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들이 갈 곳은 죽음 뿐인가
뉴욕에서 95번 하이웨이를 타고 보스턴으로 향하다 29A 출구로 빠지면 2번국도 Concord Turnpike를 만난다.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몇 마일 더 가면 왼쪽으로 Walden pond라는 매사추세츠 주립 보호구역이 나온다. 아름답고 자그마한 이 호수는 19세기 미국의 위대한 철학가이자 문인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7.12.~1862.5.6.)의 고향이자 그가 평생을 살던 생가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그의 대표작인 ‘월든 숲속의 생활’을 읽고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다 그곳에서 며칠 간 머물며 소로우처럼 호수가를 산책하며 사색에 잠기고 싶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실천하지는 못했다. 다만 몇 해 전 뉴햄프셔로 가는 도중에 잠시 들려 겉만 보고 지나친 것이 전부다.
소로우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지만 일정한 직업에 매달리지 않고 평생 자유인으로 살아왔다. 그가 훗날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게 된 것은 당시로서는 주류사회의 이단이라 할 만한 이념과 운동 즉 노예제도와 멕시코 침략전쟁에 항의하고 인두세(人頭稅) 납부거부 운동과 초기 자본주의의 물욕과 사회인습 그리고 부당한 국가권력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의미로 스스로 사회와 격리되어 월든 호숫가 숲속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그는 인두세 납부를 거부해 체포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숲속에 파묻혀 인생과 자연의 진실을 관조하고 이를 주제로 일기, 에세이, 서간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콩코드강과 메리맥 강의 일주일’ 그리고 26개월 간 혼자 숲속에서 기록한 ‘월든 숲속의 생활’ 및 ‘시민불복종’ 등은 생전에 출판한 것들이고 ‘메인의 숲’, ‘케이프 콧‘ 등은 그의 사후 유고들을 정리해 출판된 것들이다. 자연을 벗하고 인생을 관조하며 얻어진 그의 깊은 사상은 그 후 많은 시인과 작가들 그리고 대중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특히 그가 32세 때 국가의 부당한 권력행사에 맞서 펴낸 ’시민 불복종‘은 훗날 마틴 루터 킹 목사나 그에 앞선 간디의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에 이념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일찍이 자신의 저서에서 “의인이 갈 곳은 감옥뿐이다”라고 외쳤다. 지금까지도 이 말은 시민운동의 금언으로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류역사는 그의 말이 부분적으로만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 즉 “의인이 갈 곳은 감옥 뿐 아니라 죽음이다.”라는 말이 더 실감나는 것이다. 역사상 무수한 의인들이 의(義)를 위해 죽었다. 멀리는 예수님도 의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분이고 가깝게는 안중근, 윤봉길 의사를 비롯한 수많은 의인들이 옳은 일을 위해 죽었다. 대한만국에서도 박정희 독재시절 많은 사람들이 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전태일 열사도 마찬가지고 유신시절에 민주회복을 부르짖다 죽음을 당하거나 스스로 민주제단에 ‘소신공양’(燒身供養)한 의인들이 어디 한 두 분이었는가.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정확하게는 ”자유의 나무는 때때로 애국자들과 압제자들의 피를 먹어야만 한다. 이는 자유의 나무에 주는 천연비료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라고 한 미국 제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의 말처럼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도 수많은 의인들의 피가 천연비료 되어 이룩된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외에 사는 동포들은 가슴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다. 80년 대 후반까지도 가난에 찌들이고 독재체제에 시달려왔던 후진국가 대한민국이 짧은 기간에 경제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룩하여 OECD 선진국 대열에 들었으니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려웠던 시절 한국인임이 부끄러워 드러내지 않으려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당당히 ”I am a Korean"을 외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몇 년 전부터 ‘어, 어‘하는 사이에 시나브로 이러한 자부심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한국여행 중이라 현장에서 지켜 볼 수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CNN이 생중계하다시피 보도해 수백 명 어린학생들이 차가운 바닷물 속에 수장되는 생생한 장면을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안타깝게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악몽 같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2년 가까운 지금까지 선체인양은커녕 진상조차 밝혀지지 않는 상황은 할 말을 잊게 만든다. 특히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 항의하는 노동자, 농민들의 절규에 정부는 폭력으로 응답하여 유독성분이 함유된 물대포를 그것도 70노인 머리에 직사하여 사경에 이르게 했으니 언제까지 우리 조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가 천연비료로 필요한 것인가. 이것도 자연의 법칙인가. 나는 물대포에 쓰러진 농민 백남기 씨에 대해 그를 아는 가톨릭 농민회 관계 신부에게 듣고 또 신문보도를 통해 알게 되었다.
