 복음을 따른 생활을 시작하였다. 클라라는 처음 바스티아의 성 바오로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지내다가 판소의 성 안젤로 베네딕도 수녀원을 거쳐 마침내 성 다미아노 성당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수녀원들을 토지를 소유하며 그 도지로 살아갔었다. 이러한 삶의 모습과 프란치스칸 삶의 형태를 보면서 클라라는 '가난'을 주님께로 나아가는 길로 선택하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교황으로부터 가난특전을 받았다. 특전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데, 클라라의 가난특전을 무엇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방어막이었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의 영적인 도움을 받았을 뿐 아니라, 프란치스코 또한 클라라와 자매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형제들이 가난의 삶에서 멀어져 갔을 때에도 클라라와 자매들은 이것에 충실하여 프란치스코가 희망을 잃지 않게 했으며, 프란치스코는 클라라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영성을 심화시키기도 하였다.

5) 돗자리 총회

형제회 수가 작았을 때, 형제들은 둘씩 짝지어 복음을 선포하다 자연스레 다시 모이곤 하였다. 그런데 형제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이렇게 모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은 성령강림대축일에 돗자리 총회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1212년 성령강림 축일에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쿨라에서 첫 총회를 소집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2명의 첫 제자들과 재회하였으며, 최근에 입회한 형제들도 만날 수 있었다. 총회는 형제적 친교의 장이었고, 형제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경험한 것을 나누며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알아차리고 찬미하는 시간이었고,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고 결정하기도 하였다.

1217년 총회는 매우 중요한 모임이었다. 형제들의 수적 증가로 인해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서 관구라 불리는 단위들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각각의 관구에는 그 조직을 이끌 책임자들이 임명되었는데 그 형제들을 봉사자 형제들이라 불렀다.

1219년 총회에서는 비신자(이슬람) 국가들에 설교하러 몇 명의 형제들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의 오랜 염원이었으므로 프란치스코는 이를 제안하고 적극 지지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무기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란치스코는 이 결정이 있은 후, 그를 대신하는 두 명의 대리자에게 이탈리아를 위임한 후, 이집트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총회와 프란치스코의 권고: 총회에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영적인 이야기들을 하곤 하였다. 이러한 영적인 가르침은 프란치스코의 권고로 발전하게 되었다.

6) 프란치스코와 술탄의 만남(동방여행)

프란치스코는 이전 두 차례 이슬람지역으로 선교를 떠났는데, 풍랑과 병으로 인해 도중에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1219년 세 번째 시도에서 프란치스코는 십자군이 있는 이집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십자군 주둔지에 머물며 프란치스코는 주교에게 자신의 원의를 알렸지만 주교는 공식적으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는 전투가 일어나지 않을 때 일루미나토 형제와 함께 사라센 진영으로 넘어간다. 곧 그들은 사라센 군인에게 붙잡혔고, 적지 않은 고통을 겪었다. 프란치스코는 거듭거듭 술탄의 이름을 외쳤고, 술탄의 수하들은 그를 술탄에게 데리고 갔다. 카멜 술탄은 종교적인 사람이었고, 수도승들을 친절하게 대하곤 하였다. 술탄은 무방비 상태이지만 확고한 신념으로 자기에게 말하는 프란치스코를 높이 평가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술탄을 개종시키지 못했지만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다. 술탄은 다른 값비싼 선물들을 주었지만 프란치스코는 팔레스타인 성지를 방문할 수 있는 통행증만을 받고 그리스도인 진지로 돌아왔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동방의 여러 곳을 순례하였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시리아 지역에 파견된 형제들과 만나는 시간도 가졌다. 그런데 이 힘든 여행과 사막의 뜨거운 태양 때문에 프란치스코는 나중에 눈병에 걸리고 다른 지병들이 악화되었다.

