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 가 : 살바도레 달리 ( Salvador Dali:1904- 1989)
크 기 : 48.9 X 37.5cm
소 재 지 : 미국 밀워키 페트릭 베아트리체 미술관
땅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인간에게 있어 현실은 몸담고 있는 집과 같기에 현실적인 것은 어떤 것이던 인간의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또한 현실 삶에서는 우리 누구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조리와 모순이 많다.
때문에 현실은 머물러야 하는 공간이면서도 또한 탈출하고픈 공간이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현실이 주는 부조리와 비루함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을 지속해왔었다. 이것은 현실을 초월하는 어떤 것에서 동경을 느끼게 만들면서 인간이 극복하고 이루어야 할 새로운 현실 세계로 정착되었다.
초 현실주의자들은 상상의 세계나 꿈의 세계에서도 현실 세계와 또 다른 현실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이런 견해를 가진 예술가들이 초 현실주의(Surrealism)라는 새로운 예술 분야를 만들었고, 이들은 현실적인 세계만이 모든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한계성을 지적하면서 인습적 사고가 극복될 때 인간의 진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이미 중세에서부터 천재들의 상상력 안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창조적 상상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페인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작가는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작가의 하나로 일생을 기괴함을 추구했으며, 프로이드의 심리학에 바탕을 둔 무의식 세계를 추구함으로서 과대망상적인 과시욕을 보였는데, 그는 이것을 자기 창조력의 원천이라는 것을 굳게 확신하면서 작품 세계에 표현했다.
그가 새로운 예술 분야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메카와 같은 뉴욕에서 활동하면서 초현실의 분야를 과학, 신비주의, 유구한 전통 안에 영글어진 그리스도교적 도상, 옛 거장들에 대한 관심 등을 작품으로 표출했다.
이 작품의 표제와 같은 리가트 항구는 스페인 카탈로니아에 있는 작은 해안 마을이며 작가는 여기에서 신비적 종교적 차원의 작품을 두 점 남겼는데, 〈포르트 리가트의 성모〉, 〈십자가에 못 박힌 성 요한의 예수〉 등이 대표적이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님이 의자에 앉아 계시며 그 의자는 직사각형의 여섯 부분이 연결된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현실세계의 고정되고 경직된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꿈처럼 환상적이며 신비적인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작가의 기상천외의 표현들은 현실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대단한 충격을 주었으며 대단한 비난과 반대를 받고 급기야는 미치광이 취급을 당하기도 했으나, 작가는 여기에 너무도 의연히 처신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이런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심기의 불편을 느끼는 교회 당국에 자신을 알리는 목적으로 제작되어 비오 12세 교황에게 바쳐진 것이다. 한마디로 작가의 예술 철학으로 종교성을 표현한 것이다.
작가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는데 이것은 작가가 표현한 종교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나는 꿈과 같은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세계를 표현하고 싶은데,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현대 세계는 모든 것이 너무 기계적이어 삭막함을 느끼기 쉬우므로 바로 이런 삭막한 세상에 인간적인 꿈과 감미로움을 선사하기 위해 초현실주의 표현은 필요한 것이다.”
작가는 현실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초현실주의에 눈뜨면서 놀랍게도 이것이 미래가 아닌 과거의 예술 안에서 초현실주의의 원천을 확인할 수 있는 영감을 발견했다.
16세기 이태리를 중심으로 시작된 르네상스 예술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면서 여기에서 작가는 초현실주의의 영감을 발견하고 끌어내었다.
하느님 중심의 경직된 사고 방식에서 편협하고 비 인간적인 것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합리화되고 있던 시절, 인간 가치를 재발견하자는 취지로 시작된 르네상스 운동은 편협한 교회의 틀을 깨트리는 견인차 역할을 했는데, 작가는 바로 초 현실주의의 이상을 작가 당시에 새로운 탈출구를 열 수 있는 르네상스로 확신했다.
이 작품은 16세기 르네상스 화가인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 1415- 1472)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것이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6명의 성인과 천사들의 옹위 속에 예수 아기를 안고 있는 성모님을 모델로 해서 초현실주의적인 새로운 해석을 했다.