백남기 씨는 이 시대에 보기드믄 이타적인 분으로 평생 남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아온 분이다. 공부를 잘해 고향에서는 유일하게 서울의 중앙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유신철폐 운동에 앞장서다 무기정학을 받고 노동과 기도로 생활하는 가르멜 수도원에서 3년간 수사생활을 했다. 그는 부인의 말대로 옳지 않은 일에 분노하는 것 외에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복학 후 후배들에 떠밀려 중앙대학교 총학생회 부회장에 선출된 그는 80년 5월 전두환 일당에 의해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당하고도 반성문을 제출하지 않은 탓에 2년 실형을 선고받고 옥살이하다 이듬해 가석방되었다. 항소하라는 변호사와 주위의 권고에도 그는 군사정권 법정에 항소하는 것은 굴복하는 것이라며 끝내 하지 않았다. 훗날 제적학생들이 모두 복학했을 때도 그는 농사짓고 살겠다며 고향인 보성군으로 내려갔다. 낙향 후 아내와 결혼한 백남기 씨는 농사일을 착실하게 배워 열심히 일했다. 그 사이 1남 2녀 자녀를 두었는데 관공서의 압력과 주위의 걱정에도 자녀들의 이름을 큰 딸은 민중을 의미하는 ‘백도라지’, 둘째인 아들은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백두산’, 막내딸은 ‘백민주화’라고 지어 호적에 올렸다. 이때는 6월 항쟁 이전 전두환 군부 망종세력이 시퍼렇게 살아있을 당시였다.
농촌에서 소를 키우던 백 씨는 전두환 정부의 농축산물 개방에 따라 소 값이 5분의 1로 폭락하는 바람에 다른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그래도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임을 굳게 믿는 백 씨는 다른 농민들이 재빨리 특용작물들로 바꾸어 재배할 때도 끝까지 벼농사와 우리밀 농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를 “생명운동하는 농민”이라고 말한다. 마을사람들에 의해 최초의 민선이장으로 추대된 그는 민주적으로 마을을 운영해 주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또한 그는 가톨릭 농민회에서 하는 ’우리밀 살리기 운동‘과 오랜 세월 화학비료로 상해버린 땅을 되살리자는 ‘되살이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특히 그가 주도한 우리밀 살리기 운동은 처음 조그맣게 출발한 것이 지금은 전남지역 4백 만 평 이상에 밀을 심어 정부가 밀 수매를 중단하면서 ‘우리밀 씨를 말려버린’ 현실을 바꾸어 놓았다. 가톨릭 농민회 사무총장 손영준 씨는 그를 ‘생명과 평화의 일꾼’이라고 말한다. 백남기 씨는 또한 전남 전역 소비자들에게 ‘유기농 먹거리’를 꾸러미 형태로 배달하는 생협 운동을 펼쳐 ‘달걀, 고구마, 쌀, 배추’ 등 상품을 주문받아 그것을 생산자에게 받아 소비자들에게 직접 배달하여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시켜 주었다.
그는 15년 전부터 일체의 직함을 모두 내려놓고 평범한 농민으로 살아가겠다며 농사에만 힘을 썼다. 많은 후배들이 그에게 도지사에 나가라,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라고 권했지만 그는 자신은 농사지으면서 우리 먹거리를 바르게 만드는 일만 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농민들은 그를 더욱 존경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를 ‘수도사 같은 농민운동가’라고 불렀으며, 그의 아내는 그를 ‘경제 0점, 도덕 99점’이라고 평가했다. 아직도 백남기 씨는 80년 대 소 값 폭락 때 진 빚을 갚지 못했다. 빚을 갚을 만큼 돈을 손에 쥐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자식농사만큼은 제대로 했다. 큰 딸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둘째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고 있다. 막내 민주화는 아버지에게 영어를 배워 네덜란드로 어학연수를 갔다가 그곳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 결혼해 잘 살고 있던 중 이번에 아버지가 쓰러지자 급히 달려와 병상을 지키고 있다. 민주화는 12월 5일 제 2차 민중 총궐기 대회 때 아버지 백남기 씨의 쾌유를 빌기 위해 촛불을 들고 서울 대학병원을 찾은 수많은 시민들에게 감사하는 인사를 하다 끝내 눈물을 터뜨렸다. 그녀는 아버지를 ‘세상을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말한다. 하루하루 손주 사진 보는 재미로 살아가던 할아버지 농민 백남기 씨는 운명의 그날 11월 14일 전남지역 농민들과 오후 3시 쯤 서울 남대문 앞에 도착해 풍물패를 따라 덩실덩실 춤추면서 광화문 광장으로 행진했다.
