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정동에서 생태영성 세미나발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할 차례이어서 간단하게 준비하였습니다.
2015년 종교간의 대화 위원회 생태영성 세미나 발제
세미나 발제 주제: 생태영성 “제3장 창조라는 책 펴기”
o.f.m 김기환 베드로 마리아 수사
1971년 초 우주선 아폴로 14호에 승선한 세명의 미국인 우주 비행사가 달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구에서 수천마일 떨어진 에드가미첼은 지구의 광경을 보고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광대한 검은 하늘에 떠 있는 화려한 푸르고 흰 보석 같은 엄청난 아름다움”. 에드가미첼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그러한 신비적 체험을 한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는 하느님의 현존체험으로 이끄는 창조를 보는 방식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원전 1세기경에 알렉산드리아의 한 유다인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지혜 13,5) 즉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세계가 이렇게 아름답다면 그러한 자연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아름다운가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 바오로는 이런 통찰을 로마서에서 상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자연 안에서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 관한 토론이 있을 때마다 훌륭한 전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고린토2 11장14절에는 “이미 자연이 여러분에게 가르쳐주지 않습니까?”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바로 자연의 창조물 안에서 하느님과 그의 지혜를 알아볼 수 있고 또한 그분의 가르침들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성경 구절에 기초해서 초기 그리스도교 현인들은 ‘창조에 관한 책’ 또는 ‘자연에 관한 책’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자연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언어로 기록된 어마어마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태영성은 전체적인 자연의 창조물을 큰 존경과 사랑으로 다뤄져야 할 책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수세기 에 걸쳐 창조라는 책을 경건하게 읽어 온 흔적을 추적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2-3) 창조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는 하느님의 자기표명 곧 거울과도 같은 것입니다.
성경과 자연 이 모두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작품이기 때문에 두 책 모두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햇빛의 진리, 비의 진리, 신선한 공기의 진리, 나무들 사이에 부는 바람의 진리, 이들이 진리이다. 그리고 이들은 항상 접근하기 쉽다”. 자연의 진리를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을 접할 때 보다 높은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다 높은 진리에 도달할 때까지, 자연의 질서와 조화 그리고 아름다움과 힘은 비록 불완전하긴 해도 하느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으로 우리를 이끌수 가 있습니다.
오리게네스와 에바그리오 폰티쿠스같은 3,4세기 영적 지도자들은 영성 생활의 세 단계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감정을 정화시키기 위해 미덕을 실천하고 회심하는 시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모든 실재 속에 있는 신비의 지평을 직관하기 위해 정신과 가슴을 열어야 하기때문에, 성스러움에 대해서 이런 훈련된 개방상태가 없는 사람에게는 자연은 단지 감상만으로 끝날 뿐이지 거기에서 더 이상 하느님께로 향하는 관문은 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단계인 감정의 정화를 달성한 후에는 두 번째 단계인 창조에 대한 관상, 즉, ‘창조된 것들의 내적 의미’에 대한 객관적인 통찰을 용이하게 합니다.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창조라는 책을 읽게 되며, 하느님의 지혜와 선하심 그리고 아름다움과 전능 및 하느님의 다른 속성들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밀알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씨뿌리는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듯이 창조된 자연을 통해서 하느님의 선하심과 지혜 그리고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자연의 창조를 통해서 바라본 이미지와 개념을 넘어선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관상적인 일치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창조에 대한 관상에서 창조주와의 사랑의 일치로 이동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몇 년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본적이 있었습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았고, 그 보이지 않는 바람에 나무들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무가 흔들리는 큰 힘은 뿌리가 생명을 주는 땅속깊이에 내려 뻗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나무를 흔든다고 해서 그 누구도 나무 힘으로 스스로 흔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나무는 다만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전 여기서 하느님의 지혜와 선하심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움직이고 활동하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힘과 업적이 아닌 바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힘이며 업적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하느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우리를 이끌고 함께 하고 계신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힘이 이끌려 나아가기 위해서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과 사랑의 뿌리로써 깊게 내려 뻗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나무가 바람에 의해서 움직이고 씨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는 뿌리가 땅속 깊이 묻혀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전 이렇게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면서 하느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지혜를 목격하게 되었을 때에는 마음속 깊이 한없는 감동과 경이로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시대의 초기 몇 세기 동안, 자연이라는 책을 읽거나 창조를 관상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카이사리아의 주교였던 성 바실리오는 창세기에 설명된 창조의 6일에 관한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온 군중들에게 그렇게 실천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아주 미미한 식물조차도 여러분이 창조주를 명백하게 기억하게 할 정도로 창조가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를 원합니다”.
