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근심 없는 기쁨이 어디 있으랴!
이것이 제가 오늘 복음을 대하며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이었고,
이어서 근심걱정에 대한 여러 좋은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그로인해
제자들이 겪게 될 슬픔의 고통과 근심에 대해서 다독여주시며
그러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게 될 거라는 격려도 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사 이별의 슬픔과 고통이 없다 하지 않으시고
근심도 없을 수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불가피한 거기에 없기를 바라도 안 되고
없앨 수도 없는 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슬픔과 기쁨 사이에서 기쁨 없는 슬픔은 있을 수 있지만
슬픔 없는 기쁨은 있을 수 없고, 근심과 기쁨 사이에서
기쁨 없는 근심도 있을 수 있지만 근심 없는 기쁨은 있을 수 없으니
우리는 근심을 어떻게 살아야 하고, 기쁨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지혜가 참으로 필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좋은 말이 바로 티벳의 격언입니다.
“해결될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해결이 안 될 문제라면 걱정해도 소용없다.”
없을 수 없는 이별과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지 않고,
왜 있냐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부질없는 생각이고
더 나아가 근심에 싸여있다면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러므로 불가피하고 해결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근심하는 것은
참으로 바보짓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더 바보스러운 것은
근시안적으로 내다보지 못하는 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근시안적이라는 말 자체가 멀리 내다보지 못한다는 말인데
본디 근심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과 그로 인해 당장 겪게 될 고통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 작용이 근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논어는 위령공편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人無遠慮 必有近憂(인무원려 필유근우)”
멀리 생각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이 근심이 있다.
멀리 내다보면 반드시 좋은 일, 기쁜 일이 있습니다.
멀리 내다보면 전화위복轉禍爲福, 새옹지마塞翁之馬인데
가까이 보면 모든 것이 근심걱정꺼리입니다.
주님께서도 어제 복음에서 “얼마 안 있으면”이라는 말씀을 수차례 하셨지요.
얼마 안 있으면 슬픔이 기쁨으로, 근심이 안심으로 바뀔 텐데
그 얼마를 못 견디고 다가올 기쁨을 기다리지 못하곤 하지요.
멀리 보지 못하고 가까이 볼 때는 ‘그 얼마’가 결코 얼마가 아니고
전부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은 멀리 내다볼 뿐 아니라 높은 데서 봐야 합니다.
북한산 위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면 그 대단한 서울이 아무 것도 아니고,
그 큰 것 같은 근심걱정꺼리가 뭐 그리 대단한가 하고 여겨집니다.
하늘을 높이 나는 독수리에게는 강을 건너는 것이 근심걱정이 되지 않지요.
아무리 폭우가 쏟아지고 바람이 거세도 강을 건너는 것이 문제되지 않으니.
이것을 우리 신앙에 적용하면 어떤 것이 되겠습니까?
하느님과 같이 사는 사람에게 뭣이 근심이 되고,
천상을 사는 사람에게 지상의 뭣이 걱정이 되며,
부활을 사는 사람에게 죽음이 무슨 근심이 되고,
영적 일치를 사는 사람에게 지상의 이별이 무슨 걱정이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