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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땅에서 피는 기쁨의 꽃

by 이마르첼리노M posted May 2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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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땅에서 피는 기쁨의 꽃

 

자비를 체험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자신이 자비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아닌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바리사이처럼 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비를 느끼는 기쁨을 결코 얻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분 짓고 다른 사람들 위에 자신을 올려놓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서 자신은 의롭고 선하고 규칙대로 살아간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버지의 자비의 품에 안겨 용서 받을 필요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실 잘못하고 부도덕한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이며, 탓 또한 자신이 아닌 타인의 것이라고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언제나 단죄할 준비를 하고 있지만 환대할 마음은 훨씬 덜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비참한 처지를 연민의 마음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기보다 심판하려는 의도가 넘쳐납니다.

 

죄를 없애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이지만 자비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과 다정함으로 어루만지시는 아버지께서
자비의 손길로 그렇게 하십니다
. 용서하시기 위한 길을 찾는 분은 우리보다 아버지의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마음의 작은 구멍과 틈새를 이용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시기를 원하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향해 한걸음 움직이면 은총이 우리 안에서 활동할 수 있기에 자비가 전해지기 위해서는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 시작을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엄격함의 무기로는 하느님과 연결할 수 없습니다. 자비로만 연결과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품보다 엄하신 아버지의 이미지로 길들어져 있습니다. 지극히 감미롭고 선하신 아버지 자비의 품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자비의 샘 곁에서 갈증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한 걸음 옮기려는 시도도 하지 않은 채 죽어가고 있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애끓는 아버지의 마음을 거절하는 우리의 태도는 그 자체로 지옥을 연상케 합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모성적 품이며 얼굴입니다. 자비는 우리 안에 육화되어야 할 얼굴이며 관계 안에서 태어나야 할 얼굴이기도 합니다. 기도가 자비로운 얼굴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전례와 예배는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미사와 전례와 기도가 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의 현장을 떠난다면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목적을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자비는 끌어안으시는 아버지께서 환대하고 용서하시려고 몸을 굽히시는 신적인 태도요 자신을 내어주시는 현존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느끼도록 해주는 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은 우리 안에 잉태된 말씀이 사랑으로 드러나는 육화를 통해서 드러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화의 도구로서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를 통해서 흘러가도록 관계를 이어갈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슬픈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만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처럼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남는 건 심각한 관계의 단절을 겪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이면서 마치 죄인이 아닌 것처럼 살아가는 위선이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은 단절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인이 있을까요? 나는 상처 받은 사람일뿐더러 상처를 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입니다. 오로지 상처를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공범자들입니다. 우리 눈의 들보는 자신을 볼 수 없도록 만들어 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그분의 용서 없이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비가 관계를 구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부서진 마음을 내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 부끄러운 마음을 내보이는 용기는 축복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관계 속에서 행한 악을 알고 용서와 자비가 필요함을 의식하고 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세탁으로 얼룩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치유 받아야 할 병입니다. 그분께서는 부끄럽고 부서진 마음에 들어가서 자비로 치유하십니다. 용서를 청하는 마음을 하느님께 내보이기 이전에 나로 인하여 상처를 받은 이에게 먼저 다가가서 대면하여 청하지 않으면 용서는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아있게 됩니다. 진정한 용서는 거기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구체적이고 대면하는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의 영께서 일하시는 일입니다. 그분의 자비는 우리의 죄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자비의 다정함과 어루만짐을 받은 사람은 용서받았다는 확신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경탄하고 감동할 때 변화하는 삶이 시작되며 변화할 때 기쁨이 시작됩니다. 원천의 사랑이 그리운 이에게 애끓는 사랑을 만난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입니다. 기쁨으로 벅찬 사람은 감탄하는 기쁨으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선은그렇게 확산하는 신비로 관계를 비추기 때문입니다.

 

용서받았다는 확신으로 변화된 사람은 경청과 이해와 용서와 사랑의 필요성이 있는 관계를 돌보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몸과 너를 받아들이기 위해 쏟는 피의 현장인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 구체적인 일상의 관계를 최상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기쁨의 얼굴로 빛납니다. 혼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에 자만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뿐더러 흙으로 빚어진 인간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며 살아갑니다. 자신은 깨끗하고 의롭다는 사고방식과 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자유롭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이 자유야말로 구원이라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타락한 사람이 아니라 해방된 사람이기에 행동하는 자비로 자신을 내어놓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하시는 하느님의 무상성에 자신의 삶을 맡겨드리며,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하여 무상으로 내어주는 삶으로 관계를 회복하려고 의지를 불태웁니다. 필요성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리스도의 몸을 만지러 갑니다.

 

2022, 5,22-25 피정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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