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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나누기

연중 제6주일

by 김명겸요한 posted Feb 1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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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 환자의 고통은
육체적인 면만 있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외치면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고립시키고 외면하는 것도
고통스러운 현실이지만,
나병 환자는 스스로를 고립시켜야 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기지 않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당사자에게는 가혹한 형벌이나
다름없었을 것입니다.

병의 이름만 다르지
그 현실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
심지어 코로나 환자와 접촉한 사람들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합니다.
환자들은 가족을 만날 수 없으며
세상을 떠나는 상황 속에서도
홀로 외롭게 떠납니다.
별다른 장례 예식도 없이
바로 화장되는 현실은
환자들 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상처로 남습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어
병을 고쳐주십니다.
물론 이 모습은 지금의 우리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더 이상 육체를 지닌 상태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의 병을 치유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또한 사제나 수도자를 통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신 것은
육체적인 치유 만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궁극적인 것은
그가 다시 공동체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분리를 통해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일원으로
다시 함께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거리 두기 운동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멀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고 싶은 사람들은
직접 만나지는 못해도
다른 방법으로 서로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러므로 거리 두기 운동을
소원해진 관계의 원인으로 삼는 것은
하나의 핑계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리가 서로 거리를 둘 이유는
병의 전염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성격이 맞지 않아서
서로 추구하는 것이 달라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
병 때문이 아니라
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면서
사회는 점점 분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약함이 있어도,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거부하는 마음이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통한 일치로 우리를 부르고 계심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때
우리는 또 다시 하느님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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