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났다.”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오늘 제자들이 하는 짓을 보면 <저>스럽습니다.
제자들이 하는 짓이 제가 하는 것과 다르지 않고
제가 하는 짓이 제자들이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제자들 내부적으로는 자기들끼리 누가 더 크냐 경쟁을 하고
외부적으로는 우리 편이다, 아니다 편 가르기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경쟁>과 <편 가르기>, 이거 어디서 많이 보는 것 아닙니까?
세속 집단에서 많이 보는 것이고 특히 정치권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넓게 보면 지극히 인간적인, 우리 인간이 사는 데서 흔히 보는 거지요.
그런데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가 그 안에 없다는 말이지요.
하느님 중심이 아닌 사람중심이고,
사람중심 중에서도 나 중심, 우리 중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쟁>은 나 중심이고,
<편 가르기>는 우리 중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중심인 하느님 나라에서는 다릅니다.
그곳에 있는 이들은 천사건 사람이건 어린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어린이답지 않았던 사람들도
하느님 나라의 일원이 되려면 어린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린이처럼>은 어떤 것입니까?
한 마디로 '나(ego)'가 없는 것이고,
나라는 존재는 있지만 '나(ego)'가 없는 겁니다.
우선 경쟁하는 ‘나’가 없는 것입니다.
경쟁하는 ‘나’는 나만 있는 나입니다.
일등의 자리에는 나만 있어야 하고
아버지의 사랑은 나만 받아야 하고,
진급은 나만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나’는 ‘너’가 있어야지 나이지요.
‘너’없는 ‘나’가 어디 있습니까?
‘너’가 없으면 ‘나’도 없기에 경쟁을 하기 위해서라도 ‘너’는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너’를 인정하는 경쟁을 선의의 경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이런 선의의 경쟁조차 하지 않습니다.
사춘기 철이 들기까지는 아예 자아개념이 형성되지 않기에
너나 개념이 없어서 남의 것을 남의 거라고 생각지 않고 가져오잖아요?
물론 동생이 바로 생기면 엄마를 뺏길 때 엄마를 안 뺏기려고 하고
그래서 경쟁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엄마를 뺏기지 않으려는 것이지
자아의식이 있어서 그리고 경쟁에서 이기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요.
다음으로 어린이는 <편 가르기>를 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나 어린이 같은 노인들은 누구와 만나도 금방 친해지고
언어와 피부색이 다르다고 배타적이거나 배제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살 때 보면 노인들은 말을 못해도 잘 어울리고,
어린이들도 사춘기가 되기 전에는 인종차별이 없는 편입니다.
지금 트럼프라는 대선 후보가 유색인종에 대한 적개심을 보이고
이들이 미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장벽을 치겠다고 하고 지지를 받는데
이것은 하느님 나라와 완전히 다른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집단인 거지요.
허나 하느님 나라는 너를 받아들이고 다름을 받아들이는 공동체라는 뜻으로
주님께서는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당신을 받아들이는 거라고 말씀하시지요.
아무튼 우리는 오늘 ‘너’를 잘 받아들이고 요즘 부쩍 늘어난 다문화
가족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하느님 나라 백성들인지 성찰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