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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수도원 이야기 (3)

by 이종한요한 posted Nov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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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수도원 이야기 (3)


캐나다 형제들이 일본 제국주의 감시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한국 관구의 초석을 놓으며 단단한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제한된 인력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일해야 하기에 제약이라는 것이 현실의 대부분이었으나 여기에서 이들이 이룬 것들은 새로 시작되는 관구가 주춧돌을 놓는데 꼭 필요한 좋은 역할이 되었다.


캐나다 형제들이 그 어려운 여건에서 관구의 기틀을 마련한 후 새로 시작되는 관구는 좀 더 거시적 안목을 지닌 지도자가 맡아야 한다는 생각이 정착되면서 캐나다 형제들은 혼쾌이 손을 때고 아뽈리나리스에게 맡기게 되었다.


이것 역시 우리 관구의 큰 자랑이다. 책임자가 바뀔 때 서로 견해의 차이로 마음을 상하는 예가 많은데, 캐나다 형제들이 혼쾌히 아뽈리나리스에게 운영권을 넘긴 것은 참으로 신사다운 태도였다.


신사와 신사가 서로의 역할을 넘기고 맡아야 할 지점에서 보인 멋진 품격이 캐나다 관구의 쥬스팅 신부와 아뽈리나리스가 보인 멋진 태도였다. 이런 면에서 아뽈리나리스의 인품을 거론할려면 쥬스팅 신부님도 거론해야 할 만큼 반듯한 신사와 신사들의 만남이었다는 것이다.


이 신사다움의 태도는 한국 관구의 장상이 지녀야 할 기본이 되어야 하고 오늘 우리 관구가 프란치스칸 형제애를 말할 때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즉 프란치스칸 형제는 어떤 처지에서던 신사로 처신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선배가 창설 초기에 보인 태도는 너무 자랑스럽고 우리가 이것을 계승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느껴야 할 일이다. 본인은 아폴리나리스 형제의 사무실을 2년간 청소 맡았던 지원자의 체험 즉 아뽈리나리스의 어록이나 무슨 보고서를 참고한 게 아니라 가까이서 어린 눈으로 본 그분의 행적을 따라 그분의 삶을 전하고자 한다.


아뽈리나리스는 캐나다 관구로부터 책임을 인수 받으면서 자기 만의 새로운 계획, 즉 황당한 것이 아니라 캐나다 형제들이 놓은 기초를 바탕삼아 새 계획을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초가 잘 되었다 손치더라도 공사를 맡은 기술자의 수준이 되지 못하면 기초가 튼튼한 것은 밑에 묻혀진 보물로서 끝나고 만다는 안타까운 현실이 또한 역사가 남긴 산  교훈이기도 하다.


“유능한 도목수는 나무를 보면 대들보 감을 만들고, 찌질이 목수는 이쑤시게를 만든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 한국 프란치스칸의 첫 번 장상인 아뽈리나리스 신부님은 한국 관구를 만든 대단히 유능한 도목수로서의 역할을 맡으면서 정동 수도원 공사를 시작으로 한국 관구의 탄탄한 기틀을 마련하셨다.


요즘 봉사자라는 말이 장상이란 단어의 신조어가 되었는데 아뽈리나리스 신부님은 장상으로서 관구의 기초를 놓는데 탁월한 업적을 이루신 분이다.


언젠가 아뽈리나리스가 살아계실  때 어떤 외국 형제가 아뽈리나리스와 무슨 교회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때 그분이 자기를 프란치스칸 장상으로 소개하는 것을 듣고 좀 생경스런 생각이 들었다는 감회를 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살아가면서 프란치스칸 관구장은 장상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고 소위 자기가 듣고 싶은 봉사자라는 칭호는 장상으로서 투철하고 명민한 책임감으로 관구장 직분을 다할 때 자연스럽게 봉사자가 되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봉사는 모든 회원들에게 맡기고 자기는 책임 있는 장상직을 수행한다면 최고의 봉사자가 될 수 있는데, 아뽈리나리스 신부님은 이런 면에 예언자적인 모범을 보이셨다. 함량 미달의 관구장이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은 다 봉사라는 착각에 빠져 살아가는 봉사자만큼 답답하고 불쌍한 존재가 없다는 것을 관구 역사는 알리고 있다.


