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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수도원 이야기 (1)

by 이종한요한 posted Sep 2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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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수도원 이야기


정동 수도원은 프란치스코 수도회 한국 관구 본부가 있는 수도원이며 서울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공동체이다. 수도원이 있는 정동은 행정 구역상 중구에 있는 한 행정단위에 불과하나 현실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구 못지않게 대단한 비중을 차지하는 곳이다.


행정 단위로 소공로 구역에 속하며 신문로, 태평로 1가, 순화동, 서소문동과 접해있으며 이 동네에 조선 왕조의 마지막 주 무대였던 덕수궁을 위시해서 구한말 역사에 큰 슬픔과 오점을 담겼던 러시아 공사관의 유적과 조선 왕조 왕들의 무능 때문에 일본과의 을사늑약을 체결하면서 나라를 일본에 내놓은 역사에 남을 수치의 장소인 중명전이 있는 장소이다.

그러기에 프란치스칸으로서 이 땅에서 해야 할 복음화의 실천을 위해 이 자리는 참으로 좋은 학습의 장이라 볼 수 있다. 현실에 대한 이해도 없이 프란치스칸 영성을 떠드는 것은 허황한 공중 누각을 짖는 어리석음이기에 이 자리의 역사가 주는 정확한 이해는 프란치스칸 삶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라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한 좁은 지역에서 역사적 흔적을 이토록 많이 읽을 수 있는 곳은 정동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동에는 구한말의 역사를 증언하는 많은 흔적이 있다.


당시 서울에 거주하는 열강 세력들의 사교장이었던 손탁 호텔, 러시아 대사관, 오늘 경향 신문 자리에 있었던 러시아 정교회 성당, 프랑스어 학교, 주한 영국 대사관, 독일 대사관, 미국 대사관, 구세군 본영, 정동 제일교회, 성공회 주교좌성당 외에도 구한말, 한국 정치에 큰 역할을 했던 러시아 대사관 터, 현대에 생긴 주한 캐나다 대사관, 덕수교회, 덕수 초등학교, 이화 여중고, 배재 중 고등학교, 예원 학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기억할만한 역사의 흔적이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웃에 있는 경향신문은 1946년 이 땅에서 복음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서울 교구에서 시작한 것이며 경향이라는 이름이 전국 수준의 언론이라는 뜻을 포함해서 마치 교황님의 성탄절 강복에 사용하는 Urbi et Orbi(로마와 전 세계에)라는 뜻을 기억하게 만든 이 땅의 언론사에 감동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경향신문은 한때 이 땅에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모탁 역할을 하는 예언적 언론으로 정착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밝히기 어려운 안타까운 이유로 5.16 재단으로 넘어가 문화TV와 함께 지금의 처지가 되었으나 한때 교회와 국가 전체에 큰 희망이었던 언론사였다.


그 외 서울에서 처음으로 생긴 부인 병원 터인 보국여관이 있었고 우리 교육회관 앞에는 임금들의 친필을 보관했던 어필각(御筆閣)터가 있다.


이런 역사적 흔적이 많은 자리에서 시작된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한국 현존의 역사를 보자


프란치스코 수도회 한국 현존은 1937년 대전에서 시작되었다. 캐나다 몬트리올 관구 회원들이 일본 가고시마에 정착해서 일하고 있을 때 이 지역에 전쟁 기지를 준비하던 일본 군부는 외국인의 거주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자, 캐나다 형제들은 이 지역 사도직을 일본 회원들에게 넘기고 동경으로 활동 기지를 옮겨 동경 교구에서 본당을 시작했다.


캐나다 형제들의 헌신적인 선교 덕분에 현재 이 본당은 동경 대교구에서 가장 큰 본당으로 성장했다.


우리와의 인연은 캐나다 형제들이 당시 우리나라에서 일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을 위한 피정 지도를 맡으면서 한국의 존재성을 알게 되었고 캐나다 형제들에게 호감을 느낀 프랑스 선교사들은 우리 형제들의 진출을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 교회는 박해의 후유증으로 복음화의 일꾼인 방인 사제와 수도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긴 박해를 견딘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 외에 독일에서 진출한 성 베네딕도 수도자들이 원산 지역을, 미국에서 진출한 메리놀 선교사들이 평양 지역을, 골롬반 선교사들이 전라도 지역을 맡고 있는 현실에 선교사들의 숫자 역시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캐나다 형제들은 이 요청을 수용하여 선교의 사각 지대였던 대전 지역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프랑스 사제들의 피정 지도와 영적 쉼터의 자리를 맡으면서 인근 신자들을 위한 사목을 실시했다.


그러나 곧 이어 시작된 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적성국인 캐나다는 여러 면에서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직접적인 박해는 아니었으나 여러 면에서 제약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서도 캐나다 형제들은 지혜롭게 최선을 다해 지역 사회의 복음화에 알차게 투신했다.


먼저 이 형제들은 지역 신자들을 돌보는 외국인으로서 모든 것이 생소한 이들의 복음화에 동참할 수 있는 방인 수녀들을 양성하기 위한 준비로 지원자들을 구하기도 할 만큼 열린 마음의 자세로 시작했다.


아시아의 어떤 지역에선 프란치스칸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너무도 생소한 환경에서 방인들의 처지를 미개하게 평가하고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기에 부족한 존재로 판단해서 방인 양성의 기회를 놓친 안타까운 역사가 있는데, 캐나다 형제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수녀들 양성을 위한 지원자들을 받은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계획은 이어진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악운이 겹쳐 실현하지 못했으나 그때 회원으로 점지된 최 아녜스 자매는 한국전쟁으로 형제들이 잠시 캐나다로 철수한 사이에 수도원을 지키면서 공산주의자들의 갖은 악행과 협박 속에서 굳건한 삶을 사시면서 수도원을 지켜 주셨다.


