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두 세계 사이에 있는 하느님 나라

by 이마르첼리노M posted Jun 10, 202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 - Up Down Comment Print

두 세계 사이에 있는 하느님 나라

 

우리가 상상하는 두 세계 사이에 하느님 나라의 실재가 있다.

내가 상상하는 틀로 만들어진 하느님 나라와

예수께서 몸소 실천하시고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똑같은 하느님 나라가 아닐 때가 너무나 많다.

상상하는 실재와 구체적인 진실이 드러나는 실재가 다르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는 실재와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실재는

인격적 만남이라는 실재에서 구체화 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사람이 되신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성서의 말씀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의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신 예수님을 닮으려는 마음으로

그분처럼 되어가는 변화의 삶은 다르기 때문이다.

 

상상은 무의식 속에 살고 있기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일상의 삶에 깊은 영향을 주어 행동의 동기들을 유발한다.

성서를 해석하여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기까지 각자가 상상하는 틀이 너무나 다양하다.

교회 안에서 사목자들의 해석에 따라 다르고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의 해석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성령의 활동을 간직하고 사는 이들은 상상과 실재 사이에서 발견한 하느님을 믿는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느님이셨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 나머지

그분을 따르는 삶을 놓쳐버린 사람들은 상상과 실재 사이에서 방황한다.

 

하느님의 무상성을 대체하는 믿음은

기도와 희생을 드리고, 정해진 규범을 잘 지킴으로써

하느님께서 마음을 바꿔 자신들의 부탁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달리 말하면 잘 지키고 많이 바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는 하느님으로 만든다.

기도와 희생과 제물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 없으면

점점 하느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냉담이라는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둔다.

쫓기는 듯하고 늘 불안하며 하느님께 해드려야 할 숙제들에 쌓여 삶의 여백이 없다.

자신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일종의 종교심을 신앙이라고 믿는 것이다.

 

하느님의 무상성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

아버지는 당신의 자유로 아버지의 일을 하시고 우리는 거저 주시는 선물로 산다.

아버지의 일은 넘쳐흐르는 자비로 우리를 한결같이 돌보아주시는 일이다.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채워주시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라고 가르쳐주신 기도는 우리의 모든 기도를 다 포함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이 나를 도구 삼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일용할 양식에 포함된 우리의 모든 필요와

서로를 받아들이는 용서와 유혹과 악에서 지켜주시기를 청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묵주기도는 우리의 신앙고백과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과 영광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얼마나 좋은 기도인가?

그러나 이 좋은 기도를 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가?

성모님을 통해 자신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하느님과 거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이 기도를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느님의 무상성을 믿지 않고 자신의 수고와 땀과 희생을 셈하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무언가를 주시기를 기대한다.

무상으로 주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상상하는 틀로 만든 실재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활동하는 실재는 나를 변화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

하느님의 무상성을 우리의 관계 안에서 실천하라고 하신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내주어라

하느님의 자비가 나를 통하여 너에게 흘러가게 하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神話神化로 바꾸어야 할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내어주는 몸과 흘리는 피의 실재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실재다.

사랑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실재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이를 경험하지만 우리는 관계 속에 반영하지 않는다.

삶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거부하는 이유는 죽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마지못해, 할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죽는 죽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기쁜 일인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은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으로 죽는지 모르게 죽는 삶이다.

죽어도 기분 좋게 기쁘게 죽는다.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는 기쁨과 비교할 수 있는 기쁨은 없다.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