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복음은 왜 마태오복음과 달리 주님께서 행복선언에 이어
불행선언을 하신 것으로 기록하였을까?
어떤 것이 진짜 주님의 말씀일까?
주님께서는 진짜 불행선언을 하셨을까?
불행선언을 꼭 하셨어야만 했을까?
이런 의문들이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문득 들었는데
그것은 부자들이나 현재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실은 불행하다고 해야
지금 가난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기에
립 서비스(Lip Service) 차원에서, 우리말로는 사탕발림 차원에서
주님께서 이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저는 그렇게 얘기하곤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저를 찾아와 자기들의 불행을 하소연하면,
특히 부자들의 행복을 부러워하며 자기들이 불행하다고 하면
저는 그들도 불행하다고, 아니 오히려 그들이 더 불행하고
사실은 당신이 더 행복하다고 위로의 차원에서 얘기하곤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불행을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하고 혼자 삭여야 되지만
당신은 지금 저에게도 하소연하고 하느님께 하소연하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그래서일까요?
마태오복음에는 없는 <지금>이라는 표현이 루카복음에는 있습니다.
물론 마태오복음도 <지금>이라는 표현이 없어도 현재 시제를 쓰고 있지만
루카복음은 현재를 강조하기 위해 <지금>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겁니다.
사실 지금 부유하고 배부른 것이 무슨 대수입니까?
지금 부유하고 배부르지만 지금 불행하면 무슨 소용이고,
미래에까지 불행하다면 더더욱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부유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행복한 것이 중요하며,
지금 행복한 것도 중요하지만 영원히 행복한 것이 중요합니다.
부유한 것 때문에 행복을 잃고,
지금 행복한 것 때문에 영원한 행복을 잃는다면
그것이 불행한 것이고, 영원히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묵상을 하다가 오늘은 특히 다음 말씀에 생각이 머물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맨 마지막에 나오는 말씀이었기 때문인지 전에는
이와 관련하여 행불행을 묵상해보지 않았었는데
이번에는 이 말씀이 다른 것을 제치고 제 마음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저를 좋게 얘기하는 것을 듣는 것, 이것이 왜 문제입니까?
자학증 환자처럼 나쁘게 얘기하는 것만 듣고 살아야 된다는 겁니까?
첫째로 좋게 얘기하는 것을 듣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듣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들으려는 것이 문제이고,
사람들이 저를 좋게 얘기하는 것에서 나의 행복,
아니 나의 만족을 찾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그럴 경우 다른 사람이 나를 나쁘게 얘기하면 말할 것도 없고,
좋게 얘기해주지 않아도 불행해질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으려는 사람은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 물론
기대하는 칭찬을 듣지 못해도 불행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거짓 예언자들처럼 듣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함으로써
나도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는 것이 문제지요.
하느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실한 종이라는 말을 듣는 것,
그 들리지 않는 칭찬에 나의 만족과 행복을 두는 것,
여기에 나의 불행을 막고 행복해지는 길이 있음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