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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8일 공현 후 화요일

by 말씀지기 posted Jan 0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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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8일 주님 공현 후 화요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코 . 6,34-44)
Give them some food yourselves.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은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온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너무나 배고픈 상태에서 기적의 음식을 먹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준비되어 있던 음식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이 전부였기에 놀라움이 더했던 것이다. 어른 한 사람이 먹어도 시원찮을 음식을 수천의 군중이 먹고도 남은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이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허기를 채웁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동화에나 나옴 직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합니다. 기적의 음식을 먹은 제자들이 너무 놀랐던 것이지요. 그래서 두고두고 이 이야기는 전해졌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의 능력에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보잘것없는 음식으로도 수천 명을 먹이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리려는 데 있습니다. 옛날에는 배고픔이 흔했습니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으로 굶주리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지요.

오늘날에도 배고픈 이는 여전히 많습니다. 영적으로 굶주린 이가 더 많습니다. 사는 것이 우울하고 불안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찮은 것일지라도 나에게 맡겨라. 너를 풍요롭게 할 것이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는 배고픈 어른 한 사람이 먹기에도 시원찮을 음식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음식으로 수천의 군중을 감동시켰습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주님께 봉헌한다면, 그분께서는 영적 힘으로 변화시켜 돌려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주님께 봉헌한다는 것은 그분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새벽을 열며 - 빠다킹 신부-

월요일이었던 어제 새벽 3시쯤 전화가 울립니다. 잠이 들 깬 상태에서 전화를 받았지요. 상대방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들떠있었습니다.

“신부님, 너무 이른 시간이라 죄송한데요. *** 형제님께서 지금 너무 위독하셔서 병자성사 청하기 위해서 이렇게 전화했습니다.”

“네. 지금 가겠습니다.”

저는 간단히 양치질과 세수를 한 뒤에 곧바로 그 병원 응급실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병원 응급실에 누워 계신 형제님을 뵙는 순간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 형제님은 레지오 활동도 열심히 하시고 성당의 봉사활동에 누구보다 적극적인 분으로, 글쎄 불과 몇 시간 전에 저와 함께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회사에서 풍산개를 키우는데 새끼를 6마리나 낳았다면서 환하게 웃으시던 그 모습이 선한데, 이렇게 힘없이 누워 계신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주님 위에서 자신의 뜻대로만 모든 것을 행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 많은 욕심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으며, 교만의 삶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찾아온 많은 군중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계시지요. 그런데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제자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바로 인간적인 먹을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는 것인데, 그들은 인간적인 먹을 것을 이유로 예수님과 사람들과의 만남을 떼어놓으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인간적인 문제를 제자들이 해결해보라고 이야기하시지요.

분명히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 왜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바로 이 세상의 관점으로 문제들을 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인간적인 관점으로 볼 때에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도, 주님과 함께라면 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봉헌입니다. 당신의 능력이라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그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실 수 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면서 봉헌을 요구하십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부족해 보이는 빵과 물고기를 봉헌하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모든 이가 먹고도 남는 엄청난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주님께 봉헌한다면, 주님께서는 당신의 힘으로써 변화시켜서 우리에게 되돌려 주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것을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요? 이러한 마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모든 문제의 해결을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모든 것을 맡길 때, 우리의 삶 안에서 매 순간 놀라운 기적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힘을 굳게 믿으십시오.


예수님의 마음 -이중섭 신부-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의 특징은 즉각적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이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나? 이 사람이 기적의 은혜를 입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예수님은 이런 것을 따지지 않고 당신의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불행과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그냥 둘 수 없는 그분의 즉각적 반응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고 계속 딴청을 부렸습니다.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 있느냐? 가서 보아라.” 오천 명이 배불리 먹는 기적은 있던 빵을 분배하여 이루어진 것이지, 없던 빵을 있게 만드는 기적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곡식 낟알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적적인 하느님의 업적을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일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주를 지어내고 질서를 매겨 운행하는 일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는 일보다 훨씬 더 큰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인기를 끌거나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처받은 예수님의 즉각적 반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다가왔음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치고 행하신 그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지금 배부르십니까? -주영길 신부-

많은 사람들이 늦은 시간 또 외딴 곳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따라왔다.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제자들의 생각은 현실적이다. 각자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해결하고 오는 방법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어리둥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은 나눔의 실천을 가르쳐 주려고 하신 것이다. 풍족한 가운데 나눔이 아니라 부족한 가운데 나눔의 실천이다.

