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 그레고리오 교황의 미사 (1510-1540)
작가 : 아드리안 이센브란트(Adriaen Ysenbrandt : 1480-1551)
크기 : 목판 유채 (29.2 X 36.2cm)
소재지 : 미국 로스엔젤스 폴게티(Paul Getty)미술관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 교회의 지도자가 아니라 이 세상의 지도자로 부각되고 있다. 그분은 우리 교회가 지켜야 할 교리를 강조하거나 역사 안에서 영글은 전통의 가치를 재확인시키는 분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온 세상의 평화와 인류의 사람다운 삶의 환경을 만드시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신다.
그러기에 교황님의 위상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온 세상으로 확산되면서 사람다운 삶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큰 희망의 존재가 되고 있다.
교회사에서 대교황(Pope Great)라고 불리는 분이 두 분 계시는데, 그중에 한분이 이 작품의 주인공인 그레고리오 대교황(540-604)이시다 .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당시 학문과 교양에 대단한 역량을 지니셨기에 젊을 때 로마 시장이 되어 공직 생활을 하시다가 35세 때 뜻한 바가 있어 하느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살기 위해 베네딕도 수도원에 들어가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오로지 하느님 찾는 삶에 몰두했다.
그러나 등불처럼 찬란한 그분의 성덕과 고귀한 인품은 수도원 밖으로 까지 알려지면서 590년 교황으로 선출되셨다.
하느님만 찾는 수도자의 삶을 갈망하던 그분에게 교회 전체를 책임져야 하는 교황직은 너무도 부담스러운 직책으로 여겨졌지만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역사상 첫 번으로 수도자로서의 교황이 되셨는데, 이것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예수회 출신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는 교황이 되면서 교황의 공식 칭호를 “주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라는 파격적인 표현을 했는데, 이것은 오늘까지 교황 문서에 사용되고 있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 교황 보다 교종(敎宗)이란 표현을 하는 정서가 자라나고 있는데, 그레고리오 교황님이 표현하신 “주님 종들의 종” 이란 표현에 어울리는 교황직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라 여긴다.
교황이 되신 그분은 아직 초보 수준이고 특히 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큰 혼란 속에 있던 교회에 기강을 확립하고, 내부 정리는 물론 자선사업에도 몰두함으로서 교회를 하느님 나라의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특히 성미술에 있어 당시 정서가 성당에 성상을 배치하는 것을 금하던 현실에서 그분은 성미술에 대한 오늘까지도 성미술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큰 원칙을 제시하셨다.
“성서와 교회 역사에 나타나고 있는 주제들을 표현하는 성미술은 글자를 모르는 신자들에게 는 펼쳐진 성서와 같다.” 라는 말씀으로 성미술을 교리 교육의 효과적인 방법으로 정착시켰다.
이 작품은 대단한 인품의 바탕에서 성덕으로 모든 신자들의 신뢰와 존경을 한 몸으로 받았던 교황 생전에 어떤 일화로 시대를 흐르면서도 많이 기억되던 주제였다.
595년 어느 주일미사에 성체 축성 후 어떤 부인이 경건해야 할 순간에 웃음을 짓는 것을 보고 물었더니, 자기는 미사에서 사제가 축성하는 빵이 예수님의 몸으로 변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데, 이것을 믿고 있는 많은 신자들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서 그런다고 대답했다.
교황님은 이 신자에게 성체성사의 바른 교리 즉 실체변화, 즉 미사에서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기도하신 후 미사 중 성체축성을 하자, 제단위에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시는 예수님이 나타나심으로서 이 교리에 대한 믿음을 확인시켰다는 내용이다.
