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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담을 수 없는 몸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의 몸과 같습니다.

by 이마르첼리노M posted Dec 1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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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담을 수 없는 몸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의 몸과 같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육화의 신비는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예수는 인간의 몸이며 인간의 몸에 태초부터 계셨던 그리스도께서 몸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고백입니다. 이 육화의 신비는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결합한 창조의 실재를 경험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여 마음에 간직하고(잉태) 간직된 말씀이 관계 안에서 반사된 선으로 드러날 때(출산) 이 신비를 깨닫게 되고 이러한 깨달음이 관계의 질을 높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은 말씀이 사랑으로 태어난 결합 된 창조의 실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탄은 예수께서 우리의 관계 안에 태어나신 신비입니다. 관계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의 영께서 서로를 받아들여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 충만해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충만 안에서 기쁨이 솟아납니다. 내어주는 기쁨과 받아들이는 기쁨이 서로의 가슴에 충만한 기쁨으로 경험되는 순간들이 성탄의 신비입니다. 협력과 참여로 하느님의 선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태 1,20) 우리에게 있어서 마음에 간직된 말씀은 성령으로 잉태된 말씀이며 관계 안에 선이 흐르게 함으로써 그분을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내면에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을 받아들일 공간을 만드는 이들이 경험하는 신비입니다. 말 구유에 태어나신 분은 허름한 처소인 우리들의 관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는 이들은 말구유를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놓아도 기쁨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성을 외면하고 개인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다가 자기를 우상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백인대장은 종이 겪고 있는 고통과 똑같은 고통을 느꼈기에 어떻게 해서라도 종을 낫게 해주고 싶어 예수님께 요청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마태 8,8) 예수님께 보인 그의 태도는 그의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종을 고쳐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연대한다는 것은 내면의 공간을 넓히는 일입니다. 내면의 공간을 영이 현존하는 공간으로 만들면 어떻게 해서라도 나를 내어주어 너의 필요를 돌보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응답하는 신앙의 기초를 이룹니다.

 

말씀을 담을 수 없는 몸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의 몸과 같습니다. 마음 안에 말씀이 자리할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담을 수 없는 이유는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며, 나만을 챙겨보겠다는 자기중심적이고 탐욕적인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사용하다 보니 말씀을 받아들일 여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나의 나라, 내 왕국, 내가 지배하는 나라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면의 공간을 만드는 가난이 주는 위대한 힘입니다. 그러므로 가난은 내려가는 선이며 내려놓는 자비입니다. 내려가고 내려놓는 죽음을 통하여 얻는 내면의 공간 안에서 하느님과 너를 받아들여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기쁨을 공유하는 하느님 나라의 실재가 거기에 있습니다.

 

 

 

관계의 회복이 성탄의 신비입니다. 탐욕과 자기중심적 틀에 묶여서 단절되었던 내면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탄생이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하느님과 연결되고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어주시는 사랑에 눈이 열린 이들에게는 용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내어주는 사랑보다 받은 사랑이 클 때 내려가고 내려놓는 일은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선의 흐름을 가로막는 자존심과 체면이라는 거대한 암벽들은 하느님의 위대한 무상성과 보편적 사랑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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