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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위한 몸값으로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by 이마르첼리노M posted Mar 1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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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위한 몸값으로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남이 자신을 사랑하기 쉽도록 허용하고 또 남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하느님께 자신의 자유를 내어드림으로써 자유에 대한 몸값을 치르는 가난한 사람이며, 하느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다소 제한하고 자신을 낮춤으로써 전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하느님께 자신의 자유를 내어드리고 그분 말씀의 인도를 따라갈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소멸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 포로가 되신 하느님의 자유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은하계의 티끌에 불과한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일부러 포로가 되시어 인간이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을 통해 사랑으로 당신께 다가올 수 있게 하셨다. 하느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해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단념한다면 나의 자유는 사랑이 주는 기쁨과 더불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에게 내어주는 자유 사이에서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는 우리 마음에서 멀어지고 내가 다스리는 나라만 남을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지혜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성경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될 때 두렵고 떨리는 분, 무서운 하느님, 처벌하시는 절대군주 같은 하느님으로 전해졌다. 그래서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기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인간의 자유에 포로가 되실 만큼 커다란 아버지의 자비의 품은 그렇게 두려움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신앙의 걸림돌이 되어왔다. 두려움은 무서워하는 마음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대상에게 화를 입히게 될까 봐, 그에게 고통을 주고 그를 다치게 하고, 화가 나게 하고, 상처를 주어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한다는 말이다.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벌을 주시는 하느님이라는 이미지로 인하여 죄책감으로 인해 주눅 들어 살아왔는가! 믿는 이들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를 얻기까지 자유는 배워야 하고 실천되어야 한다. 죄책감 때문에 회개했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죄책감은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감정과 거기에 더해 심판관 같은 하느님의 불호령이 내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나오는 불안감이다.

 

하느님은 빛이시고 죄책감은 어둠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이 두려움을 만든다. 우리는 사랑보다 두려움에 토대를 준 가르침에 대해 더 많이 들었다. 벌 받지 않기 위한 행동의 동기들이 사랑하기 위한 동기들을 삼켜버렸다. 얼마나 많은 신실한 사람들을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는가? 성직자들이 너무나 자주 죄책감이 주는 두려움을 통해 사람들의 의식을 통제해왔는지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들었던 이야기는 착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였다. 회개는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회개는 하느님은 벌주시는 분이 아니라 용서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우리의 희망은 거기에 있다. 하느님의 용서가 우리의 희망이며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용서는 하느님의 용서를 위한 필수 행동이다. 하느님의 용서가 우리의 용서로 구체화 되는 관계야말로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애써야 한다. 우리는 매일 같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애씀으로써 종교적 광신을 몰아낼 수 있다. 최근 우리는 대선 이후에 종교적 광신을 경험하고 있다. 종교적 광신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혼동하는 데서 나오는 현상이다. 나는 그러한 현상이 종교에 대한 개인적 추구가 정치적 권위에 대한 욕망으로 전환된 데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한다. 집단의 정치적 탐욕으로 변질되어버린 절대자의 온갖 형태의 광신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들이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캄캄하고 어둡게 만들고 있다. 광신이 저지르는 무수한 형태의 폭력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저지르는 폭력은 구원하는 폭력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폭력은 어떤 형태로든 인간을 해치기 때문이다. 고난이 폭력에 대한 최상의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내어주는 몸과 쏟아내는 피로 고난받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다.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용서가 우리의 희망이 되도록 관계를 살펴야 한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일이 그 어떤 종교적 광신보다 위대한 일이다. 불의에 저항하는 고난받은 종이 사랑을 위한 몸값이며 자유를 위한 몸값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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