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istancoreofm.org/이슬람은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믿음적 차원에서 그리스도교와 공통된 부분이 많다. 한분이신 하느님, 부활과 심판, 천사의 존재, 아브라함을 비롯한 구약의 예언자들, 성모 마리아의 동정녀 수태, 메시아 예수 등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교와 공유한다.
무엇보다도 이슬람은 유대교와는 달리 그리스도교를 하느님의 종교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이슬람과 그리스도의 공통적인 인식은 현시대의 일이다.
이슬람 출현 초기부터 20세기 중엽까지 거의 천년 이상 유럽에서는 이슬람을 그리스도교와 서구문명에 대한 최대의 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슬람을 바라보는 교회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여러가지 관점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리스도교가 이슬람을 부정적으로 보는 원인은 크게 두가지로 살펴보고자 한다.
바로 신학적견해의 차이와 정치,군사적인 의도 때문이다.
신학적 견해의 차이로는 이슬람이 하느님의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의 부인이라는 요소들이 있으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지 못하고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이슬람에게 맡겼다는 이슬람의 교리에 기인한다.
이슬람에 대해 보는 시각에 결정적 단서를 마련한 사람은 동방교회 다마스쿠스의 요한(675-673)이었다. 무하마드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 것은 이단자 아리우스파 수도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가 그리스도교가 이슬람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데 나침반 역할을 했다.
동방교회에서 유포된 무하마드에 관한 전설은 비잔틴 세계와 라틴세계를 통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각색되어 유포되었다. 이것은 독창적인 새로운 이슬람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다시말해 꾸란은 하느님의 계시록이라는 무슬림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이슬람은 그리스도교로부터 떨어져나간 이단적인 종파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후 서방교회에서는 지정학적 여건으로 인해 이슬람에 대한 정보와 이해는 스페인을 통해 유입된 동방정교회 신학자들의 저술에 의존해 오다가 십자군 원정(1095-1270)을 통해 라틴 세계로 직접 전해진다.
동방 교회로부터 유입된 부정적으로 이슬람을 바라보는 시각은 라틴세계에서도 시각이 바뀌지 않고 거의 그대로 이어졌다. 무하마드가 이단적인 수도자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을 일으켰다는 주장뿐 아니라 그가 성적으로 문란한 사기꾼이었으며 심지어 무슬림들이 유일신 외에도 여러 잡신들을 믿는 주장이 근대초기까지 전혀 바뀌지 않고 오히려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전해져왔다.
중세시대는 물론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가 이슬람을 인정하지 않았던 실질적인 이유는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사이의 정치, 군사적 적대관계에 기인한다.
이슬람의 창설이후 이슬람 세계의 날로 확장되어 전세계로 뻗어나가자 동.서방 교회는 무력감과 굴욕감이 앞선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중세교회의 이슬람 연구는 객관적인 이해보다는 사탄의 종교라 비판하고 폄하하는 정서가 일기 시작했다. 가톨릭의 대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마저도 이슬람에 대한 전해들은 짧은 지식과 왜곡된 정보와 그리스도교의 호교론적 차원에서 이슬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루터는 이슬람의 출현을 신학적으로 해석, 교회의 타락을 응징하기 위해 하느님이 보낸 악마적인 세력 곧,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했다. 앞서 설명한 요한 다마스쿠스가 ‘이스마엘 족속’의 신앙을 ‘적그리스도의 전위대’로 간주한 지 400년이 지날 즈음 베드로 베네라빌리스는 이슬람을 아리우스파와 적그리스도 중간쯤에 위치한 사이비종교로 보았고 그후 다시 4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종교개혁가’ 루터는 이슬람을 적그리스도 그 자체로 규정했다.