=> 프란치스코 글에 나타난 동방순례의 영향: 프란치스코는 이슬람교도들이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이런 습관이 그리스도교 문화에도 정착되기를 열망하며 그는 이렇게 권고하였다. "매일 저녁 온 백성에게 전달자나 다른 신호로 통보하여 그들이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게 하십시오." (백성의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술탄과의 만남에서 하느님의 평화를 맛보고 경험하였다. 그는 이후 이슬람지역으로 가는 형제들에게 말한다. "사라센인들에게 가는 형제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영적으로 지낼 수 있습니다. 한가지 방법은 말다툼이나 싸움을 하지 않고 하느님 때문에 모든 인간들에게 복종하고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다른 방법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 그들이 전능하시고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고 구세주요 구원자이신 아드님을 믿도록, 또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인준받지 않은 회칙 16장)

프란치스코는 또한 이슬람교도들이 그들의 하느님을 다양하게 부르며 기도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프란치스코는 라베르나 체험을 하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를 쓰는데 여기서 프란치스코는 그가 만난 하느님을 다양하게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한다.

7) 수도규칙을 작성하는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가 동방 순례를 하고 있을 때, 이탈리아에서 스테파노라 불리는 형제가 프란치스코를 찾아왔다. 대리자들이 형제회를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의 초기 이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하였다. 대리자들은 정주 수도회의 규범을 따르는 규칙들을 만들었다. 프란치스코는 급히 이탈리아로 돌아와 이례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교황을 만나 형제회를 위한 보호자 추기경을(우골리노) 요청하였고, 여러 잘못된 결정들을 바로 잡았다. 프란치스코가 포르치운쿨라에 도착했을 때, 예전의 움막들이 없어졌고 편안한 수도원이 지어지고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내려하였다. 아시시 주민들이 그 집은 자신들의 소유물이고 형제들에게 단지 빌려주었다고 하자, 프란치스코는 지붕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총봉사자 역할을 베드로 카타니 형제에게 맡기고 자신은 형제회의 영적 봉사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프란치스코가 돌아와서 어느정도 사태를 수습하였지만 형제회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움직임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관구봉사자들과 그들을 수행하는 유식한 형제들은 조직의 안전성 부재에 대해 많은 불만을 제기하였다. 그들은 삼천 명 이상인 형제회를 위한 엄격하고 구체적인 규범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창설자의 카리스마적인 현존이 없을 때를 준비하고자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또한 프란치스칸 이상들을 지키기 위해 수도규칙을 작성하기로 결심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초기 형제들을 인도했던 복음서로부터 시작하여 지난 10년 동안 형제들이 결정한 다양한 결정들을 복음에 비추어 성문화하였다. 프란치스코는 복음 말씀, 생활양식, 권고들을 엮어서 수도규칙을 만들었고 1221년 총회에 제안하였다. 봉사자들과 유식한 형제들은 이 수도규칙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규칙은 지나치게 모호하고 영성적인 반면 법률적 측면은 부족하였다. 그래서 이 규칙은 형제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프란치스코는 다시 수도규칙을 쓰는 작업을 하였다. 법학을 공부한 보니죠 형제의 도움을 받아 프란치스코는 보다 간결하고 명료한 수도규칙을 작성하였다. 이 수도규칙은 로마 교황청에 제출되고 인준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프란치스코에게 많은 고통이었다. 자신이 형제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자기와 초기 형제들의 복음적 이상을 형제들이 소중하게 여기지 않음이 더 힘겨웠다. 이러한 고통 중에서 프란치스코는 기도하며 복음적 삶을 계속 살았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에서 설교여행도 하였고, 몸상태가 허락하지 않을 경우 프란치스코는 편지나 다른 글들을 쓰며 형제들과 다른 이들이 복음적 삶에 충실하도록 이끌었다.

=> 프란치스코의 참되고 완전한 기쁨: 이 글은 프란치스코가 자신이 겪는 고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겪는 고통 가운데에서 기도하며 복음의 정신이 일깨우는 깨달음을 얻었고 이를 극적인 글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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