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주님은 오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능가하는 의로움>에 대해서 묵상코자 합니다.
제 생각에 의로움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의로움과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는 의로움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수없이 많습니다.
십계명 중에 일곱 개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도 하지 말라는 것이 더 많습니다.
613개의 율법 중에 하라는 것이 248개, 하지 말라는 것이 365개입니다.
저 개인의 역사를 보면 형제들을 양성할 때
처음에는 하지 말아야 할 행위가 더 눈에 많이 띄었고 그래서
‘우리 이거 하자.’는 말보다는 ‘형제, 그거 하지 마.’라는 말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다 나이를 더 먹어갈수록 그리고 지금은 하지 말라는 말보다는
같이 하자는 말을 더 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능가하는 의로움이 무엇일까 생각할 때도
이런 저를 생각하며 주님께서도 하지 말아야 할 것보다는
해야 할 것을 더 강조하셨을 거라는 차원에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물론 그런 면도 있지만 오늘 복음을 보니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차원이 아니라
무엇이건 더 철저하고 완전하게 하라는 차원에서 말씀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더 철저하고 완전하게 하는 것은 어떤 차원입니까?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 살인은 물론 성내지도 않는 것이나
간음은 물론 음란한 생각도 않는 것은 완벽주의적인 차원인 것인가요?
절대 그럴 리가 없지요.
그런 것이라면 도덕적 우월주의와 마찬가지로 매우 인간적인 것이고,
인간적인 욕심일 뿐이며 욕심도 아주 고차원적이고 고상한 욕심일 뿐입니다.
완벽주의나 우월주의적인 거라면 교만에서부터 나온 것이며,
결과는 자신을 미워하고 남은 더 미워하는 그런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2-30 대 때의 저는 그런 완벽주의와 우월주의가 있어서
그 완벽에 1%만 도달하지 못해도 저나 형제들을 달달 들볶고 미워했지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더 완전하고 철저하게 하라고 하신 것은
너의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자가 되라 하신 것이
무결점의 완벽한 자가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하라고 하신 것처럼 역시 사랑의 차원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를 능가하는 의로움이란 사랑의 의로움이고
그래서 이 의로움은 매우 단순하고 근본적인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율법조항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사랑에서 나온 것이고 사랑에 이바지하는 것인지,
하라는 율법조항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사랑에서 나온 것이고 사랑에 이바지 하는지,
이 차원에서 판단하고 실천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집회서는 이렇게 단순화하여 얘기합니다.
“그분이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복음의 다른 곳에서 이렇게 명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단순하게 사랑합시다.
사랑만이 의로움을 능가하고 모든 것을 능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