마르틴 루터의 이러한 견해는 근본주의적인 확신과 이슬람 세계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것에서 비롯된 정보와 이해의 부족으로 보인다. 1542년 자신이 직접 독일어로 번역한 리콜두스의 ‘사라센 법 반론’, 쿠사의 니콜라우스가 교화 비오 2세에게 헌정한 ‘꾸란 정선(Cribratio Alkorani)’(1460-1461), 그리고 오스만 터키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귀환한 병사들의 진술들을 들은 다음부터는 그의 견해가 바뀌어서 여러면에서 본받을 점이 많다는 평가를 내린다. 이는 그가 만약 라이몬드 룰이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이슬람 세계를 직접 체험했더라면 무하마드와 이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보다 훨씬 긍정적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무슬림 공동체를 인류역사의 동반자로 인정하는 변화를 마련한 계기는 18세기 중엽 교회밖에서 이루어졌다. 바로 인간의 이성을 근본을 두는 합리성과 진보를 기반으로 한 계몽주의 출현이다. 이는 믿음도 이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배경위에 이슬람도 이성의 기초위에 주관적인 편견없이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나온 저술들은 이슬람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이슬람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최초로 서술한 아드리앙 르롱(Hadrian Reland, 1676-1718)의 ‘무하마드교(De Religione Mohammdica)' 그리고 무하마드가 사기꾼이었다는 기존의 부정적인 시각에 일대전환을 가져온 이는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의 ‘영웅 예언자. 무하마드: 이슬람(The Hero-Prophet. Mohamet: Islam)'(1841) 등을 들 수 있다.
이후 과학 기술의 발달의 기반으로 성장한 소구 세속주의, 민족주의가 급부상함과 이슬람의 오토만제국의 몰락과 서구열강의 식민지 시대의 도래는 힌두교, 불교, 유교 등의 경전과 함께 꾸란이 유럽언어로 번역하는 계기를 가져와 이슬람에 대한 연구를 위한 전환기적 시대를 맞이한다. 바로 이것은 타종교, 특히 이슬람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없애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2대 세계대전의 사건을 통해 서구 문명의 우월성과 윤리적 정당성을 다시한번 되돌아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전개된 동서 양진영의 군비경쟁은 인류의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종교간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타종교에 대한 시각에 일대전환을 마련하는 기초를 제공하게 된다.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타종교에 대한 기존의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을 벗어나서 '교회헌장(Lumen Gentium)'과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에서 무슬림들에 대한 존경과 두 종교가 같은 믿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는 종교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류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과거에 있었던 불신과 편견 그리고 깊은 상처들을 씻어버리는 차원을 넘어선다.
이런 차원에서 가톨릭 교회가 어느 타종교 보다 우선적으로 선택한 종교가 바로 이슬람이다. 이슬람과의 대화를 위한 노력은 1964년 설립된 ‘비그리스도교사무국’의 활동뿐 아니라 교황바오로 6세의 공헌,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무슬림에 보낸 각종 축하메세지와 1979년 터키, 1980년 케냐, 프랑스, 1981년 파키스탄, 2001년 시리아 다마스쿠스 등 세계 각지를 순방하며 행한 연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2년 케냐 나이로비를 방문한 연설에서 가톨릭 역사상 교황으로는 처음으로 꾸란을 성서로 부를만큼 무슬림인들을 진정으로 대하였다.
그 이후 개신교와 동방정교회 차원에서도 세계교회협의회(WCC)를 통해 무슬림들과의 대화의 계기를 마련하여 이슬람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면서 인권과 국제적 난민문제의 공동의 문제에 대해 함께 협력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슬람은 유대교와는 달리 그리스도교를 하느님의 종교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이슬람과 그리스도의 공통적인 인식은 현시대의 일이다.
이슬람 출현 초기부터 20세기 중엽까지 거의 천년 이상 유럽에서는 이슬람을 그리스도교와 서구문명에 대한 최대의 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슬람을 바라보는 교회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여러가지 관점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리스도교가 이슬람을 부정적으로 보는 원인은 크게 두가지로 살펴보고자 한다.
바로 신학적견해의 차이와 정치,군사적인 의도 때문이다.
신학적 견해의 차이로는 이슬람이 하느님의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의 부인이라는 요소들이 있으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지 못하고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이슬람에게 맡겼다는 이슬람의 교리에 기인한다.
이슬람에 대해 보는 시각에 결정적 단서를 마련한 사람은 동방교회 다마스쿠스의 요한(675-673)이었다. 무하마드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 것은 이단자 아리우스파 수도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가 그리스도교가 이슬람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데 나침반 역할을 했다.
동방교회에서 유포된 무하마드에 관한 전설은 비잔틴 세계와 라틴세계를 통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각색되어 유포되었다. 이것은 독창적인 새로운 이슬람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다시말해 꾸란은 하느님의 계시록이라는 무슬림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이슬람은 그리스도교로부터 떨어져나간 이단적인 종파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후 서방교회에서는 지정학적 여건으로 인해 이슬람에 대한 정보와 이해는 스페인을 통해 유입된 동방정교회 신학자들의 저술에 의존해 오다가 십자군 원정(1095-1270)을 통해 라틴 세계로 직접 전해진다.
