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그제 연중 2주 토요일 “미쳤다”는 소리를 친척들에게 들으신 주님께서
오늘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내신다는 말을 들으십니다.
지금의 우리는 터무니없는 모함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정말 그런 말을 들으실만한 구석은 없으셨는지 합리적인 의심도 하고,
율법학자들은 왜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는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복음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엄청난 열광을 보내는데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의 눈으로 볼 때는 이것이 수상쩍게 보입니다.
앞에서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동서남북에서 모두 변방지역으로 몰려온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는 유다와 예루살렘에서만 몰려왔는데도
헤로데가 위협을 느끼고 세례자 요한을 죽였는데
예수님께는 더 많은 사람이 더 열광적으로 몰려드니
위협을 더 크게 느끼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몰려든 사람들에게 전통과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고,
병과 마귀로부터 사람들을 구해주는 행위가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정복자 로마의 부역자인 헤로데에게는 로마에 대항하고,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종교 전통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신천지로 사람이 몰리는 것을 우리가 우려의 눈으로 보듯이.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의 측면이라면
예수님에 대한 터무니없는 모함의 측면도 있을 겁니다.
합리적인 의심이 예수님을 정당한 질서의 파괴자로 보는 사람의 것이라면
터무니없는 모함은 예수님을 자기의 적대자로 보는 사람이 하는 짓이지요.
나에게로 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몰려가면
그 사람이 내게 아무 짓 안 했어도 내게 적대자가 되는, 그런 현상이지요.
그런데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 미움이 보통 적대자, 곧
시기와 질투의 대상인 사람을 악으로 만들기 마련입니다.
시기와 질투를 하는 그가 선이고 그의 행위가 선이라면 그것은 아니 되지요.
그리 되면 내가 악하고 내가 하는 짓이 시기질투와 미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팥쥐에게는 콩쥐와 콩쥐의 행위가 선이 되면 안 되는 것과 같은 거지요.
그런데 실은 시기와 질투를 하는 것이 선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가 아주 좋은 사람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선을 칭찬하기에 질투하는 것이고
그가 하는 일이 너무도 훌륭하고 좋은 일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행위를 칭송하기에 시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선을 보고 시기질투하고
그래서 그의 선을 악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의 선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권고 8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 할 수 없습니다.
또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주님이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선을 시기질투하여
그 선이 악령의 힘을 빌려 하는 것이라고 모함하는데
시기질투는 모든 선이란 다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모름의 소치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