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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무상성(빚의 탕감)

by 이마르첼리노M posted Mar 1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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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무상성(빚의 탕감)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 18,22)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마태 18,24)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마태 18,27)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마태 18,32-33)

 

선을 어둡게 하는 헛된 환상 속에서 저지른 단절로 허물어진 우리의 관계는 내면에 심각한 외로움과 아무도 대신 할 수 없는 실존적 공허를 남겨 놓았다. 용서는 탕감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자비다. 자신의 힘으로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만심은 다른 사람 위에 자신을 올려놓음으로써 관계의 균형을 깬다. 균형이 깨지면 용서하기가 불가능하다. 용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일이 아니라 동등하거나 아래에 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용서가 어려운 것은, 탕감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무상으로 받은 선물이기에 경험된 지식으로 남아있지 않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는 대가를 치르고 받은 게 아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바리사이적인 생각들이 용서를 어렵게 한다. 용서는 업적과 공로에 따른 보상이 아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자신의 업적과 공로와 맞바꿀 수는 없다. 그건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과 상거래를 하자는 것이다.

 

용서는 일상적인 잘잘못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존재론적 기반을 둔 경험된 지식에서 나온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은 우리는 세례를 통해 연결의 기초를 놓았으며 이를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존재의 시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었던 모든 죄의 용서를 받았으며, 나만 좋으면 된다는 악습과 나만 챙기겠다는 생각과 행동으로 야기된 단절의 죄 또한 교회의 성사를 통하여 용서받고 있다. 여기에는 관계의 대면이 있다. 너와 나의 대면과 사제와 나의 대면이 있다. 대면이 없는 용서는 빚문서를 없애지 못한다. 대면을 미루는 것은 빚문서를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다. 탕감은 언제나 대면으로 이루어진다. 존재적으로 용서받은 경험은 아버지의 자비가 우리가 저지른 허다한 죄와 허물의 빚 문서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아 완전히 없애버리셨다는 결과에서 나온다. 용서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당신 몸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는 믿음이 시작되는 데서부터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존재들이 되었다. 완전한 용서를 받은 존재가 된 것이다. 우리가 객관화된 지식만 있고 경험된 지식이 없는 것은 존재론적 성찰보다 눈앞에 놓여있는 죄만 바라보고 선물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단절된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복하게 하셨다.” (로마 5,12-21)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한 번의 범죄 뒤에 이루어진 심판은 유죄 판결을 가져왔지만, 많은 범죄 뒤에 이루어진 은사는 무죄 선언을 가져왔습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로마 5,15-17)

 

자비를 입은 사람이 자비를 행한다. 용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한 자들이 자신에게 잘못한 이에게 자비를 경험하도록 돕는 사랑이다.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사랑이다. 자비를 경험해보지 않은 이들은 용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만약 그들이 용서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기도와 희생과 제물과 재능의 봉헌을 용서와 바꿀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느님과 상거래를 하려는 듯이 그렇게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느님께 미루고 많이 바치고 잘 지키면 하느님께서 그들의 부탁을 들어 주실 것처럼 산다.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줘요, 다신 안그럴께요, 이런 말들은 우리가 대면해서 해야 할 말이지 하느님이 하실 말인가? 그러나 하느님에게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달라고 하면서 자신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바치는 데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용서는 자신의 변화부터 시작된다. 내려가는 변화와 내려놓는 변화와 허용하고 놓아주는 내면의 변화로부터 관계의 변화로 나아가는 점진적 변화의 길이다. 빚을 탕감받은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많이 받으면 많은 것을 내어놓고 싶어진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은 응답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인과응보의 덫에 걸려 하느님과 사람과 모든 피조물을 이용의 대상으로만 보게 된다. 인과응보의 잣대와 저울로 판단하고 평가하고 심판하면서 자신을 끝없이 높이는 것이다. 스스로 높이고 과장하고 포장하고 의롭고 거룩하다고 여기는 자아도취에 빠지는 것이다. 잘 지키면 잘 지킬수록, 많이 바치면 많이 바칠수록 더 거룩하고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잘못한 이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복수와 앙갚음의 칼을 갈고 있으면서 기회만을 살피는 것이 아닌가? 성서에 나타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거룩함과 의로움의 감옥에 갇혀 분별력을 잃어버렸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잘못을 저질렀고,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었으나, 이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주시고 우리의 잘못을 모두 용서해 주셨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달갑지 않은 조항이 들어 있는 우리의 빚문서를 무효화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버리셨습니다.

(골로2,12-14)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마태 18,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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