2012년 박근혜는 대선 공약으로 농민들에게 당시 쌀 80Kg 한 가마니에 17만원 하던 정부 수매가를 21만원으로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고 다른 여러 가지 공약(公約)들과 마찬가지로 공약(空約)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고도 지금까지 사과는커녕 해망조차 한마디 없다. 하긴 사과할 사람들이 아니다. 여당의 대표라는 김무성인가 하는 사람은 한두 번도 아니고 벌써 여러 차례 국민들을 속여서 선거에 이겼다고 자랑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김무성은 지난 해 2월 20일 대한변협 초청강연에서 “거짓말 못하는 사람이 박근혜 대통령인데 참모들이 써준 공약을 그대로 읽었다”며 “‘내가 당선되면 어르신 여러분 한 달에 20만 원씩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노인들 표가 많이 나왔다”라고 당시 상황을 전하면서 “돈이 있어야 주지 않겠냐. 돈이 없는데 어떻게 주냐”라며 박근혜를 옹호했다. 그는 특히 “국민 여러분, 내가 당선되면 이런 거 해주겠다. 여기에 속아가지고 (국민들이) 표 찍어주고 대통령, 국회의원에 당선됐다”면서 “정치인들에게 국가재정 건전성을 감안해서 공약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우선 당선되고 봐야 하는데”라고 당선 지상주의와 공약 파기이유를 솔직하게 밝혔다. 그런데 그는 이와 비슷한 발언을 수차례 거듭했다. 한마디로 국민들을 속여 대통령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었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자신들의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권을 사기꾼 집단이라고 스스로 고백한 셈이다.
지금은 박근혜가 농민들에게 장담했던 쌀 수매가는 21만원은 고사하고 당시의 17만원보다도 더 떨어져 12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수매하고 있다. 개 사료 값보다도 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외국에서 수입하는 쌀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농민들은 비료 값도 안 되는 그 돈으로는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백 노인은 쌀이야말로 우리나라 식량주권의 상징으로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울에서 농민, 노동자 집회가 있으니 참가해 항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상경했다고 주위사람들은 증언한다, 그런 백 노인이 경찰이 쏜 최루액이 섞인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지도, 쇠파이프를 휘두르지도, 화염병도 던지지 않았다. 경찰 차벽에 달린 줄을 잡고 있었을 뿐이다. 경찰차벽은 대법원에서 위헌이라고 판결난 불법시설이다. 국민으로서 불법시설을 치워 버리는 것이 폭력이라면 물대포로 노인네 머리를 직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폭력이 아니라 살인행위다. 그래 놓고도 정부 특히 경찰은 지금까지 한마디 사과나 위로, 유감표명조차 없다. 여당 국회의원이란 자는 한술 더 떠 총을 쏴도 합법이라는 망언을 해대고 대표와 대통령은 시위하는 시민들을 IS 테러집단과 동일하게 취급했다. 백남기 씨 가족들은 현재 병원비를 걱정해야 할 처지다. 가톨릭 농민회에서는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모금운동을 하는 한편 무슨 일이 있어도 정부로부터 받아내야 하겠다며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정당한 공무집행이었다며 꿈쩍하지 않고 있다. 사람의 탈을 쓰고 할 짓들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의인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이타심을 가지고 자신보다 남을 위해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면에서 백남기 씨는 이웃들의 증언이나 신문기사를 보아도 분명 이 시대의 숨어있는 의인이다. 정말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그 분의 피가 천연비료로 더 필요했는가. 아니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조국의 민주주의가 정착될 것인가. 참 지지리도 불쌍한 국민들이다. 5년 간 대한민국 전 국토를 유린한 희대의 사기꾼에게 속았으면 그것으로 정신 차려야지 어쩌자고 또다시 독재자의 딸을 대통령으로 뽑아 조국을 세계의 조롱거리로 만드는지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믿을 수 없다. 아니다. 아니다. 절대 그럴 리 없다. 이 모든 것은 악몽이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경찰이 선량한 농민에게 물대포를 쏘아 사경을 헤매게 하다니 절대 내가 사랑하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은 아닐 것이다. 嗚呼라, 哀哉라, 어찌할 꼬, 어찌할 꼬, 내 조국 대한민국이여.
(2015.12.8. 뉴욕에서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