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오늘은 복음이 아니고 욥기를 가지고 묵상할까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되고,
저도 나이 먹어가며 욥의 고통과 오늘의 저주가 많이 공감되기 때문입니다.
욥은 모든 것 아쉬울 것 없이 소유하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사탄은 하느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니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으면 틀림없이 하느님을 저주할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욥은 순식간에 자기의 재물과 가족을 다 잃고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욥은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변함없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순응의 자세를 보입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심경과 믿음을 고백하지요.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참으로 대단하고, 존경스러워
저는 일생 욥처럼 이렇게 뭔가를 크게 잃거나 곤경에 처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어려움을 겪을 때 제가 자주 떠올리는 성경구절이 바로
“허무로다. 허무. 세상만사 허무로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 없다.”고
지난 주 우리가 들은 코헬렛의 성구와 그리고 오늘 들은 이 성구입니다.
모든 것, 심지어 아내와 특히 사랑하는 자녀들을 모두 잃어
그 고통 엄청나지만 그래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있어서는
동요가 없었고 그래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그런 내적인 평화와 고요의 상태를 유지합니다.
저는 그저께 주일 낮기도 성무일도를 하면서 그날 성경소구인
로마서 5장 1절을 새삼스레 묵상케 되었는데 그것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과의 평화.
그렇습니다. 이 하느님과의 평화가 중요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사람들과의 평화, 집단/국가 간의 평화는 생각했어도
하느님과의 불화는 한 번도 없었던 듯
하느님과의 평화는 별로 생각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하느님과의 평화가 깨지게 되면
모든 평화와 행복의 근본이 무너지게 되어 오늘 욥처럼
자기가 태어난 날부터 자기를 태어나게 하신 하느님까지 저주케 됩니다.
그런데 앞서 봤듯이 욥도 자기 소유와 가족을 잃을 때까지는
하느님과의 평화가 깨지지 않았고 그래서 저주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몸이 너무 괴롭게 되니 마침내 하느님과의 평화가 깨집니다.
그렇지요. 그까짓 가진 것이야 없었던 때 생각하며 포기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도 소유물을 잃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좀 덜 수 있지만
내 몸의 고통은 그 고통이 나를 떠나지 않는 한 떨쳐버릴 수가 없지요.
제가 지금까지 고통이 없지 않았고 지금도 있지만
인생에 대해 크게 고민을 한 사춘기를 빼고는 태어난 날을 저주치 않았고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더 나아가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몸이 건강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욥처럼
가진 것과 가족을 잃은 데에서 더 나아가 몸까지 너무 고통스럽게 되면
그 때에도 제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들, 곧 <고통이 곧 불행은 아니다.>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 행복치 않으면 나만 손해니까!>라고 할 수 있을까?
제가 욥보다 더 훌륭할 수는 없을 터이니 겸손하게 저의 약함을 인정하며
주어지는 작은 고통부터 마다치 않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지금부터라도 착실히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