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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야고보 사도 축일-버리는 것도 위대하지만 바치는 것이 더 위대하다

by 김레오나르도 posted Jul 2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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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야고보 사도는 주님께서 마실 잔을

같이 마시겠다고 장담했지만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실 수 없었던 그가 마시게 될 거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이 마시셨던 그 수난의 잔, 피의 잔을 마시는데

어떻게 마실 수 있게 된 것일까요?

그의 어떤 남다른 노력 때문일까요?

 

다른 사도들도 모두 피의 잔을 마셨으니 그런 것은 아닐 거고

사도들이 공통으로 겪은 체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또한 공통으로 겪어야 할 체험이겠지요.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것은 상실과 좌절의 체험이고,

그가 마시고자 했던 축배의 잔을 마실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마실 잔을 너도 마시겠느냐 하셨을 때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생각했던 것은 축배의 잔이었을 겁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 좌우에 앉게 해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예루살렘 입성은 정권의 쟁취를 위한 입성이었던 거지요.

 

그런데 그것이 좌절된 것이고

모든 좌절이 그러하듯 스스로 그리 한 것이 아니라 그리 된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그들의 꿈이 좌절된 것인데

사실은 꿈이 좌절된 것이 아니라 세상 욕망이 좌절된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 대부분의 첫 번째 꿈은 세상에서의 성공입니다.

요즘 어린애들은 영악해서 그런 꿈을 꾸지 않지만

제가 어렸을 때 대부분의 아이들은 대통령, 대장이 꿈이었고,

그 꿈을 얘기할 때 어른들은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렸을 때는 그런 꿈을 꿀 수 있는 배포가 있어야 한다고 흐뭇해했지요.

 

그러므로 수난의 잔을 마실 수 있기 위해서는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그 축배의 꿈이 우선 깨져야 하는데

주님께서 이들에게 주신 첫 은총이 바로 이 상실의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상실과 좌절만으로는 수난의 잔을 마실 수 없습니다.

상실과 좌절은 축배의 잔을 단념케 할 뿐이지

수난의 잔까지 마시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난의 잔을 같이 마시는 것은 사랑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사랑이란

이 세상을 사랑하던 것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랑케 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 것이고,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 나라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소유와 사랑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소유하려 하고, 그래서 이 세상은 소유의 나라이지만

하늘나라는 진복선언의 말씀처럼 영 안에서 가난할 때 소유할 수 있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소유가 아니라 사랑의 나라입니다.

 

사랑의 영,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사랑케 합니다.

전에는 빼앗겼던 것을 이제는 스스로 버리게 합니다.

소유한 것을 버리던 것에서 이제는 자신을 바치게 합니다.

 

버리는 것도 대단하지만 바치는 것이 더 대단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 세상 소유욕도 제자들 중에 제일 강했고,

얼마나 그 욕심이 크던지 제일 먼저 그 욕심을 노출했지만

주님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도 제일 먼저 하였습니다.

 

이런 야고보 사도로부터 위안과 도전을 동시에 받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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