르네상스 예술에서 받은 영감으로 초현실주의를 재창조 하고자 하는 작가의 이런 견해는 초현실주의에 대해 너무 좁은 접근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단으로 보여 그를 초현실주의자 모임에서 제적시켰으나, 그는 여기에 조그만 동요나 실망함이 없이 변함없이 초현실주의자로서의 자신의 확신을 “내가 다른 초현실주의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나야말로 초현실주의자라는 것이다.” 라는 표현으로 자기 신념을 확고히 표현했다.
성모님은 예수 아기를 안고 있는데, 윗부분에 큰 조개껍질에 가느다란 실에 달린 달걀이 있다.
이 큰 조개껍질은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비너스의 상징으로서 중세 여러 작품에 생명을 탄생시키는 요람의 역할이며 여기에 가느다란 실에 걸려 있는 달걀은 바로 새로운 생명의 상징이다.
이 아래에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예수님은 바로 이 세상에 하느님의 생명을 선사하는 영적인 모성의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달걀로 표현되고 있는 생명이 가느다란 실에 달린 것은 안정되지 못하고 위험한 상태에 있는 현대 인간 삶의 상징이다.
작가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이면서 현실에 나타난 사건들의 의미를 바탕에 깔고 있는데, 작가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은 바로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 폭격이었다.
잠시의 폭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모든 것이 다 부서진 현실에서 그는 현실적 이익이나 타당성만을 최고로 여기며 살던 인간들이 만든 세상의 한계와 부조리를 발견하면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현실 세계의 사고방식이나 고정관념과 전혀 무관한 무의식 세계가 표출되는 초현실적인 의미성을 그는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기술공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편리한 삶을 선사했으나, 대단한 파괴력으로 인간 전체를 파괴한 것이기에 그는 여기에 대해 어떤 윤리성을 두지 않으면서도 현실 세계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여기에서의 탈출과 구원을 초 현실세계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현대세계의 큰 매력으로 다가오는 기술문화는 인간 삶의 질을 파괴하는 것임을 전하면서 이것을 여러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성모님은 팔은 잘려 있고, 머리 정수리는 갈라져 있는 모습으로 예수 아기를 안고 계시며 아기 예수 역시 여느 성모자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행복하고 건강한 모습이 아닌 영양실조로 고통 받는 모습이시다.
오늘의 비극의 중심에 서있는 성모님은 현실 세계의 고통을 온 몸으로 안으면서 현실세계가 달콤하게 유혹하고 있는 물질세계의 파괴력과 허상을 제시하면서 비물질적인 세계로 나아갈 것을 인도하고 있다.
전통적인 성모자 성화에 나타나고 있는 것과 반대로 여기 성모님의 젖가슴은 보이지 않는다. 예수 아기는 성모님의 젖을 먹을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세주로 역할을 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암시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세상에 생명을 주시고자 오셨으나, 그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세상은 대단한 기술문명으로 화려하면서도 히로시마와 같은 비극을 만들 수 있는 비참한 현장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구세주로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물질문명과 기술 공학의 발달로 파괴된 세상에서 불안과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이 현실 세계의 허구성임을 확인하고, 현실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좀 허황하고 설득력 없이 보이지만 하느님이란 초현실적인 존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당시 사람들에게 너무도 생소한 기상천외적인 행동으로 따가운 눈총도 받고 또 그의 이상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열광을 받았다.
그가 이 작품을 비오 12세 교황님에게 제시한 것은 작가 나름대로의 신앙고백으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고, 자기의 작품을 신앙과 거리가 먼 것으로 여기더라도 자기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하느님의 자녀로 살고 있다는 자기 신앙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통념적인 관점에서 보면 좀 엉뚱하게 보이는 작가의 작품은 현대 교회가 매력 있게 전하지 못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중요한 면모를 제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이어지는 것이 바로 교리의 경직성이고 전통의 강조는 보수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시대 많은 사람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도 이해할 수 없는 혁명적인 것이었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경직된 교리를 하느님의 뜻으로 여기는 율법학자들의 결정이었으며 초현실주의자의 견해는 황당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혁명적 삶의 모습과 어울리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획일적인 표현이나 경직된 것을 진리로 가르치는 것을 받아들이기 싫어한다. 교회가 현대화를 외치는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것은 교회의 신앙표현이 너무 경직되어 있음에도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작가의 이 엉뚱하게 보이는 작품은 신앙 표현의 새로운 탈출구를 발견하고픈 현대인들에게 좋은 숨구멍을 트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