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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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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12

1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4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5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6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7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9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11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한 자루의 양초로 수많은 초에 불을 붙입니다. 그래도 처음 양초의 빛은 약해지지 않습니다. 무심히 받아들이지만 기적입니다. 자신의 힘을 전적으로 주건만 조금도 없어지지 않는 이 사실이 어찌 기적이 아닐는지요. 초는 초대 교회 때부터 그리스도를 상징해 왔습니다. 지금도 미사 봉헌 때는 촛불을 켭니다. 초는 우리 신앙인에게는 특별한 물건입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러 먼 길을 떠나왔습니다. 오직 별의 인도만을 믿고 기약 없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우리 인생이 하느님을 만나려는 여행이라면,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별의 인도가 꼭 있을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우리의 별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요.
동방 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경배하러 왔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나름대로 예물을 바쳤습니다. 올 한 해, 우리 역시 예물을 바치며 살아야 합니다. 살면서 만나는 그 많은 아픔과 희생을 예물로 봉헌해야 합니다. 무엇이든 주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일 때 예물이 되는 것이지요.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한다고 기도의 힘이 나와 무관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참을 때 그 인내의 은공이 남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자루의 초가 수많은 초에 불을 붙여도 그 힘을 잃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새벽을 열며(빠다킹 신부)

저는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자전거 또는 걷는 것을 주로 합니다. 자동차가 여러 가지 편한 것도 있지만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는 것이 맞지 않는 것 같고, 더군다나 많이 걷고 자전거를 많이 타면 건강에 특히 좋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먼 거리를 갈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거리에서 많이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요.

며칠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 날은 참 추웠습니다. 어디 갈 일이 있었는데 자동차를 이용하기보다 걸어서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지요. 너무 추워서 목을 움츠리며 걷고 있는데 참으로 재미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추운 날씨에도 얇은 옷에 그리고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하긴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옷가게와 액세서리 용품점들을 보면서 스스로 꾸며야겠다는 마음도 들겠지만, 자기를 이렇게 혹사시키면서까지 아름답게 보이고 싶을까 싶네요.

그러나 진정으로 아름다워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겉모습일까요? 아니면 속마음일까요? 스스로는 속마음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대다수가 겉모습을 가지고 쉽게 판단하고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겉모습이 참으로 진실일까요?

어떤 분이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예쁘고 멋진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네요.

“속지말자, 조명발. 다시보자, 화장발.”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로 예수님의 탄생이 지닌 공적인 의미를 확인하고, 구세주 예수님이 곧 만민의 주님이란 사실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날이지요. 그래서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는 그 순간에 성모님과 요셉 성인을 제외하고는 유다인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목동들과 이교도들의 대표 격인 동방의 박사들뿐이었습니다.

사실 동방박사들이 헤로데 임금을 찾아갔을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통해서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렇다면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왜 경배하러 가지 않았을까요? 그들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메시아가 분명한데 말입니다. 더군다나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는 11Km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할 때, 경배하러 가지 않은 것은 좀처럼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는 헤로데왕의 정치적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의 힘보다도 보이는 외적인 폭력을 더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의 박사들은 어떤가요? 그들은 헤로데로부터 아기를 찾으면 가르쳐달라는 약속을 어기지요. 왜냐하면 왕의 부탁보다는 꿈에 나타난 하느님의 지시를 더욱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들로 인해서, 선택된 민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는 영광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요?

겉으로 보이는 세상을 쫓으며 그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돈, 명예, 쾌락을 제일의 가치로 내세우면서,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뭐. 내가 뭐 성인군자도 아닌데 그렇게 어떻게 살아?’ 바로 이러한 타협들로 인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의 외적인 부분을 더욱 더 중요하게 여기는 헤로데와 종교지도자들이 아닌, 하느님의 지시를 더욱 더 중요하게 여기는 동방의 박사들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함께 가는 여정(이중섭 신부)

동방박사 세 사람은 제각각 길을 가지 않고 서로 힘을 북돋우며 긴 여정을 함께 갔습니다. 혼자서 길을 갔던 넷째 왕의 전설도 있습니다. 그 전설에 따르면 넷째 왕은 천신만고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간신히 만났습니다. 우리는 혼자서 예수 그리스도께 도달하지 못합니다. 좋든 싫든 함께할 동반자와 도반(道伴),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서로 묻고 의지하며 하느님을 향한 여정을 가야 합니다. 가정 공동체, 본당 공동체, 수도회와 교구라는 공동체가 그래서 필요합니다.
그러나 함께 가는 여정은 쉽지 않습니다. 함께 살다보면 형제 자매의 장점보다 단점이, 잘못과 허물이 더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일하지만 마음과 마음이 한없이 멀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찌 보면 나와 이웃 사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늘과 땅의 차이를 넘어서려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공동체의 형제 자매들에게 실망하여 주저앉게 됩니다.
그들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려 노력하고, 형제자매를 통하여 주님을 찾으려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함께 가는 여정도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이 서로 의지하며 함께 길을 가서 결국 그리스도를 만났듯이,우리도 이웃과 형제 자매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공동체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도록 노력합시다. 그들이 나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별임을 잊지 맙시다.