비만·당뇨·고혈압 등 현대의 많은 질병은 먹지 못해 생긴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이 먹어 탈이 난 것이다. 영양은 포화상태인데 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풍족한 먹을거리에도 더 좋은 것을 먹기 위한 웰빙 열풍까지 불고 있다. 그리고 날씬한 몸매를 가꾸기 위한 다이어트 열풍도 한몫 거들고 있다.

언젠가 필리핀에 선교 체험을 다녀온 후배 신부의 말이 생각난다. “오늘날 가난의 문제는 부자가 나누지 않는데 있는 것만이 아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엄격히 차단되어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데 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한 필리핀에서 절실히 느낀 것이라 한다. 부자 동네는 가난한 동네와 엄격히 구별되어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부자 동네는 경비가 철저할 뿐 아니라 울타리까지 쳐 있고 그 안에서 쇼핑과 교육, 여가 생활 모두가 가능했다. 가난이 무엇이고 배고픈 처지가 어느 정도인지 모른 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모든 종교는 ‘단식’을 가르치고 있다. 가톨릭교회도 일 년에 두 번,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에 한 끼 단식을 의무화하고 있다. 가장 엄격한 종교는 이슬람교인데, ‘라마단’ 기간에는 낮 동안 물조차 먹지 않는다. 이러한 단식행위는 극기와 보속의 의미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배고픈 이들과의 연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배고픔을 알지 못하는 풍요 속에서 살지만 배고픈 이들의 고통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여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단식하고 있는가?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 천 명이었다."


<고참들끼리만 라면을> -양승국신부

우리가 느끼는 소외감 중에서 가장 큰 소외감은 음식으로 인해 느끼는 소외감일 것입니다. 야심한 시간, 고참들끼리만 낄낄대며 라면을 끓여먹을 때, 구석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누운 이등병이 느끼는 소외감은 아마도 "죽음" 이상의 소외감일 것입니다. 라면 특유의 은근한 냄새, "후루룩 후루룩" 들려오는 라면 넘어가는 소리를 듣고만 있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겠지요.

반대로 이 세상에서 제일 듣기 기분 좋은 말, 가장 귀에 익숙한 정겨운 인사는 "밥 먹자!", "식사하셨습니까?", "한 잔 할래?"와 같은 인사말일 것입니다.

제 어린 시절 절친했던 친구의 따뜻한 어머니 모습은 아직도 제 기억에 생생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던 저였기에 은근히 성가시기도 하련만 친구 어머니는 한 번도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친구와 정신없이 놀다보면 어느덧 저녁식사 시간이 되곤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친구 어머니는 "어서 앉거라. 찬은 없지만 한 숟가락 같이 뜨자!" 하시면서 제몫의 밥 한 그릇도 챙겨주시곤 했습니다. 고맙게도 고봉으로 말입니다. 돌아보니 너나 할 것 없이, 없이 살던 시절 참으로 눈물겨운 순간이었습니다.

음식을 함께 나누는 데서 오는 즐거움은 특별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충만한 행복의 순간은 온 가족이 한 식탁에 둘러앉는 순간이겠지요. 도란도란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저녁을 드는 순간의 기쁨은 참으로 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굶주리고 지친 백성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시고 당신 식탁에로 초대하십니다. 말씀에 심취해서 끼니도 잊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현실로 돌아왔을 때 하루 내내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시간,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발휘되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이토록 자비 충만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는 분, 우리의 멸망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는 분이십니다.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우리의 허기, 아무리 마셔도 해소되지 않는 우리의 갈증을 영원히 해결해주실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의 고통에서 눈을 떼지 않으시는 연민의 하느님, 우리의 결핍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몸과 피로 채워주시는 나눔과 헌신의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참 신앙인의 표인 사랑 -경규봉 신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켜야 하는 하느님의 요구이다. 이 명령은 예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3,11; 요한 13,14-17.35).

하느님은 본질상 사랑이시며 모든 사랑의 근원이시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 사랑을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셨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모든 사람이다. 사랑은 단순히 사랑하는 마음을 뜻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를 뜻한다(3,18).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난 자녀이며 하느님을 아는 사람임을 드러낸다. 사랑은 하느님의 본질이며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으로 하느님과의 친교를 통해서만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르고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 모두가 하느님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께서는 본질상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당신 사랑을 드러내셨다. 하느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하느님과 단절되고 영적으로 죽은 인간을 위하여 당신 아들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생명을 얻도록 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다. 사랑은 영원하며 변함이 없다. 사랑은 부족함이나 모자람, 아쉬움이 없다. 사랑은 풍요로움이며 충만함이다. 사랑은 바다처럼 넓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감싸는 너그러움이며, 용서이다. 사랑에는 질시나 배척이 없다. 사랑은 창조의 원동력이다.

