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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나누기

사순 제5주간 화요일

by 김명겸요한 posted Apr 0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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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니코데모가 한 대화를
떠오르게 합니다.
요한 3장 1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을
살려주기 위한 것처럼,
사람의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3장 15절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들어 올린다는 것의 첫 번째 의미는
십자가에 매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행동을 통해
당신이 누구이신지 드러내셨습니다.
병자를 치유하고 빵을 많게 한 표징을 통해서,
그리고 여러 가지 가르침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네들의 판단 기준에 따라,
계명을 어기는 사람,
하느님을 모독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계명을 어긴 죄인이기에,
더욱이 하느님을 모독했기에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죽음은
이사야서가 이야기 하듯이
예수에게 치욕적인 죽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벌거 벗겨진 채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죄인의 명패에 빌라도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씁니다.
즉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치욕적인 죽음이 아니라,
예수가 임금이라고 선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삶이 편안할 때 하느님을 찾고,
기쁘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막상 삶이 편안할 때는
하느님을 잊고 지내기 쉽습니다.
때로는 마음 한 편에
하느님이 자리잡고 계시지만,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급하다 보니
하느님과의 만남에 시간을 내지 못합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고통을 겪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내가 하느님을 떠나갔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벌을 주셔서
고통이 찾아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벌을 주시기 위해서
고통을 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을 통해서 당신께로 부르시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아니 매 순간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지만,
우리가 고통의 상황 속에 있을 때,
그 부르심을 더 확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인간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낄 때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편안할 때, 조금은 쉽게 하느님께 다가오면
더 좋을 것 같은데,
고통의 상황에서 하느님께 다가오는 것,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통의 상황에서
십자가의 고통으로 아파하는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나도 힘들도 예수도 힘들고,
나도 아프고 예수도 아파합니다.
아파하는 예수이 모습이
무능력하게 보이기도 하고,
나의 고통을 없애 주지 못하는 신은
더 무능력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의 고통 속에서 나와 함께 울고,
나와 함께 아파하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고통 만이 아니라 영광을 의미하는 것처럼,
이미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영광에
참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고통 중에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그 길을 걷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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