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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12일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

by 고도미니코 posted Jan 1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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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
2022년 1월 12일 수요일

✝️ ☨교부들의 말씀 묵상☨ ✝️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 1,35)

기도 습관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되 헛되이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 없이도 거뜬히 이루어 내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기도로써 청하신 바를 얻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마르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마르 1,35).
루카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1,1).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였다”(루카 6,12).
요한도 그분의 기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l).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2).
주님의 이러한 말씀은, 늘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는 늘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오리게네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
말씀의 불꽃(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 관한 이야기 / 프랑스와 까생제나-트레베디
성경 용어 색인
그렇다면 우리의 거룩한 독서가 맥없이 기진맥진해지고 실패로 끝나는 것은 다름아니라, 미드라쉬의 내적 스승이신 성령께 유순히 응해드리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모종의 소심함, 신뢰의 결핍, 자유의 결핍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독서가 꽃피고 열매 맺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우리 안에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지 않은가? 성령의 선물은 세례성사를 통해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닌가? 사실이 그럴진대, 성령께 완전히 열려서 복종하는 가운데 우리 속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는 능력과 자원들을 끄집어내고 도와 주시는 살아 있는 기억이신 분, 곧 성령께서 어떻게 움직이시는지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60)

✝️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1월 영적 수련 성월 2주간 용서/화해☨ ✝️
금주간 성서읽기 요한 5-7장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1부 고대 그리스도교
제 2기 : 312-60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부터 그레고리오 대교황까지
제 2절; 교의논쟁과 동방에서의 공의회들
서구의 신학 - 아우구스티노 및 의화논쟁과 은총논쟁
아우구스티노:
이러한 상황에서 아우구스티노는 “억지로라도 데려와라”는 “혹독한 말의 정당성”을 승인하였다. 사량을 법이나 권력 사용에 종속시킬 경우 또는 권력을 사랑에 종속시킬 경우, 어느 것이 과연 진리에 더 잘 봉사하게 되는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쓰라린 경험에서, 신앙문제에 있어서 권력의 행사를 성서적으로 정당화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큰 잔치의 비유에서, 초대받은 사람들이 잔치에 오기를 거부하자 집주인은 종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하였다. “행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Compelle intrare 내 집을
채우도록 하여라”(루가 14,23). 완전히 잘못된 해석이었지만,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에서 저항하는 이단자나 이교도를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로 들어오도록 강요해야 한다는 요청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잘못된 해석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를 예측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후에 “이단자들은 비록 그들의 의사에 반할지라도 그들의 구원으로 강요되어야 한다”고 법문화되었고,, 이 권위에 의거하여 결국은 중세 시기에 이단 심문의 기초가 되었다. 루터도 1525년에 농민들에 대한, 그리고 수년 후에는 재세례파 사람들에 대한(1529) 불행한 행동에 있어서 이 원칙을 제시하였다. 또한 칼뱅도 이것을 근거로 제네바에서 피비린내 나는 신앙상의 판결을 내렸다. 물론 신약성서에서는 종교적인 영역에 대한 강제 조치의 정당화룰 찾아보아도 소용이 없다. 성서는 신앙을,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언간의 자유로운 귀의로만 알고 있다. 스스로 오랜 탈선 끝에 은총의 부르심으로 개종을 체험한 아우구스티노가, 후세의 그릇된 발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수수께끼 같은 신비로 남는다. 물론 그는 이단자에 대한 사형은 결코 시인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단에서 신앙의 위반만이 아니고 신앙의 일치에 기초를 둔 것으로 생각되었던 공통선의 침해로도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은 중세 사람들의 말처럼, 종교 영역으로 “세속의 손”, 다시 말해 국권이 간섭한 데서 온 소산이다.(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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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에페소 기도의 집은 순례와 피정을 통한 에페소 성모님 성지 보존과 중동평화와 난민을 위한 기도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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