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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나누기

부활 4 토요일-'위하여' 사랑과 '더불어' 사랑

by 김레오나르도 posted May 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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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위하여더불어입니다.

위하여가 누구를 위해 주고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라면

더불어는 누구와 함께 있어 주고 서로가 서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보통 생각합니다.

누구를 위한다는 것은 누구를 중심으로 두는 것이니

자기중심적인 것과 비교할 때 사랑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누구를 위할 때 그를 위주로 무엇을 하기에

나는 어떤 식으로든지 희생을 해야 되겠지요.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고 하거나 대단한 사랑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겠지요.

 

그럼에도 위하여의 사랑은 그 사랑이 미성숙하고 불완전할 때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를 위한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이것을 했으니 너도 나를 위해 뭔가를 하라는 경우지요.

 

대부분의 부모는 안 그러지만 부모들 중에도 가끔은

내가 너를 어떻게 고생고생하며 키웠는데

어찌 네가 이럴 수가 있냐고 하는 부모가 있지요.

 

부모가 자식에게도 이러하니 우리의 일반적인 사랑 가운데는

똑같은 희생으로 보답을 바라지는 않을지라도

희생을 알아준다든지, 고마워한다든지, 그런 보답을 바라는 불순물이 있지요.

 

위하여사랑의 더 근본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위하여사랑은 구별과 차별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무엇을 한다고 할 때

이것이 진정 섬기는 것으로서의 위하여가 아니면

그들을 위해 좋은 것을 베풀었다는 시혜의식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위하여의 사랑은 더불어의 사랑과 비교할 때

그 문제점이 잘 드러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사랑일까요?

 

요즘 자원 봉사자들의 수가 점점 줄어든다고 합니다.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맞벌이를 하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그것 말고도 돈으로 편하게 사랑을 실천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위하여의 사랑은 그들의 존재와 삶을 함께, 더불어 살아가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그리고 얼마만큼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구별, 차별, 우월감, 시혜의식, 이런 것들이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우리가 눈 여겨 볼 말을 남겼습니다.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회개를 시작하게 해 주셨습니다.

내가 죄 중에 있었기에 나병환자를 보는 것이 역겨운 일이었지만

주님 친히 나를 그들 가운데로 데리고 가셨고 나는 그들과 함께

자비를 실천했습니다. 그랬더니 역겨웠던 것이 단 맛으로 바뀌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회개하기 전에도 프란치스코는 동정심이 많아 가난한 사람을 잘 도왔지만

그들이 프란치스코에겐 아직 같은 사람이 아니고 차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프란치스코가 회개하자 나병환자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내가 싫어하는 바로 그것이 바로 예수라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사랑은 높은 차원으로 올라갈수록 위해서 뭘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과 나와 이웃이 다르지 않고 하나인 삶을,

서로가 서로 안에서 머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의 사랑의 관계가

바로 이 상호내주相互內住의 관계라고 말씀하시며 그것을 믿으라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우리는 이것을 믿고, 이것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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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페이지 풍경소리 2015.05.02 09:17:45
    그렇습니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처럼 살면서 문득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은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양방통행이라는 것을......
    다만 주고 받는 것이 다를 뿐 일방적이지 않다는 것, 마냥 주기만 한다고 할 때
    언젠가는 그 한계가 들어난다는 것......인간이 한계지어진 존재이기에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는 사람의 소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도 받음으로해서 주는 사람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면 결코 일방통행은 아닐 겁니다.

    근데 어떤 사람은 받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살아오면서 자신이 누군가에게 줄 때 아까워 하면서 주었던
    자신의 경험치에서 상대도 그런 마음일꺼라는 자기 투사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사람은 배운데로 경험한데로 밖에 살수 없기에 하느님께서는 먼저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나 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주님 친히 나를 그들 가운데로 데리고 가셨고..........”
    주님이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셨으니 저도 배운데로 경험한데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해보는 새 아침입니다.
    고맙습니다.
  • 정지용정지용 2015.05.02 06:57:57
    ^ 위하여 사랑을 하게 되면 각 개인마다 나를 맞춰야 해사 나중엔 내 자신은 없어요 그만큼 뇌의 에너지 소모와 희생의 댓가가 없을 때 허무감! 바로 제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잃어버린 제 자아를. 찾기 위해 노력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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