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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창설 80주년 감회 - 이요한(종한)

by 이종한요한 posted Oct 2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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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어떤 이들에게는 좀 생경스럽지만 이것이 작은형제회라 불리길 몹시 바라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한국 관구 홈페이지이니, 프란치스칸 영성과 삶에 사랑과 관심이 있는 분들에는 알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 전하기로 했다.

 

   1937년 캐나다 관구 회원들의 진출로 시작된 이 땅의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2차 세계대전과 육이오의 혼란 속에서 시련을 겪으면서 성장했다.

 

  1937년 입국하자 이차대전에 의해 캐나다는 일본의 적성국이었기에 가택연금과 거주제한과 같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전쟁이 끝난 후 잠시 몸을 추스르기 위해 캐나다로 귀국다가 재진출을 위해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 육이오 전쟁이 시작되어 다시 돌아가야 했으니 새로 시작되는 수도회로서는 너무도 큰 난관을 겪으면서 시작 된지가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번 80주년 행사의 특징은 철저히 내면화라는 것이다. 보통 이런 기념은 자기 집단의 성장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성대한 행사차원으로 준비하는 게 보통이나 이번은 철저히 내면화에 중점을 주는 모습이었다.

 

  한 형제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회원들 간에 80년 역사 이해 차원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연표를 만들어 내부 열람용으로 배부되었다.

 

   준비된 강의 역시 회원들의 자기 성찰과 앞으로의 바람직한 관구 방향 정립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는 내용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 다음 수도 집단에서는 약방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이지만 중요한 것이 전 회원들이 바치는 80주년 준비를 위한 기도이다.

 

   복음적 집단이 아니더라도 여느 상식을 지키는 인간 집단이라면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오늘 행사를 생각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준 선교사들의 노고야 말로 우리가 기억함으로서 오늘 그들과 다른 안정된(?) 처지를 살고 있는 회원들의 각성에 도움이 되는 것이란 실질적 차원에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나는 꼭 30년 전 관구의 책임을 맡은 처지에서 50주년을 맞으면서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을 첫 선교사로 도착한 캐나다 관구 형제들에 대한 감사로 생각하고 캐나다 관구를 방문했다.

 

   처음 캐나다 관구에 뜻을 밝히고 방문하겠다고 했을 때 그곳 정서는 좀 달랐다. 환영한다는 것 이전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처지에 무슨 감사의 인사를 받느냐는 정서가 짙은 인상이었다.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는 것을 중요한 좌우명으로 여기는 프란치스칸 집단에서, 시혜자인 캐나다 관구로서는 당연한 태도로 볼 수 있으나, 수혜자인 우리 처지에서는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는 게 도리라 여겨 방문했다.

  

  큰 결실은 한국 선교에 참여했던 두 형제 아듀톨과 가브리엘 헝제를 만난 것이다. 아듀톨 형제는 선교사로 왔다가 이차 대전 말기에 선교사들이 구금될 때 연금의 고통을 당했다.

 

  그가 연금된 상태에서 맹장염이 시작되었는데, 적성국 죄수에게 수술 혜택을 줄 일본 정부가 아니었기에 죽음만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나, 다행이 흉측한 제국주의자 일본인이 아닌 인간미 있는 일본 의사가 그를 살리기 위해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맹장염 수술에 필수인 진통제를 구할 수 없는 처지에서 그냥 수술을 했으니 그 참상은 알만하다.

 

   또 다른 선교사였던 가브리엘 형제는 평수사로서 선교를 왔다가 일본의 압박이 시작되자 견디지 못하고 귀국한 형제였으며, 애초부터 우리말을 배울 기회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지내다 귀국했으니 우리말은 한마디도 못했으나 선교지로서의 한국에 대한 그리움은 가지고 있었다.

 

   세월이 30년이 더 흘러 80주년이 되어 준비 위원회에서 준비한 선교사들을 기억하는 기도가 있었다. 그런데 죽은 선교사를 위해서는 기도하는 게 도리이지만 아직 살아있는 선교사들은 찾아보는 게 도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교회와 수도회에는 원채 좋은 말을 많이 간직하고 있기에 행동으로 보여야 할 때 행동 보다 입치례 수준의 립 서비스(Lip service)를 하는데 너무 익숙해 있는 현실이나, 이것을 헤어나지 못하면 가장 순순해야 할 수도자들의 모습에 빈 깡통 같은 서글픔을 끼친 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그러하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선교사들은 거의 사망한 현실이다. 우리와 함께 생활하다가 성지에서 선교하고 있는 이태리 출신의 안젤리코 형제는 몇 년 전까지는 계속 만났다.

 

   그러나 우리의 자매로서 일했던, 마리아 전교자 프란치스코회의 자매님으로서 산청 성심원과 칠암동 양로원에서 헌신하신 데레사 기시다 수녀님과 데레사 오야마 수녀님, 그리고 직접 일하지는 않았지만 가리봉 관구 본부나 다른 공동체에서 소임하시면서 우리들의 사회사업이나 양성 공동체 형제들의 오르간 레슨을 도와주신 아녜스 다키자와 수녀님이다.