또한 당시 어려움에 처해있던 주민들을 프란치스칸 사목의 특징인 따뜻한 사랑의 사목 방침으로 신자들을 위로하는 사목을 이어왔다.


일제의 패망 직전 마지막 발악의 순간에 한 형제는 천연두로 사망하고 다른 형제는 맹장 수술을 마취도 없이 해야 하는 등 갖은 고난을 겪었다.


일본이 패망 후 해방이 되었을 때 이들은 그동안 지친 몸을 추스르기 위해 캐나다로 일시 귀국했다가 다시 한국으로 오는 날이 공교롭게도 6.25 전쟁과 겹치는 시간이어서 캐나다로 복귀했다가 1955년 재입국해서 폐허가 된 목동 수도원을 다시 일으켰다.


캐나다 형제들은 일제 치하라는 극한 상황의 어려움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의 준비를 해서 한국 관구의 기틀을 키웠다.


또한 캐나다 형제들은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방인 회원의 양성에 우선적 관심을 표시해서 한국 지원자들을 받아 양성의 기틀을 마련하고 몇 명을 캐나다에 보내 회원 양성을 했다.


이때 양성 받은 안 베다 형제와 백 안젤로 형제와 전 안드래아 형제는 서울에서 새로 시작되는 정동 수도원의 기둥 역할을 하면서 관구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 후 1956년 이태리 제노바 관구 형제들이 진출해서 거제도를 기점으로 활약하다가 부산 주교의 요청으로 진주에 정착해서 본당 사목을 시작했으며 여기에서 마산교구의 기틀을 마련하는 사목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진주와 대전만으로는 한국적인 현실에서 정착이 어렵기에 서울에 수도원을 마련하기로 결심하고 먼저 토지 구입부터 신경을 써야했다.


당시 우리의 현실은 이런 일에 도움이나 자문을 청할 수 있는 인맥이 확보되지 않는 처지였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다음에 소개할 첫 관구장 아폴리나리스 형제가 책임을 맡음으로서 현실화되었다.


그는 먼저 교구 사제의 소개로 미아리에 대지를 구입했다가 이 토지는 장래로 보아 적당치 못한 곳으로 판단하고 서울 중심부에 자리를 물색하면서 지금 정동 자리를 결정하게 되었다.


아뽈리나리스 관구장이 새로운 부지를 매입한다는 결정을 했던 1963년에만 해도 도심의 땅 값는 녹녹치 않아 상당한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외국인으로서 30여 곳의 부지를 찾아 보다 드디어 오늘 정동 수도원이 있는 부지를 매입키로 했다.


거시적 안목과 정확성을 겸비한 아폴리나리스 형제는 이곳을 결정하고 감리교 재단의 소유인 언어학교와 외국인들의 숙박을 돕고 있던 2층 건물을 구입하기로 했다. 당시 이 집은 감리교 선교사들의 숙소와 당시 서울에 있던 외국인들과 그 자녀들을 위한 유일한 언어학원을 하던 곳이었다.


그 옆엔 잠시나마 파리 외방 선교회 신부들이 명동 성당이 건축될 동안 임시로 사용했던 80칸 정도의 큰 집이 있었고 이것은 샬트르 바오로 수녀들이 처음으로 입국해서 잠시 거처한 장소가 되었다.


 오늘 경향신문이 있는 곳으로부터 전부가 궁전의 정원인 상림원이 자리했던 자리가 러시아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이 전체가 러시아 공관 부지가 되었기에 정동 수도원 자리는 정동에서도 많은 역사의 흔적이 녹아 있는 값진 장소였다.


그런데 장로교에 비해 폭이 넓고 관대한 감리교 목사들이 무슨 연유인지 가톨릭에는 그 집을 팔지 않겠다는 황당한 결정에 실망했으나 아뽈리나리스 신부님은 실망치 않고 다른 길을 찾았다.


마침 미국 가톨릭 구제회 책임을 맡은 안 케롤 주교의 중재를 통해 이것을 매입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아뽈리나리스의 혜안과 과단성이 없으면 도저히 될 수 없는 일이었다.


먼저 그는 건축 기금 확보부터 시작했다. 당시 중국의 공산화로 아시아를 위해 준비된 기금이 홍콩 경리부에 있는 것을 알고 이것을 총본부와 의논해서 건축 기금을 확보했다. 자금이 없는 처지에서 부채나 다른 방법으로 건축을 시작하는 것이 수도자의 신분으로 얼마나 황당하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기는 것인지를 알았기에 먼저 건축 자금부터 확실히 했다.


건축을 결정하고 맡길 실무진은 그의 폭넓은 인격과 인생 경험에 의해 미국에서 재속회에 입회했던 장발(루이스) 형제를 만남으로 알찬 시작이 되었다. 서울 미대 학장으로 있던 장발(루이스)형제는 형인 장면 박사와 함께 1922년 미국에서 재속 회원으로 서약한 초대 재속 프란치스칸이었다.


장발 형제는 당시 서울대 미대 학장으로서 당시 이 땅에서 아뽈리나리스를 도울 수 있는 준수한 실력자였으나 항상 이런 고급 인력을 확보하는데는 어려움도 있기 마련이었다.


장발은 원채 성격이 까칠한 분이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쳐다보지도 않는 성격이었으나 아뿔나리스의 인품에 매혹되면서부터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어 실력 있는 자기 애제자에게 이 공사의 설계와 시공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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