동방 박사들의 방문(배광하 신부)

모든 민족들에게

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며 시인을 꿈꾸다 핍박받는 민중의 아픔을 보며 혁명의 투사가 되어 짧은 삶을 마감한 ‘체 게바라(1928~1967)’라는 전설적인 혁명가는 1964년 자신의 편지에 이 같은 글을 남깁니다.

“만일 당신이 이 세상에서 불의가 저질러질 때마다 분노로 떨 수 있다면 우리는 동지입니다. 이 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체 게바라는 자신의 조국에서 활동하지 않습니다. 고통 받는 제3세계에서 활동하다 결국 타국에서 39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는 폭력을 미화하거나 두둔하기 위함이 아니라, 전 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인 체 게바라의 진솔한 삶, 그리고 지칠 줄 몰랐던 열정, 그 무엇보다도 자국의 이익에 사로잡힌 편협된 국가관,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보편적 세계 시민 사상 속에 살았던 모습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부끄러운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도록 하기 때문에, 주님공현 대축일인 오늘 그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주님공현 대축일은, 아기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당신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을 경축하는 축일입니다. 그냥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적 편협된 구원관이 아닌 온 세상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사명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자기들만의 축제, 잔치, 구원이 아닌, 모두를 위한 구원의 축제를 열자고 당신을 세상에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자면 먼저 그리스도 아기 예수님께서 보이신 낮춤, 가난이 함께 해야 함을 구유의 예수님께서는 가르치고 계십니다.

낮춤은 가난한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가난은 백성과 함께 살아야 함을 말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소위 백성의 참된 지도자였던 사람들이나, 성인 성녀들, 시대를 이끈 선각자들은 겸손과 가난을 온 몸으로 살았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체 게바라의 글처럼 이 세상에 평등과 평화를 위협하는 권력의 불의가 저질러질 때에는 분노로 몸을 떨었던 분들이셨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신약의 예수님께서도 그냥 계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특정 계층의 기득권과 그에 따른 백성들의 일방적인 착취나 억압된 삶에 떨며 일어나셨던 분들이셨습니다.

우리는 이분들을 지도자, 선각자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공현축일을 맞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보편 신앙을 살아야 할 것을 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오늘 화답송에서 시편 저자는 장차 오시게 될 새 임금님, 메시아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참된 정의와 평화를 꿈꾸며 그 세상이 영원하기를 소망합니다.

“그의 시대에 정의가, 큰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게 하소서”(시편 72, 7~8).

예수님께서는 결코 이스라엘에 국한되시는, 2천 년 전이라는 시간에 제한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서는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평화와 참된 정의를 베푸실 분이십니다. 그것이 당신을 세상 모든 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공현의 참된 의미입니다.

영원한 평화와 참된 정의를 꿈꾸며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던 구약의 가난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으로 이 나라를 이끌 새 대통령, 평화와 정의로 대한민국을 이끌 지도자를 기다린 우리들이 주님공현 축일에 또다시 묵상하고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삶입니다.

우선 편협된 개인주의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나라, 내 고장, 내 가정만을 생각해서는 공현을 사는 것이 아니며, 그 같은 편협된 생각으로는 결코 평화와 정의가 꽃필 수 없습니다. 세상은 이제 세계가 한 가족으로 살아야 합니다.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만백성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처럼, 세대와 세대간, 진보와 보수간(시간)의 화합과 포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역과 지역 간(공간) 차별과 반목이 있어서는 안되며, 그 반목과 미움을 깨뜨릴 수 있어야 합니다. 참된 지도자란 분명 그렇게 살아야 하며 백성을 그렇게 이끌어야 합니다. 특별히 공현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을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이 깨어질 때, 우리는 분연히 떨며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오늘 바오로 사도는 모두 주님의 사랑받는 구원의 백성임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에페 3, 6)...........◆


만인의 구원자로 드러난 아기 예수(이기양 신부)

오늘은 예수님의 성가정에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 오셨습니다. 멜키올, 발타살, 가스팔로 불리는 동방박사들입니다. 동방박사들은 하늘에 나타난 큰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 드리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오늘을 '주님 공현(公顯) 대축일'이라 부르는데 공현이란 '나타나다'는 뜻으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님께서 유다인을 넘어 온 세상의 구세주로 드러나심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성탄의 기쁨이 유다인에 국한되었다면 공현은 예수님께서 만민의 구세주로 드러난 의미 깊은 날이므로 어쩌면 우리에게 더 큰 축일인지도 모릅니다.