 

   이들의 헌신은 80주년을 맞으면서 우리가 기억하는 것으로 답례 차원이전 우리가 선교사들의 장한 삶을 본받아야 한다는 기도 내용이 입치례가 아닌 실천적 증거의 차원에 도움이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관구장님께 이 의향을 알리니 쾌히 승낙하시면서 관구의 이름으로 감사의 뜻을 전하는 목적으로 이 방문을 허락하셨다.

 

   이런 방문에 필요한 것은 머니 머니 해도 머니가 최고라는 것에 공감한 관구 경리는 청하지도 않았는데, 필요한 돈과 카드까지 자상히 배려해 주었다.

 

   이스라엘의 일정을 끝내고 즉시 일본행은 좀 무리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이것저것 견주다보니 이날이 최선이란 생각이 들어 이스라엘에서 귀국 일박을 서울에서 하고 허둥지둥 준비를 해서 오야마 수녀님이 계신 구마모도를 향했다.

 

   구마모도 공항은 우리나라에서 예를 들 수 없는 작은 공항이고 승객도 거의 없기에 쉽게 통과하리라 믿었는데, 예기치 못한 날벼락을 맞아 약 1시간을 거의 혼자서 검색을 당해야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머지않아 시작될 동경 올림픽 준비의 일환으로 시작된 엄격한 검열의 모델로서 내가 선정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수녀님의 나이는 이미 80, 90이 넘은 처지이나, 기시다 수녀님은 아직 조그만 공동체에 거주하며 탁아소를 운영하기에 일손이 바쁜 후배 자매들의 일손을 덜어주기 위해 집안일을 하고 계시고, 오야마 수녀님은 불편한 다리 관계로 보조대에 의지하여 걷고 계시나 정신력은 아주 좋았고 우리말도 거침없이 하셨다.

 

   두 수녀님은 다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인의 서로 다른 심성을 가지고 계셔서 참으로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었다.

 

   일본인의 화법엔 혼네와 다테마에 라는 우리에게 좀 생소한 것이 정착되어 있는데, 本音(혼네)는 진심 ,建前(타테마에)는 겉치레 라 말한다.

 

   일본인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 탓에 대화에 있어서도 본심을 드러내기보다 어떤 이유로던지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관점을 강조하다 보니 우리에게는 좀 생소한 다테마에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는데, 기시다 수녀님은 철저히 다다마에를 조화롭게 사용하는 전형적인 일본인으로 좀처럼 언잖은 감정은 드러내지 않으셨으나, 오야마 수녀님은 한국인처럼 혼네를 사용하시는 일이 많으시기에 어떤 때 좀 당황할 때도 있었지만 시원한 인상을 주는 분이었다. 시세 표현으로 화통한수녀님이셨다. 반면 기시다 수녀님은 철저히 절제된 일본인의 태도로 자기 일에만 충실하셨기에 벚꽃처럼 화사한 인상을 주는 분이었다.

 

   오야마 수녀님은 우리나라에 오셔서 칠암동에서 하대동으로 이어지는 양로원에서만 계셨다. 그분은 일생을 한국 땅에서 묻을 생각으로 오셨는데, 다리가 아파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생각을 바꾸었다고 하셨다.

 

   오야마 수녀님은 새내기 수녀일 때, 일본 예수회 관구장으로서 후에 총장이 되어 성 이냐시오 이후 가장 휼륭한 예수회 총장으로 평가되고 있는 아루페 신부님의 지도를 받은 탓인지, 자기 삶에 대한 확고한 태도로 처신하실 수 있었으며 일본인답지 않게 혼네 어법을 잘 사용해서 자기 의사 표현에 자유로운 분이셨다.

 

   나는 그분이 양로원에 계실 때 할아버지들도 있는 관계상 우리 형제들의 손길도 필요했는데, 이것을 해결하지 못했던 것을 항상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분은 내가 추천한 형제가 적격이 아니란 생각이 들 때 그런 형제는 양로원 업무에 도움이 되지 않기에 받지 않겠단 의사표시를 해서 나를 당황하게 하기도 했으나, 시원하고 담대한 분이셨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기시다 수녀님은 일본 규수의 최남단인 가고시마에서 약 1시간 30분 페리로 달려야 하는 조그만 섬에 계셨는데, 이 섬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1524년 선교를 목적으로 처음 입국하신 성지였다.

 

   지금 신자는 주일에 15명 정도 참석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있으며 이 섬에서 수녀님 5명이 탁아소를 하면서 동네 사람들을 보살피고 있으나 수녀님들께 감사하면서도 입교는 생각지 않는 참으로 일본적 특성이 너무도 잘 드러나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이런 처지에서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처럼 최선의 노력을 하며 살아가는 이곳 성직자 수도자들의 모습은 풍요로운 결실에 도취된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시다 수녀님이 계시는 수녀원은 하도 작아서 내가 쉴 수 있는 곳을 찾기가 어려웠고 수녀님들이 모두 바쁘시기에 식사를 준비할 수 없어 교우가 하는 민박집에서 숙식을 해야 할 처지였다.

