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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나누기

사순 1주 토요일-하느님의 사랑이 사랑하도록

by 김레오나르도 posted Mar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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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오늘 주님은 그래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러기 전에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고,

자녀가 됐다가도 그러지 않으면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우선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기본으로 전제해야 할 것입니다.

설혹 누가 자기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가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니 하느님의 자녀인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느님의 자녀다움>, 정체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의식이 있는 사람인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답게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인가와 관련된 거지요.

 

사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자기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없이 살고,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사람들도 인구 조사할 때나 자녀임을 생각하고,

조금 나은 신자라도 주일미사에 가서나 하느님의 자녀임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설사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얼마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 자녀답게 살아야겠다는 의식이 없이 사는 사람이 대다수이고,

자녀답게 살려는 의식이 있더라도 잘못 알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녀답게 사는 것을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는 정도로 알고 있고,

교무금이나 교회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자녀답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지만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한다지만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며,

이웃을 사랑하다지만 원수는 사랑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서 자녀로서 해야 할 것은 다 하며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박해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의 기준이라고.

그러니 아직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못된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입니까?

제 생각에 원수를 사랑치 못하는 것과

원수를 사랑치 않는 것은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요?

 

원수를 사랑하려고 하는데도 못하는 것은

사랑치 않는 게 아니라 사랑에 발을 담근 것이며

다만 완전한 사랑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 사랑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우리도 사랑을 하지만 아직 완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했고,

십자가의 주님처럼 원수를 사랑하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아직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 말은 언젠가 우리도

완전한 사랑에 도달해야 하고, 도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어떻게 이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인 양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위해서 기도를 하다보면 하느님 사랑이 들어올 것입니다.

기도란 사랑의 물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수, 박해자까지 사랑하려는 의지를 가지기만 하면 되고

사랑의 의지를 가지고 기도를 하면 터진 사랑의 물꼬를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온 하느님 사랑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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