신부님은 1903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나셨다. 네덜란드는 가톨릭과 칼빈파 개신교가 반반이며 한때 처참한 종교 전쟁을 하기도 한 아픈 역사를 지닌 나라인데, 이때 가톨릭이 박해를 받던 고르콤 지역에 우리 프란치스칸들이 칼빈파 광신자들에 의해 처참히 학살당한 모습의 작품이 바티칸 현대 미술관에 전시될 만큼 화란의 가톨릭 신앙은 단단한 바탕이 있는 것이었다.


오늘도 프란치스칸들은 이때 순교한 성 니콜라오 피크와 성 윌라드의 동료 순교자들을 5월 7일 공식 전례에서 기억하고 있다.


신부님의 근저에는 이런 순교 신앙의 바탕이 있었고 이런 신앙의 바탕이 네덜란드인들의 특성과 연결 조화를 이루면서 거시적인 안목과 철저한 검증으로 아시아 관구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 외 국토의 사 분의 일이 지면 보다 낮기에 이들이 국토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대단했고 이 과정에서 무슨 일이던 치밀하고 정확히 처리하는 네덜란드인들의 기질이 형성되었다.


네덜란드는 좁은 땅덩이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해외 진출을 많이 해서 식민지도 확보했으며 특히 16세기에는 일본까지 진출해서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일본에는 이때 네덜란드로부터 전수된 “난학” 이라는 네덜란드의 의학이 일본 의료 발전에 큰 기여를 할 만큼 네덜란드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나라였다.


난학(일본어: 蘭学 란가쿠)은 에도 시대 네덜란드를 통해서 들어온 유럽의 학문, 기술, 문화 등을 통칭해서 이르는 말이다. 


아폴리나리스 신부님의 개인이 가진 많은 장점 중 그가 화란인이기에 지닌 장점이 한국 관구 건설에도 큰 힘이 된 것도 사실이다.


신부님은 네덜란드의 니메겐 대학에서, 사회학을 영국 옥스퍼드에서 철학을 전공하셨기에 삶의 본질과 현실 파악력에 대단한 이해가 있었다.


그는 44세에 당시 1300명의 회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네덜란드 관구의 관구장을 맡아 관구를 양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질적인 차원에서 관구 위상을 격상시켰다.


그는 아시아에서 인도네시아와 파키스탄 선교지를 집중적으로 좋은 선교사들을 투입해서 대단한 수준의 관구가 되게 만들었다. 본인이 선교사의 꿈을 지녔던 그는 관구장이 됨으로 이 꿈을 접게되자, 선교지를 개발하고 좋은 선교사들을 파견하는 것으로 자기의 꿈을 보완했고 괄목할 만한 성과도 거두었다.


네덜란드 프란치스칸 선교는 선교가 식민지 통치자의 앞잡이라는 누명과는 거리가 먼 참으로 선교가 현지인들을 가톨릭 신앙을 통해 인간화 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지금 암스텔담에 있는 “인류사 박물관”에는 프란치스칸이 이룬 대단한 복음화의 결실이 전시되어 있다.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는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고. 각 섬 마다 고유한 언어와 종족들이 살고 있는데, 어떤  섬 하나에 살고 있던  종족들의 성격이 포악해서 접근이 어려운 곳이 있었다.


이들은 외부인들에 대해 무조건적인 폐쇄성과 공격성을 지니고 있어 독화살로서 사람을 죽이기에 아무도 접근할 수 없어, 고심하던 화란 정부는 치안을 위해 이 섬 주민들을 멸종시킬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것을 안 프란치스칸들은 자원해서 이 지역을 선교 지역으로 만들어 희생을 겪으면서 이들을 복음화시키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이 교화되어 다른 섬 주민들과 동화될 수 있게 만들었는데, 이 박물관의 기록은 프란치스칸들의 순교 못지않게 자랑스러운 선교 복음화의 결실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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