메시아의 탄생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지만 가장 박대한 사람을 꼽으라면 헤로데 왕이요, 정성된 준비로 잘 맞이한 사람으로는 동방박사를 지목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헤로데 왕은 70살이 다 된 나이 많은 임금이었으며 경륜과 지혜가 부족하여 사방에서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유다인들이 왕에 도전하면서 반기를 들었고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신축하는 등 노력했지만 왕권은 마음먹은 대로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헤로데 임금은 예민해져갔지요. 그 즈음에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하고 물었으니 헤로데 임금으로서는 기절초풍할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마태 2,3).

오늘 복음이 그때의 놀라움을 잘 전해줍니다. 불안에 떨던 헤로데 임금은 수석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아놓고 그리스도께서 나실 곳이 어디인지를 찾게 하고 관심을 표명하는 척하지만 결국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이와는 반대로 동방박사들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하늘의 뜻을 살피다가 때가 되어 베들레헴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고대했던 대로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 예수님을 보고 기쁨에 넘쳐 엎드려 경배하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봉헌합니다. 구세주를 만나 뵌 이들은 벅찬 감동을 간직한 채 자기들 나라로 돌아갑니다.

똑같이 메시아의 탄생을 알고 있었지만 결국 수천 년 기다려온 구세주 메시아를 만나 뵌 사람은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예수님과 가까이에 있어도 관심이 다른 곳에 있으면 만날 수도 없고 예물을 드릴 수도 없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찬미와 감사의 예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신 아기 예수님께 어떤 예물을 드릴 수 있을까요?

샌디에고의 한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온 몸이 마비된 윌리엄 마틴이라는 환자가 입원을 했습니다. 아침마다 찾아오는 고통 속에서 그는 몸을 뒤척이지도 못하고 땀을 닦지도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극도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 많은 양의 약을 먹어야 했는데 약의 부작용으로 눈물샘마저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돌보는 간호사들조차도 그의 힘겨운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외면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안타까움에 외면하는 간호사를 보며 마틴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슴을 파고드는 고통을 참기는 어렵지만 나는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고통은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어려움은 있습니다. 남보다 내 남편이 무능하다거나, 내 아내가 살림을 소홀히 한다거나, 남의 자녀는 다 잘하는데 내 자녀는 형편없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정은 생지옥이 되지요. 이렇게 남과 비교해 잘못된 것만을 찾아 낸다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지금까지의 삶에 만족하고 감사를 드리다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주변에 얼마나 감사할 일이 많은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가족은 그 존재 자체로도 감사의 근원이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삶이 바뀌지요.

오늘 오신 주님께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고통을 예물로 봉헌하는 삶을 살기를 결심하면 어떨까요?.......◆


하느님의 선물(김영수 신부)

사제품을 받고 첫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생활할 때 일입니다. 성탄절을 분주하게 지내고난 어느 겨울 날, 월요일 새벽미사를 드리려고 천근만근한 몸을 겨우 일으키는데 내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직도 미사를 시작하려면 30분이나 남았는데 꼭두새벽에 방문을 두드리는 손님이 짜증났지만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곳에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한분이 서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주위를 두리번거리시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 내셔서 제 손에 꼭 쥐어 주시며 “아무한테도 주지 마시고 신부님이 꼭 잡수셔야 돼요.”하시고는 서둘러 성당으로 발길을 향하셨습니다. 뜻밖의 선물을 받아든 나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내 손에 쥐어주신 선물을 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신문지로 겹겹이 쌓여 아직도 온기가 느껴지는 쌍화탕 한 병과 초코파이 두 개였습니다. 추운 겨울 새벽 쌍화탕이 식을까봐 품속에 쌍화탕 병을 안고 눈길을 오셨을 할머니의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그날 미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와 초코파이와 쌍화탕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하며 할머니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사랑을 먹고 마시는 듯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선물을 받는 기쁨은 크지만 주는 기쁨도 큰 것입니다. 선물에는 받는 사람을 향한 마음이 담겨져 있으며 선물은 주고받는 사람의 관계를 드러내주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소중한 사람일수록 선물에 담은 마음이 정성스럽고 극진합니다. 아름다운 선물은 값비싼 물건이나 화려한 포장이 아니라 선물 안에 담긴 정성과 사랑입니다. 작은 것이지만 사랑을 담고 있는 선물은 그 선물을 주는 사람에게나 받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감동을 주고 기쁨을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귀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우리에게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선물입니다. 가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시는 표징입니다. 그 선물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그 선물을 받고 기뻐합니다. 이방인이었던 동방 박사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선물을 알아보고 그 선물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하느님의 선물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의 선물을 거부하고 그 선물을 내동댕이치고 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마저도 흔적 없이 해치우고자 하는 헤로데의 모습은 다른 생명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이루어 내고자하는 ‘죽음의 문화’ 속에 드리워진 그림자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서슴치 않는 세상이 만들어낸 죽음의 문화는 하느님의 선물을 거부하고 내 팽개쳐 버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보여 줍니다. 헤로데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 선물이 얼마나 위대한 선물인지를 모른 채 술렁댑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참된 가치 앞에서 술렁거리며 당황하게 마련입니다.

