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편지는 요한이 편지를 쓰는 까닭을 얘기하는 앞부분이 있고
편지를 받는 이들에 대한 권고의 뒷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편지를 쓰는 까닭을 얘기하며 오해를 살만한 얘기를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그 안에 머물기 때문에,
악한 자를 이길 만큼 강하기 때문에 편지를 쓴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에는
용서를 받을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용서를 청하라고 편지를 쓰고,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하느님을 깨달아 알라고 편지를 쓰며,
하느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에게 말씀을 들으라고 편지를 쓰고,
악한 자와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도록 강해지라고 편지를 써야지
이미 잘 하고 있는 사람에게 왜 편지를 쓰는지 이해가 잘 안 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저를 위한 하나의 교훈을 얻습니다.
요한은 이 편지에서 지금까지 잘 하였고 잘 하고 있다고 칭찬하면서
그러나 앞으로도 이러저러하라고 권고를 하는데
권고/충고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잘 하고 있다고 인정/칭찬을 해야 한다는.
언젠가 우리 형제 중의 하나가 강론을 하면서
바람직하고 효과적인 격려의 방법론을 소개하였는데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칭찬과 충고의 비율이 4: 1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격려란 칭찬 일변도여서는 안 되고
칭찬과 충고의 비율이 적절해야 하는데 그 적절함이란
칭찬이나 격려 4번에 충고나 나무람 1번이 돼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옛날의 우리 부모들 특히 아버지들은 칭찬에 인색했고,
요즘의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의 기를 살려준다고 하며
적절한 제제와 충고를 하지 않는데 둘 다 그래서는 안 되지요.
아무튼 저는 옛날 세대에 속하고 성격이나 인격적으로 못나서
긍정이나 칭찬에는 인색하고 노상 불만을 표하거나 충고를 해댑니다.
그리고 특히 저희 형제들에 대해서 그러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기분 나쁘실 분이 많겠지만
저희 형제들이 아닌 경우 칭찬이나 긍정적인 표현도 많이 하지 않지만
반대로 충고도 많이 하지 않고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불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저희 형제들의 경우는 수도자라면, 그중에서도
프란치스칸 수도자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기대가 있고,
그러기에 그렇지 못할 경우 불만을 표하거나 충고를 해댑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고 제가 주장하는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기를 기대하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기대에는 욕심의 기대와 사랑의 기대 두 가지가 있는데
저는 자주 그놈의 욕심 때문에 사랑의 기대에 실패하기에
늘 충고하려고 하고 충고가 먹히지 않으면 불만을 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불만이 아닙니다.
불만으로 사는 것이 괴로우니 아예 포기를 하고픈 유혹을 받는 겁니다.
여기서 포기란 물론 욕심의 포기가 아니라 충고도 칭찬도 하지 않으려는,
심지어는 형제를 내 사랑의 대상에서 배제하고픈 유혹이지요.
이런 저에게 요한은 꼭 집어 이렇게 충고를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사람에 대해서건 사물에 대해서건 다 세상 욕심과 욕망에서 나온 것이고,
그런 것은 다 지나가는 거라는 요한의 충고를 오늘 우린 명심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