아름답게 장식된 고딕 대성당에서 그레고리오 교황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이 발현한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일어나셔서 교황이 봉헌하는 미사에 서 계신다. 십자가 앞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이 미사에선 예수님이 무덤을 열고 일어나 제단 앞에 서심으로 예수님 앞에서 봉헌하는 미사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교황님이 봉헌하는 미사의 거양성체 순간에 제단에 오심으로 교황님이 축성하시는 빵과 포도주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되었고, 못자국이 있는 피 묻은 손을 드신 예수님의 손에서 흐르는 피가 교황님이 올린 성작 안에 떨어지면서 성작 안은 포도주가 아닌 예수님의 피로 가득하게 되었다.
참으로 감동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성변화의 교리이다. 성 고레고리오 교황의 생애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교회가 박해받던 처지에서 기득권자가 된 중세기, 교회가 부패해지고 성직자들의 부도덕에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거나 반발하는 신자들을 교회에 붙들어 주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로 생각했기에 많이 강조하게 되었다.
즉 성직자들이 아무리 부패하고 신자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여 실망스럽더라도, 그가 예수님을 신자들에게 모셔오는 성체성사를 축성하는 역할을 생각해서 성직자를 존경하고 신앙생활에 충실하라는 암시를 주었다.
작가는 성변화란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활동임을 강조하기 위해 제단 주위에 있는 촛대 향료 같은 성물엔 큰 비중을 두면서 등장인물에 대해선 희미한 모습으로 표현하면서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성변화를 강조하고 자 했다.
제단 위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혼신의 정성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교황님의 뒤에는 교황의 상징인 삼중관이 있는데, 이것은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천상천하의 왕이란 상징을 지닌 것인데, 땅바닥에 놓여 있는 것은 그분의 겸손한 인품의 상징이다.
성서에 성체성사에 대한 내용은 오늘 성체를 축성하면서 바치는 사제의 기도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는 것”이 전부이다.
경건하고 덕스러웠던 삶으로 신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모았던 그레고리오 교황의 성변화의 일화는 실체변화라는 교리로 정착하면서 당시 신자들에게 교회에 머물게 하는 큰 힘이 되었다.
오늘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시대착오적인 신앙의 표현이 교리로 정착되어 신자들에게 강요하는 것과 성직자들에게 풍기는 근거 없는 권위의식과 비인격적인 처신이 주요 악재로 등장하고 있다.
근거 없는 권위의식에 빠진 성직자들은 대부분 중세에 형성된 성체 교리인 실체변화의 주례자인 성직자의 위상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세상에 모셔오는 도구로 착각하면서 신자위에 군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 성직자들의 권위의식은 어떤 때 맹목적인 태도가 아닌 지성적인 태도로 신앙에 접근하고자 하는 신자들에게 큰 분심과 실망요인의 악재로 등장하고 있다. 그레고리오 교황의 성체 기적에서 현대인들이 배워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닮은 그분의 처신이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자신의 교황직의 칭호로 만든 “주님 종들의 종”이란 것을 철저히 삶으로 살아감으로서 신자들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였기에 그분이 주장하신 성변화의 교리는 아무 부담이 없이 수용되었다.
이 기적 일화는 그분이 신자들을 바로 가르치고자 하는 열정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체성사의 실체변화 교리가 예수의 인격을 보이는 것이 되지 않을 때 성체성사는 아무런 감동도 설득력도 없는 실망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현대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당신의 행동으로 복음을 살아가시기에 신자뿐 아니라 인류에게 주는 감동과 기대는 대단하다 .
이런 관점에서 그레고리오 대교황에 관계되는 이 일화는 사목자로서 신자들을 사랑했던 그분의 순수한 열정을 본받아야 한다는 면으로 귀결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의 선문답에 선승이 제자에게 하늘을 가르키면 지혜로운 제자는 스승의 손가락이 가르키는 하늘을 보는 반면 어리석은 제자는 스승의 손 끝에 시선을 둔다는 가르침이 있다.
현대에 와서 이런 기적에 매달리기보다 교황님이 삶으로 보여주시는 가르침에 몰두하는 것이 기적에 대한 바른 이해의 길이며 그레고리오 교황 시대처럼 오늘도 이 시대에 어울리는 성숙한 크리스천의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