주님 공현 축일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선물을 세상에 여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선물 안에 담긴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다인들과 함께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에페 3, 6)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선물은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 안에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가족들 안에, 함께 사는 이웃들 안에,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안에 계십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의 인도를 따라 예수님을 만났듯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내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내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내 용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하느님의 선물에로 인도하는 표징입니다. 비록 시간을 내야하고, 희생과 인내를 필요로 하고, 기다리고 함께해주는 일이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내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향한 시선을 멈추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예물로 봉헌합니다. 금과 같이 고귀하고 변치 않는 신념, 유향처럼 피어오르는 거룩한 삶,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진리를 증언하는 진실한 사랑을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예물로 봉헌함으로써 그분의 축복을 온 세상에 전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향해 떠나자(서공석 신부)

성탄 축일에 우리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사실을 기념하였습니다. 태어난 아기는 자라서 하느님에 대해 또 우리의 구원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공현 축일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그 생명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념합니다.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오늘의 이야기는 일어난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보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왔다는 오늘의 이야기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예수님이었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거부하였고, 이교도들이 먼 이역에서 찾아 와 그분을 영접하고 경배하였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실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활동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분의 죽음 후 그분의 가르침은 이방인들에게 실제로 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해 뜨는 동방에서 왔다는 박사라는 사람들을 등장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몇 명이며 무엇 하는 사람들인지, 베들레헴을 다녀서 어디로 갔는지, 후에 신앙인이 되었는지, 어느 것 하나도 복음서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잠시 무대에 나타났다가 그들의 배역이 끝나자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세 명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복음서에 예물이 셋으로 되어 있어서, 기원 후 500 년경부터 전래된 전설입니다.

그들이 나타나자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헤로데 왕이고,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부터 놀라고 그분에 대해 적의를 품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 헤로데 왕은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 달라는 음흉한 주문을 하면서 그 박사들을 베틀레헴으로 보내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나 결국 아기를 찾아 경배하였습니다. 말씀을 찾아 자기 길을 꾸준히 가는 사람은 말씀을 만난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모두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태어나고 철이 들면서부터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든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기도 하고, 환상을 좇기도 하면서 갑니다. 돈을 좇아, 권력을 좇아, 때로는 비굴하기도 하고, 거짓을 말하기도 하며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 잘났다고 착각하기도 하고, 이웃을 미워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고 마는 한 송이의 꽃과 같이 길지도 않은 인생길을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우리의 생명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인간의 모상을 빚어놓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시자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삶은 하느님의 숨결, 곧 하느님의 생명과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그 숨결이 살아 있으면, 우리는 허무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흙으로 돌아간다...먼지로 돌아간다.”(3,19)는 말로 그 허무를 표현하였습니다. 하느님 없이 우리 삶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제 멋대로, 자기중심적으로 살도록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을 자기 안에 살려서 살아야 하는 인생입니다.

오늘 베들레헴을 향해 길을 떠난 박사들의 이야기는 말씀을 찾아 나선 신앙인들의 행보를 말해 줍니다. 그들은 구원의 말씀을 찾아 별을 보고 떠났습니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별 하나입니다. 흔하디흔한 별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정든 그들 삶의 온상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아브람이 자기 고향을 버리고 길을 떠났듯이 그들도 떠났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편안함이 그립기도 하였고, 회의에 빠져 마음이 어둡기만 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헤로데 왕에게 가서 길을 묻기도 하고, 그의 간교한 주문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간교함이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 그들의 정성을 바치고 우리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성서는 그들에 대해 다시는 말하지 않고,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알아볼 길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끝내고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찾는 마음이 있고, 길을 떠나는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길을 떠나는 것은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며 안주하였던 온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재물이 제공하는 온상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습니다. 위대하고 화려한 것만 찾는 시선에 말씀의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말씀은 초라한 구유에 사람이 되어 누워 계십니다.