 

   오야마 수녀님께 준비해 온 인삼을 드리자, 그분은 일본 사람답지 않는 혼쾌한 표현을 하셨다.


신부님 나는 한국에서 오만가지를 다 먹어 보았으나 인삼은 먹지 못했는데, 이제 인삼을 먹게 되었습니다.”

 

  기시다 수녀님은 나를 위해 이틀간의 시간을 내어 근처 순교 성지 방문 계획을 세웠으나 나는 아침 식사를 끝내고 떠나기로 했다.

 

   공교롭게 떠나는 날은 920일 한국 순교자 축일이었기에 수녀님들과 함께 일본어로 독서와 복음을 읽는 미사를 봉헌하면서 새로운 감회에 빠졌다.

 

  기시다 수녀님이 산청에 계실 때 항상 환우들의 치료를 위해 가가호호를 방문하시는 일을 하셨는데, 육영수 여사가 재일 교포인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사망하자, 순박한 환우들을 기시다 수녀님에게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폭언도 서슴치 않았으나, 그분은 복음적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을 인내하며 한결같고 충실한 사랑으로 환우들을 치료하셨다.

 

   불교에서 부처를 만들어 봉안 할 때 점안식이라는 예절이 있는데, 주지 스님이 독경 후 부처의 눈동자를 먹으로 찍는 것이다. 아무리 금부처라도 눈동자가 없으면 죽은 부처라는 좋은 상징적 의미가 있는 예식이다.

 

   기시다 수녀님께 몇 년 전 성심원 환우들이 만든 시집 장단 없어도 우리는 광대처럼 춤을 추었다.” 시집을 드렸더니 그 짧은 시간에도 그분은 숙독하시고 나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필자도 있지만 아직 이름이 기억나는 필자들의 시를 읽으며 다시 성심원에 대한 그리움에 젖을 수 있었단 말씀을 하셨다.

 

   일본인의 정직성과 철저성이 조그만 선물을 받는 태도에도 드러나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귀국하자 기시다 수녀님으로부터 감사 편지가 왔다. 나에 대한 감사뿐 아니라 이런 기회를 배려해주신 관구장님께 감사의 뜻을 전해 달라는 것이었고, 이것은 우리 관구 모든 형제들에 대한 감사라 여긴다.

 

   일본과 우리는 참으로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절천지 원수의 나라이다. 우리가 평화를 사랑해서 인가 아니면 무능해서인가?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거쳐 일본 36년의 식민 통치기간까지 겪은 고통과 수모는 언제 지워질지 모르는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아직도 일본의 정치인들과 우익들 뿐 아니라 우리 가족인 일본 프란치스칸 대종에게서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시원히 사과를 하지 못하는 변비증 환자와 같은 답답하고 음흉한 모습과 정서를 본다.

이런 현실에서, 세 분 일본 수녀님들은 참으로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일본인의 모습을 보임으로서 프란치스칸으로서 한일간 화해에 큰 역할을 하신 분이심에 틀림이 없다.

 

  이제 우리 형제들이 일본을 돕기 위해 파견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파견된 형제들의 의식 있는 삶의 태도는 일본 관구도 인정할 만큼 자랑스러운 처지임을 발견한 것도 기쁜 일이었다.

 

  동경에 와서 아녜스 다키자와 수녀님을 만나고 일본 관구장님께 좋은 선교사를 보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전했다.

 

   세 수녀님들은 이삼십년을 이곳에 사시면서도 칠암동 양로원, 성심원이란 한 자리에서 양로 수녀와 간호 수녀의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사신 분이시다.

 

   수도 집단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그런가, 소개할 때 그가 현직에 있을 때 이룬 업적들, 무슨 감투 성격을 띈 직책들을 거론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으나 이것은 작은 자의 삶을 최고로 여기는 프란치스칸 수도 집단에서는 본질을 희석시키거나 퇴색시킬 수 있는 것이다.

 

   세 분 수녀들의 삶은 시나브로 외치는 작은 자의 삶”, “숨은 생활이전에 프란치스칸 차원의 영웅적 증거라 표현하는 것이 과찬이 아니라 정확한 표현이라 믿는다.

 

  또한 프란치스칸 수녀로서 자기가 섬겨야 할 사람들과 함께 일상의 삶을 충실히 살았던 그들의 기억을 80주년을 맞아 회상한다는 것은, 새 출발을 결심하는 한국 관구의 수도자라면 어떤 명강론 보다 더 힘있는 활력소가 되리라 믿는다.

 

  귀국해서 겹친 여행 때문인가? 건강에 불편을 느꼈으나, 이 방문을 생각하면 극심한 피로와 긴장은 모두 잊어지는 상쾌한 기억의 방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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