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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의 진실

by 이마르첼리노M posted Sep 2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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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의 진실

 

나는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반사해 줄 깨끗하게 닦인 내면의 거울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왜냐하면 그 거울이 내 삶의 중심이며, 하느님이라는 거울에 비춰서 얻은 앎으로 나를 통하여 반사되는 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받아들임이 없이 반사된 선은 없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처럼 연결이 없으면 하느님을 증명하거나 선을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영의 활동을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영의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의 모범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분의 관심사와 관계 맺은 방식, 곧 측은한 마음으로 돌보시는 하느님을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와 피조물을 통해 반사된 선을 바라봄으로써 영감을 받아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나를 통해 반사되도록 도구적 존재로 인식하는 앎이 중요하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방식은 피조물과 너와의 관계적 대면을 통해서 일하시며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거울에 비춰봄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육화의 도구로서의 선은 항상 그렇게 관계 속에서 전달되었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법(야고보 1,25) 해방해주는 사랑과 받아들임으로 우리를 반사해 주기 때문이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허용하고 놓아주는 자유로 상대방을 해방한다. 묶여 있거나 붙잡혀 있거나 단절되어 있으면 너를 자유롭게 할 수 없다. 거룩함에 대한 앎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과정에서 참여로써 경험된 지식이 아니라 남들로부터 전해 들은 객관화된 지식에 따른 앎으로 대체 되다 보니 하느님은 하늘에만 계시게 되었다. 내 삶에 필요한 복을 받기 위한 이용대상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예배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잘 지키고 많이 바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복을 주실 것이리라는 막연한 믿음만이 남게 되었으며, 하느님을 매우 인색한 심판관으로 만들어 많이 바치면 많이 주고 조금 바치면 주금 주며, 안 바치면 아무것도 주지 않으시는 분으로 만들었다. 인간의 희생을 즐기시는 하느님, 절대 군주 같은 하느님으로부터 처벌을 면하고 보상을 받으려면 그에 합당한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강박과 불안이 늘 마음속에서 다급하게 재촉한다고 느낀다. 그러다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빠지면 희생이 모자란다고 느끼면서 더욱 많은 기도와 희생과 재물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의무감에 따라 숙제처럼 기도하거나 어떤 기도를 하면 무슨 은사를 받는다는 식으로 기도가 거래의 수단처럼 되어버렸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나로부터 출발했기에 종교심을 믿음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우리의 관계 안에서 생명의 물줄기를 대주고 선을 선택하도록 깨달음과 지혜와 용기를 주시며,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이 우주 안에 모든 피조물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반영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잊어버렸다.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자비다.”라고 말씀하시는 말씀을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처럼 객관화된 지식을 갖고 하느님을 알려고 했으나 이러한 지식은 우리가 직접 참여해서 얻은 지식이 아니기에 스마트 폰에 떠다니는 지식이 되고 말았다. 율법과 도덕적 성취를 가장 우선시했던 율법 교사와 바리사이의 종교적 행위처럼 외적으로 드러나는 기도의 숫자와 재물과 재능봉사와 희생을 셈하면서 그것이 거룩한 일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기도와 희생들이 겸손하게 낮추고 내려가서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거나 자유를 주기 위해 허용하고 놓아주는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는 관계로 만들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육화의 겸손과 수난의 사랑을 배우고 닮으려는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관계 안으로 흘러가도록 기쁨을 발생시키는 자유를 주는 법을 행하는 것이 거룩함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함은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선이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온 선이 관계 안에서 흘러가게 하는 것이야말로 거룩함이며 의로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이를 막거나 단절시키는 것이 악이며 죄이다. 이기적인 탐욕과 지배를 위한 가치체계로 무장한 사람들은 눈앞의 이익과 즐거움과 편안함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모든 관계를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손익 계산서를 손에 쥐고 있다.

 

거룩함의 진실과 마주하는 일상의 삶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응답하는 삶이다. 응답으로 하는 기도는 단절된 관계의 변화와 회복을 돕는 희생과 재능과 재물의 봉헌, 용서를 위한 결단과 용기 있는 대면에서 구체화 된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의 응답으로 하는 것이지 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응답으로 하는 기도는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이 나를 도구 삼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며 일용할 양식으로 상징되는 각 개인의 모든 필요성이 하느님의 무상성 안에서 인류의 보편적 구원에 이바지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관점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이 보편적 구원에 우리는 선으로 참여한다. 그러므로 관계 안에서 실천하려는 행동하는 자비야말로 거룩함의 진실이다. 덕은 남이 성장하도록 돕는 예술이며, 내어주는 몸과 쏟아 내는 피는 우리의 일상의 관계들이다. 관계의 현장에서 우리가 거룩하고 의롭게 되는 일은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나를 통하여 너와 피조물의 관계 안에서 분출되는 기쁨에 달려있다. 성프란치스코는 정배가 되고 형제가 되고 어머니가 되어 그분을 관계 안에서 낳는일이 회개하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믿는 영혼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할 때 우리는 그분의 정배들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의 형제들입니다. (마태 12,50)

우리가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우리의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

(1코린 6,20)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들입니다. 거룩한 모범과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 (마태 5,16)
(성프란치스코가 모든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51-53)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받아들이는 그 움직임이 우리 자신을 알고 받아들이게 한다. 하느님의 손에 내 자유를 맡겨드림으로써 선하고 충만한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말이다. 거룩함의 진실을 우리의 관계로 만드는 일상이야말로 회개하는 인간이 할 유일한 생존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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