“이 지극히 작은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복음서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찾는 우리가 시선과 마음을 주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말입니다. 초라한 현실과 고통당하는 약자들의 모습을 외면하면, 말씀에로 인도하는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현실과 그런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있을 때, 별은 보이고 말씀은 들립니다. 그런 마음에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 계십니다.

별은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욕심의 구름이 걷히면, 하느님 말씀의 별은 보입니다. 초라한 현실들과 고통스런 약자의 모습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을 향해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말씀의 별은 빛을 발할 것입니다. 헤로데와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과 같이, 오늘의 통치자와 종교 지도자들의 엉뚱하고 때때로 간교한 생각도, 말씀을 찾아가는 우리의 발길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 말씀의 별을 보고 그것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은 숨결로 살아 계십니다.

말씀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갇혀서 사는 이기심의 따뜻한 온상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죄도, 우리가 받은 상처도 모두 잊어버리고 가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가지고 우리와 시비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을 향해 길을 떠나면, 별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줄 때, 하느님은 우리의 별이 되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런 실천들의 원천이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없이도 잘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도 무방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그런 삶 안에 ‘흙과 먼지’의 허무를 보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숨결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시게 사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것을 향해 우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은 우리를 인도하며 함께 계십니다................◆


빛이 되는 삶을 위하여(이용훈 주교)

2008년 무자년 쥐띠 해가 밝았습니다. 시간이 멈춤 없이 지속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어제와 오늘은 별로 다를 바 없고, 지난해와 올해도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춘하추동 사계절이 차례대로 지나가 한 바퀴를 돌아왔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개개인에게 있어, 세상에서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을 가늠하는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영원히 이 땅에 머물지 못할 운명을 지닌 인간에게 한해를 보내고 다시 한해를 맞이한다는 것은 매우 경이로운 일입니다.

하느님안에서만 삶의 이치와 영원한 삶의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시간의 오묘한 흐름에서 드러납니다. 지난해 수없이 반복하였던 나태와 흠결의 삶과 주님 대전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처신하지 못했던 모습을 털어버리고, 새해에는 열린 마음으로 더욱 가족과 이웃 형제를 사랑하며 주님께만 시선을 집중하는 주님의 자녀로 살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인간으로 탄생하신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동방의 삼왕으로부터 조배를 받으시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참 빛이신 아기 예수님께 우리도 가장 좋은 선물을 챙겨들고 아낌없이 봉헌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과연 빛이란 무엇입니까?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낮과 밤, 빛과 어둠은 우리가 매우 가깝게 체험하는 일상 중의 하나입니다. 빛의 고마움과 놀라운 힘은 일상생활 속에서 늘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빛은 진선미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선행과 인간다운 행위도 흔히 빛으로 표현합니다. 진리와 선이 제 자리를 잡지 못하면 세상은 유지되지 못하고 한순간에 파괴됩니다. 태양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사는 인간은 참 빛이신 주님의 뜻과 섭리를 따라 살아야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삶이 보장됩니다. 자신을 낳고 길러준 부모의 은덕을 저버리고 홀로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인양 살아가며 온갖 오만과 교만 속에 살아가는 사람을 어떻게 건전한 상식과 예의를 갖춘 인격자라고 칭할 수 있겠습니까? 자식이 부모의 존재를 부인해도 부모는 자녀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예외 없이 하느님의 가르치심을 삶의 근본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절체절명의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병고, 가난, 태어남과 죽음 등 어느 한 가지도 우리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인간에게 세상에서는 행복하고 안락한 삶을 허락하시고, 저승에서는 영원한 삶으로 초대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허영과 교만으로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고통과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쌍히 보시어 당신의 독생성자 예수님을 인류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참 빛을 모시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참 빛이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한 해가 되도록 겸손되이 주님의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낸 사건(유영봉 몬시뇰)

초 점: 공현(公顯,Epiphania)이란 '표현', '드러내 보임'을 뜻한다. 동방박사의 방문, 주님 세례, 가나의 첫 기적 등은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그 정체를 드러내 보이는 사건들이다. 구원의 역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땅 끝까지 전하므로 그분을 알고 그분의 구원을 체험하도록 하는 공현의 역사이다.