하느님께서는 풍요롭고 충만한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피조물 가운데 유독 사람만은 당신의 모습대로 만드시되 직접 만드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닮았고 직접 만드신 사람을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더욱 더 사랑하시고 소중하게 여기신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점은 당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을 통해서 드러났다. 제 2위 하느님이신 성자로 하여금 사람이 되도록 하실 만큼 사랑하신다. 창조주가 그 모든 지위를 다 버리고 피조물의 지위로 낮아질 정도로 사랑하신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다 함은 곧 사람이 하느님이 되도록 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당신의 지위로 들어 올리실 정도로 그만큼 사람을 사랑하신다. 더욱이 하느님이신 성자로 하여금 십자가상의 제물이 되어 고난을 당하고 죽으심으로써 사람의 죄를 대신 기워 갚도록 하실 만큼 사랑하신다.

불사불멸의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죽음을 당할 정도로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 - 목숨까지도 바칠 정도로 사랑하신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끝이 없고 변함이 없이 영원하다. 사람이 어떤 죄와 악행을 저질렀다할지라도 하느님은 당신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고, 끝없이 용서하신다.

참 신앙인은 그와 같은 하느님의 끝없이 크신 사랑을 알고 느낀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 그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신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자신을 사랑한다. 나아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다른 이들도 사랑할 줄 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마태 19,19)라는 주님의 계명을 잘 알고 지키는 것이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고린 13,1-3)라고 사도 바울로는 말했다.

사랑, 그것은 하느님을 믿는 참 신앙인의 표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며, 그 사랑을 사는 신앙인이 되자..............◆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 -윤경철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의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현대 과학 문명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여기에 적혀있는 것이 글자 그대로 과연 일어났는가? 하며 당황해 할 지 모릅니다. 기적이 사실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지금 여기서 언급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보다도 이 기적의 이야기를 기록한 복음사가가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기적에 대한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이야기의 핵심은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군중과 제자 그리고 예수님인데, 군중은 전면에 나오지 않습니다. 배불리 먹었던 군중에게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라는 것을 직접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중이 감동을 받았다는 표현도 없습니다. 그러한 기적이 예수님께서 행하셨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알고 있던 사람들은 제자들뿐입니다. 제자들의 행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해가 지는 저녁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외딴 곳까지 따라온 군중을 보고 걱정스러워 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여기는 외딴 곳이니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마을로 보내자"(15)고 건의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군중은 무엇인가에 굶주려 목말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고, 정신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진정한 구원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존경하며 동네에서 외진 곳까지 육로를 따라 온 것입니다.

제자들도 사람들이 지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목자를 잃은 양처럼 사람들이 지쳐있지만, 손을 쓸 수단이 제자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마을로 보내, 그곳에서 음식을 사먹게 하는 일반적인 방법 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해 볼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력한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식적인 수단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한계가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16)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 말씀으로 제자들은 보다 분명히 자신들의 한계와 무력함을 깨닫게 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갖고 있지 않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들의 굶주림, 목말라 하는 갈증, 무거운 짐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었습니다. 지칠대로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빛과 희망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구원이라는 차원에 관해서 제자들이 완전히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노고, 무거운 짐을 메고,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십니다. 제자들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오로지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에게서 사람들을 위한 빛과 힘을 끌어내야만 합니다.

제자들은 일반 군중들과는 다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인격에 이끌려, 예수님께 자신의 인생을 걸고 있습니다. 일반 사람보다도 깊게 예수님의 신비에 가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교육시키시고 역할을 주십니다. 그들에게 특별하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그들에게만 비유를 설명해 주시고, 그들을 특별히 지도하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동네를 다니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낫게 하는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제자들을 당신과 백성들 사이에 내세우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습니다. 실제로 빵도 제자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교회의 지도자들이 될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라 하더라도, 그들은 예수님 없이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들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될 때뿐입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교회의 지도자로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더욱 더 예수님을 신뢰하고 보다 더 예수님의 신비에 다가가 예수님께 빛과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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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페이지 당쇠 2008.01.09 06:02:01
    오늘 굶주린 군중을 보고 접근함에 있어 예수님과 제자 사이의 다름을 보게 되지요. 제자들은 머리로 접근하는데 주님은 마음으로 접근하고, 제자들은 먹이는 것을 해야 일로서 받아들이고 주님은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먹이는 일에 있어 제자들은 자기들, 즉 인간의 능력을 보는데 비해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인간의 능력을 보면 오늘 우리가 마지막 감사 미사를 봉헌한 30년간의 베틀레헴 집은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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