수 세기에 걸쳐서 기도하듯이 창조라는 책을 관상하는 방법은 계속적으로 실천되어 왔습니다. 12세기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는 대주교 헨리 머닥에게 숲 속 나무 아래에서 기도하는 자신만의 습관에 대해서 편지를 썼다. “체험을 한 저를 믿으세요. 당신은 책보다 숲 속에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것들이 훨씬 더 많이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숲과 돌이 어떤 스승으로부터도 들을 수 없는 것을 당신께 가르쳐 줄 것입니다”. 베르나르도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생티에리의 월리엄은 베르나르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사실 베르나르도가 지금까지 성경에서 얻었던 지식이 어ᄄᅠᆫ 것이든, 그가 성경에서 느꼈던 영적 감수성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주로 숲 속이나 들판에서 묵상하거나 기도하는 데서 생겨난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친구들에게 그런 교훈에 대한 다른 스승은 없고 참나무와 너도밤나무가 있다고 즐겁게 농담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경우에 자연이 하느님의 표지라는 감각은 광장히 명확하였습니다. 새, 꽃, 야생 동물과 길들여진 동물들, 심지어 벌레, 꿀벌과 파리에 대한 그의 정중한 태도는 많은 일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성인은 창조된 모든 조물들이 한분이신 같은 하느님에게서 나왔기에 생명이 있건 없건 모두다 같은 하느님의 자녀들로써 인간과 함께 더불어 모든 조물들이 형제 자매의 관점으로 보았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제자인 성 보나벤뚜라는 프란치스코와 생빅토르의 휴 둘 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전체 세계를 창조주의 흔적이 들어 있는 책으로 보았습니다. “창조라는 책은 분명히 제1원리의 수위와 장엄과 위엄을 그리고 그 권능의 무한함을 나타낸다”. 그는 “이 책을 읽는 것은 최고의 관상에 속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전 얼마전에 제 책상앞에 놓여져 있었던 시들어 말라죽은 꽃이 있었습니다. 시들어 말라죽은 꽃은 그 어떤 누가봐도 예쁘지도 않았고,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은 추하게 보여졌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죽은 꽃속에서도 하느님의 선하심과 지혜는 존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죽은 꽃도 엮시 하느님에게서 나온 자연 창조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시들어 죽은꽃은 저에게 세 가지의 큰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첫 번째는 오색깔의 아름다운 꽃잎을 한닢한닢 떨어뜨려서 버린 무소유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칭찬을 듣고 꽃으로서 인정을 받을수가 있지만 꽃에게서 생명과 같은 오색깔의 꽃잎을 하나둘씩 버렸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서서히 시들어 죽어가는 자신의 죽음을 저항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겸손의 자세였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살아가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시들어 죽은 이 한송이의 꽃은 자신의 죽음을 아무런 저항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겸손의 모습을 저에게 보여 줬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러한 시들어 죽은 꽃의 모습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써 사람들로부터 모든 영예와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분이셨지만 꽃잎을 떨어뜨린 꽃과도 같이 아무런 소유없이 가난한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에서와 같이 예수님 당신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임으로써 아무런 저항없이 죽음을 받아들인 한송이의 꽃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시들어 죽은 한송이의 꽃에서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과 가르침을 남겨주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는 쉽게 버리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세상의 물질과 가치에 대해서 읆매이게 되고 또한 찾게 됩니다. 이렇게 쉽사리 버리지를 못하는 우리들에게 오색깔의 꽃잎을 떨어뜨려 버린꽃은 우리들에게 무소유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는 생명으로써 누구나다 살기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살기위해 타인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타인의 생명과 자연을 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들어 죽어가는 꽃은 우리들에게 죽음 앞에서 아무런 저항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였지만 한송이의 꽃은 죽어서 하느님의 지혜와 흔적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간삶의 지혜와 진리를 또한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처럼 창조라는 책을 읽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야 하는 곳은 문자로 된 페이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문자로 된 책을 덮어 두고, 우리를 둘러싼 신비의 현존을 향해 눈과 귀를 열고 넓은 하늘아래 땅 위를 걷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감수성이 예민한 상태에 있을 때 자연은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할 수 있고 우리의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숨어 있는 영광을 바라보는 것은 창조된 존재의 겉으로 들어난 표층이 아니라 심층, 즉 깊은 내면을 살펴보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눈과 정신뿐 아니라 가슴으로도 볼 수가 있습니다. 결과에서 원인까지 정교한 논리 과정 없이도 가슴은 어떤 것에서든지, 그러니까 바람으로 뒤틀린 나무나 새겨진 듯 이끼 낀 바위 또는 지저귀는 새나 끝없이 요동치는 바다에서도 하느님의 현존을 직관하고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 인류는 자연을 인간이 다스리고 마음대로 다루어도 괜찮은 존재들로만 생각을 해왔었고, 올바르게 다스리는 방법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이기주의와 어ᄄᅠᇂ게 하면 좀 더 편하게 살수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을 파괴시키게 하는 주범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생태영성은 우리에게 모든 창조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민감하게 느끼는 방법과 창조라는 책을 경건하게 펼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질문1
각자 나름대로의 창조의 책을 펼쳐보는 방법에 대해서
질문2
지금의 현실에서 자연을 보호하고 지키며 살아가는 작은 실천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