1.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낸 사건

오늘은 동방의 이방인 현자(박사)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고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께 예물을 드린 것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그러기에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의미가 큰 축일이다. 공현(公顯,Epiphania)란 '공적으로 들러남', '나타내 보임'을 뜻한다. 동방박사들의 방문, 요르단 강에서의 예수님 세례, '가나'에서의 첫 기적 등은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가 구약의 여러 예언자들이 오래 전부터 예언하였던 그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사건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엔 야훼 하느님이 자기들만의 하느님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차츰 후대로 내려오면서 야훼 하느님이 자기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유배생활을 통해 이러한 자각은 더욱 분명해졌다. 오늘 제1독서의 제3 이사야는 유배 후에 올 구원과 해방을 이야기 한다. "모든 민족들이 너희의 빛을 보고 모여들며, 제왕들이 솟아오르는 너의 광채에 끌려오는구나 머리를 들고 사방을 둘러보아라. 모두 너에게 몰려오고 있지 않느냐?"(이사60,3) 이 말씀엔 벌써 보편주의(普遍主義) 사상이 깃들어 있다.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들의 빛이 될 것이며 이방인들이 야훼 하느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될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제2독서의 말씀은 더욱 분명하다.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심오한 계획이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에페3,6)

2. 구원의 역사는 바로 공현의 역사이다

오늘의 복음은 이방인 현자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그분께 예물을 드리며 조배함으로써 예수님이 만민의 주님으로 드러나는 제1독서의 말씀이 실현되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동방의 현자들은 '별을 보고 점을 치는' 그들 나름의 점성술이라는 지혜의 빛을 따라 예루살렘에까지 당도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열어 보이시며 만나도록 해 주신다. 우리 한민족도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진리를 목말라 하던 중에 스스로 구원의 진리를 찾았고 하느님의 교회를 알게 되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복음서는 1000개가 훨씬 넘는 언어로 번역되었다 고한다. 2천여 년 전에 멀리 이스라엘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한 구원의 기쁜 소식은 "그 소리 온 땅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하는 신앙 공동체를 확장해 가고 있다. 오늘 동방의 현자들이 예수를 메시아 왕으로 조배하며 예물을 드림으로 예수님은 이방인들에게 처음으로 구세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렇게 구원의 역사는 바로 주님 공현이 계속되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3. 복음 전파로 공현의 완성해 참여해야 한다

세상의 복음화로 모든 이가 예수를 구세주로 받들게 하는 것, 그리하여 세상이 그리스도를 통해 안으로부터 새로워지도록 하는 것, 이것이 교회의 근본 사명이다. '복음전파'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唯一)한 이유이다.

나는 어떻게 하느님을 알게 되었으며 교회에 인도되었는가?

먼저 하느님을 만난 사람이 나를 그분께 인도해 주었던 것이다. 복음은 '먼저 깨달은 사람이 그것을 다시 전해주는 과정'을 통해 2천년 동안 전해져 우리에게까지 온 것이다. 모든 신자들은 이웃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별빛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이웃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가장 확실한 빛이 되는 길은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의 사랑을 살고 예수의 겸손과 희생을 사는 데 있다. 말하자면 '예수 살이'를 해야한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십자가 따르는 일이다. 우리 주변의 뜻 있는 분들은 "교회와 성당은 수없이 많은데 예수는 보이지 않는다."고 개탄한다. 우리가 또 다른 예수, 작은 예수가 되지 못한 탓이다.

내가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지금의 나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나를 주님께 인도해 준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자. 그리고 나 자신도 이웃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선교를 통해 주님을 온 세상에 드러내며 공현을 완성하는데 앞장서도록 하자.


