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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의 두 얼굴

by 이마르첼리노M posted Sep 2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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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의 두 얼굴

 

믿음의 신비는 역설적인 과정에서 발견된다.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

믿음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관계에서 고난을 거처 부활에 이르는 과정이다.

 

두려움은 관계에서 발생하는 십자가로 인하여

몸이 괴롭힘을 당할까 봐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과 정신과 의지로 몸을 다스릴 수 있다.

마음과 정신과 의지는 내 힘이 아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받은 영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힘을 받아 육신을 다스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의지를 항복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자유다.

자유로운 선택과 선택에 따른 결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결단하는 자의 축복이다.

원천의 에너지요 생명의 에너지인 하느님과 연결된 자가 누리는 축복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통을 두려워한다.

가능한 한 빨리 그 순간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십자가와 죽음이 없는 부활을 원하지만,

부활의 신비를 깨닫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고통 없는 영광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믿음 없이 십자가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위험하다.

부활에 대한 믿음 없이 십자가만을 강조하면 에너지 고갈 상태에 이른다.

희망 없는 에너지는 빛이 없는 어둠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찬양을 숨돌릴 핑계로 만드는 사람도 이와 같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땅, 경험하지 못한 자유,

하느님을 믿음의 대상이 아닌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숨을 곳을 찾다가

자아도취적 거룩함과 거짓 의로움을 찬양이라는 포장 속에 숨기기 때문이다.

근본주의자들이 과대 찬양과 지나친 경건, 천박한 경외심을 앞세워

외형적인 전통과 전례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피조물의 세계가 아름답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찬양으로 그칠 뿐, 창조주의 숨결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찬양은 내면의 샘솟는 기쁨의 표현이지 포장하는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찬양으로 두려움을 숨기는 기술자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만을 위해 일한다.

자신의 두려움이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아닌척하는 것이다.

 

찬양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넘치는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는 최상의 응답이다.

즉 하느님과 나, 너와 나, 그리고 피조물과의 삼각관계 안에서

삼위일체의 하느님 사랑에 참여하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전해지는 순간들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확산하는 선으로써 하느님의 통치를 드러낸다.

 

우리는 나약한 인간성을 지니고 산다.

하느님의 자비가 구원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결핍을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심판이 아닌 구원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인간성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사람의 인성 안에 깃든 하느님의 신성을 육화라고 고백하는 우리들의 정체성도

그분을 따르려는 우리가 하느님의 선을 공유하는 선으로 표현될 때

우리 안에 깃든 하느님의 신성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神話神化로 바꾸는 위대한 전환이 찬양하는 사람의 내면에서 이루어진다.

우리 정체성의 변화는 이 세상을 낙원으로 보게 한다.

 

미래에 있다는 생명은 현실적이지 않다.

지금 여기서 누리는 생명만이 진실하다.

행복한 사람들, 자유를 아는 사람들,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네가 이 땅에 있어서 내가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라는 말을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들은 사람들이다.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로부터 그 말을 들었다.

자기중심적인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도 나 자신이 좋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나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한다.

비난하고, 무시하고, 하찮게 여기는 악한 이들 때문에

근심에 차서 일생을 보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당신의 자비와 선하심을 우리가 보고 깨달을 때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우리를 보고 행복해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행복해하심을 느낄 때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하느님의 기뻐하심은 우리의 힘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는

서로의 눈길 속에 축복이 있다.

 

피조물 속에 깃든 신의 속성 안에서 자기 몫의 삶을 살면서

내적 초월을 향한 힘의 원천으로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고난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며,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지고 십자가를 질 때

부활은 이미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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