구원의 빛(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동방에서 온 세 박사에게 자신을 처음으로 드러내어 세상에 당신의 존재를 공개한 날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유다인 출신의 그리스도교 신자 공동체를 위하여 복음을 썼습니다. 그는 당시의 신앙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 신앙 교육을 위해 복음서를 서술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복음서는 모든 신자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특히 유다인 출신 신자들이 유다교 신앙의 맥락 안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즉, 당시의 독자들이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아이며 다윗의 후손인 왕으로서 인정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복음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은 유다인의 민족 역사인 구약성서를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는 유다인이 고대하던 메시아를 인식한 전 세계 이방인의 첫 대표자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의 공현 대축일은 모든 인류가 처음으로 ‘하느님 백성’으로 하나가 된 기념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동방의 세 박사는 별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은 우리도 항상 별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별이 때로는 하느님의 말씀이기도 하고, 때론 부모님일 수도 있고, 때론 어떤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온 땅이 아직 어둠에 덮여,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는데, 주님께서 너만은 비추신다”(이사 60,1-2)라고 예수님의 탄생과 어둠 속에 살고 있는 민족에게 구원의 빛을 예언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도 그리스도의 또 다른 별이 되어 세상을 비추는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주님의 빛을 받아서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별이 되어야 합니다. 별은 주위가 어둡고 깜깜할수록 더욱 빛이 납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신앙인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주님 공현 대축일’의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루하루의 새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다시 한 번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고, 일년 내내 여러분 모두 영육간에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강지숙,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하늘에서 특별한 별 하나를 발견한 동방의 점성가들이 길을 나섭니다. 진정한 임금이 태어나셨으니 하늘에 징조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들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유다의 도읍에 임금이 태어나셨을 것이라 짐작하여, 예루살렘에 와서 그분을 수소문합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2절) 그러나 동방 박사들의 방문에 헤로데 임금과 온 예루살렘은 깜짝 놀랍니다(3절). 먼 길을 마다 않고 선물까지 준비하여 알현을 온 이방인 동방 박사들과, 그토록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 왔으면서 정작 메시아의 탄생에 금시초문인 유다인들의 반응이 어이없는 대조를 이룹니다. 탄생 소식을 반가워하기는커녕 전혀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입니다.

헤로데는 대왕이라는 칭호가 따라 붙을 만큼 권세를 누렸지만 정당한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로마의 권력에 의지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꼭두각시 임금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래서 친아들마저 의심하고 죽일 정도로 늘 불안에 휩싸여 있었는데, 난데없이 동방의 현인이 찾아와 대뜸 새로 나신 유다인들의 임금을 경배하겠다니요. 새로운 임금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늙은 왕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급기야 헤로데는 무고한 어린이들을 희생시키는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맙니다(16절 이하).
폭군 헤로데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온 예루살렘’이 경악할 것까지야 없었을 텐데요. 그 당시 예루살렘은, 외세의 침략과 나라 잃은 슬픔에서 유다인들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지켜주던 예전의 그 당당한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또한 헤로데와 한통속으로, 헤로데 편에서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특권층 사람들의 아지트가 되어버렸습니다. 헤로데에게 불려온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도(4­-6절) 메시아의 탄생 소식에는 침묵합니다. 동방 박사들의 출현으로 한바탕 유다 전체가 들썩였을 텐데 먼 길을 찾아온 이방 손님들만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는 걸 보면(11절), ‘온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탄생을 환영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탄생부터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갈라집니다. 그분의 탄생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사람들과 그분을 환영하고 예배하는 사람들. 예수님은 공생활 내내 이런 배척과 환대의 변덕스런 무리 속에서 지내셔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임금의 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먼 곳에서도 알아보고 찾아온 별이 지척에 사는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별을 가렸을까요? 서울에서도 별을 볼 수 없게 된 지 오래이지만, 그 시절 예루살렘에서도 인간들의 부조리와 탐욕이 하늘의 별을 가렸나 봅니다. 아! 그래서 예수님이 별 볼 일 없는 예루살렘을 마다하시고, 별들이 총총한 시골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나 봅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6절; 미카 5,1) 베들레헴은 내세울 것 없는 곳이지만, 정의로운 임금 다윗이 태어난 고을입니다. 구원은 이렇게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아니라 초라하고 이름 없는 마을 베들레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권력자 헤로데는 동방 박사들을 몰래 불러들여 아기를 찾거든 알려 달라고 부탁합니다(7­-8절). 아예 아기일 때 싹을 잘라 이제 막 새롭게 태동하려는 희망의 역사를 꺾어버리려는 심산에서입니다. 동방 박사들의 의로운 뜻을 비겁하게도 악한 계획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진정한 임금의 오심을 알리는 ‘별’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고향에서부터 쫓아온 별이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을 때, 그들은 더없이 기뻐하였습니다(9­-10절). 예수님의 첫 손님들은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 앞에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경배합니다(11ㄱ절). 마태오 복음사가는 ‘땅에 엎드린다.’는 표현을 오로지 예수께만 연관지어 사용합니다. 최고의 예배를 받으실 분은 오로지 예수님뿐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들은 또한 고향에서 들고 온 진귀한 보물을 예물로 내놓습니다. 충성과 순종의 뜻으로 바친 그들의 세 가지 예물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11ㄴ절). 교부들의 해석에 따르면 황금은 예수님이 진정한 임금이심을, 유향은 아기의 신성을, 몰약은 그분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황금·유향·몰약은 이스라엘의 메시아뿐 아니라 온 세상의 구원자이신 분께 바칠 합당한 예물인 것입니다. 동방에서 온 이방인들은 이처럼 궁벽한 시골 마을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최고의 충성과 순종의 예를 갖추어 경배하였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그들의 선물을 사양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방인 손님들의 정중한 인사도 묵묵히 받으셨습니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시듯, 온 세상 누구에게나 구원의 약속이 활짝 열려 있음을 선포하시듯 말입니다. 헤로데에게 들르지 말라는 소임까지 완수한 동방 박사 일행은 자신들의 순례 여정을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12절). 하늘의 징조를 알아본 현인으로서 줄곧 한 별을 쫓아 세상을 떠돌다가, 진정한 임금을 만나 알현하고 돌아서는 그들의 뒷모습이 많은 여운을 남깁니다. 첫 손님들한테서 두고두고 배워야겠습니다. 큰 희생을 치를 예수님의 출생을 부담스러워한 적은 없는지, 구원이 시작될 우리의 베들레헴은 어디인지, 기꺼이 바칠 최고의 예물은 무엇인지, 도대체 별을 쫓고 있기나 하는지….
이사야 예언자가 하늘을 가리키며 외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이사 60,1)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의 감동> -양승국신부-

한 형제의 강론이 오늘따라 유난히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별이 유난히도 별이 밝다’라는 표현들을 씁니다. 별이 유난히 밝게 보이는 곳이 어딥니까? 도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바닷가나 산속입니다. 산자락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그야말로 별이 쏟아져 내릴 것만 하늘입니다.

도심에서 올려다보는 하늘과 바닷가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왜 그리도 차이가 날까요? 시골의 하늘은 도심의 하늘보다 별들의 수효가 더 많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심이건 시골이건 별의 숫자와 밝기는 동일합니다. 도심의 밤은 전깃불로 밝혀져 있는 화려한 밤이기에 별들의 수효가 적게 보입니다. 바닷가의 밤은 아무런 빛이 없는 어두운 밤이기에 별들의 수효가 많아 보입니다.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아름다운 밤을 느끼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전깃불이 없는 어두운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찬란한 별이자, 구세주 하느님을 뵙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휘황찬란한 곳, 화려한 곳이 아니라 소박하고 가난한 곳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주변 빛이 화려한 예루살렘에서는 사람들이 구세주의 별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늘 별빛을 예의주시하면서 어둡고 한적한 곳으로 내려간 동방박사들이었기에 구세주의 별빛을 늘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서도 희망을 상징하는 구원의 별이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인도합니다. 그러나 그 별은 우리가 화려한 불빛 속에 머무를 때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싶다면, 정녕 구세주 하느님을 뵙고 싶다면 화려한 불빛을 떠나서 고요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난함을 선택해야 합니다.

휘황찬란한 샹드리에가 드리워진 화려한 연회 홀에서 멋진 음악을 들으면서 식사를 하는 사람은 결코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의 감동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별빛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기 위해 좀 더 내려가고, 좀 더 비우고, 좀 더 겸손해지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아기 예수님의 구유 바로 그 옆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성탄은 빛의 축제입니다. 당연히 기쁨과 환희의 축제입니다. 그러나 그 빛, 기쁨, 환희는 영혼을 위한 것이지 단지 우리의 육체적인 기분을 흥겹게 하기 위한 것이 절대 아닌 것입니다. 일 년에 단 한번 휘황찬란하게 잘 꾸며진 구유 앞에 무릎 꿇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성탄절이 주는 외적인 매력에 휩싸이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이제 성탄의 기쁨을 우리 마음 깊이 간직하고, 또 다시 골고타 언덕이란 신앙의 정점을 향해,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란 우리 인생의 최종의미를 향해 다시금 먼 길을 떠날 순간입니다.

언제까지나, 한없이 구유 앞에서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제 구세주를 뵌 기쁨을 가슴에 담고 또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 공현’은 우리에게 또 다른 떠남을 요구합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앙증맞은 작은 두 손을 벌리고 우리의 선물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구세주 하느님께 드릴 선물 중에 가장 좋은 선물은 어떤 것일까요?

세속적인 모든 재물에서 벗어난 깨끗한 마음의 순수한 황금, 예수님의 삶과 고난에 참여하기 위한 대가로 지불하게 될 이 세상의 모든 행복에 대한 포기로서의 몰약,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위로 향해 곧게 솟아오르는 의지의 유황...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순수한 마음으로 바치는 사랑의 헌신보다 그분 마음에 드는 봉헌은 다시 또 없습니다. 순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우리 가운데 매일 태어나시는 구세주 하느님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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