동방 교회로부터 유입된 부정적으로 이슬람을 바라보는 시각은 라틴세계에서도 시각이 바뀌지 않고 거의 그대로 이어졌다. 무하마드가 이단적인 수도자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을 일으켰다는 주장뿐 아니라 그가 성적으로 문란한 사기꾼이었으며 심지어 무슬림들이 유일신 외에도 여러 잡신들을 믿는 주장이 근대초기까지 전혀 바뀌지 않고 오히려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전해져왔다.
중세시대는 물론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가 이슬람을 인정하지 않았던 실질적인 이유는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사이의 정치, 군사적 적대관계에 기인한다.
이슬람의 창설이후 이슬람 세계의 날로 확장되어 전세계로 뻗어나가자 동.서방 교회는 무력감과 굴욕감이 앞선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중세교회의 이슬람 연구는 객관적인 이해보다는 사탄의 종교라 비판하고 폄하하는 정서가 일기 시작했다. 가톨릭의 대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마저도 이슬람에 대한 전해들은 짧은 지식과 왜곡된 정보와 그리스도교의 호교론적 차원에서 이슬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루터는 이슬람의 출현을 신학적으로 해석, 교회의 타락을 응징하기 위해 하느님이 보낸 악마적인 세력 곧,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했다. 앞서 설명한 요한 다마스쿠스가 ‘이스마엘 족속’의 신앙을 ‘적그리스도의 전위대’로 간주한 지 400년이 지날 즈음 베드로 베네라빌리스는 이슬람을 아리우스파와 적그리스도 중간쯤에 위치한 사이비종교로 보았고 그후 다시 4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종교개혁가’ 루터는 이슬람을 적그리스도 그 자체로 규정했다.
마르틴 루터의 이러한 견해는 근본주의적인 확신과 이슬람 세계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던 것에서 비롯된 정보와 이해의 부족으로 보인다. 1542년 자신이 직접 독일어로 번역한 리콜두스의 ‘사라센 법 반론’, 쿠사의 니콜라우스가 교화 비오 2세에게 헌정한 ‘꾸란 정선(Cribratio Alkorani)’(1460-1461), 그리고 오스만 터키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귀환한 병사들의 진술들을 들은 다음부터는 그의 견해가 바뀌어서 여러면에서 본받을 점이 많다는 평가를 내린다. 이는 그가 만약 라이몬드 룰이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이슬람 세계를 직접 체험했더라면 무하마드와 이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보다 훨씬 긍정적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무슬림 공동체를 인류역사의 동반자로 인정하는 변화를 마련한 계기는 18세기 중엽 교회밖에서 이루어졌다. 바로 인간의 이성을 근본을 두는 합리성과 진보를 기반으로 한 계몽주의 출현이다. 이는 믿음도 이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배경위에 이슬람도 이성의 기초위에 주관적인 편견없이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나온 저술들은 이슬람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이슬람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최초로 서술한 아드리앙 르롱(Hadrian Reland, 1676-1718)의 ‘무하마드교(De Religione Mohammdica)' 그리고 무하마드가 사기꾼이었다는 기존의 부정적인 시각에 일대전환을 가져온 이는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의 ‘영웅 예언자. 무하마드: 이슬람(The Hero-Prophet. Mohamet: Islam)'(1841) 등을 들 수 있다.
이후 과학 기술의 발달의 기반으로 성장한 소구 세속주의, 민족주의가 급부상함과 이슬람의 오토만제국의 몰락과 서구열강의 식민지 시대의 도래는 힌두교, 불교, 유교 등의 경전과 함께 꾸란이 유럽언어로 번역하는 계기를 가져와 이슬람에 대한 연구를 위한 전환기적 시대를 맞이한다. 바로 이것은 타종교, 특히 이슬람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없애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2대 세계대전의 사건을 통해 서구 문명의 우월성과 윤리적 정당성을 다시한번 되돌아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전개된 동서 양진영의 군비경쟁은 인류의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종교간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타종교에 대한 시각에 일대전환을 마련하는 기초를 제공하게 된다.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타종교에 대한 기존의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을 벗어나서 '교회헌장(Lumen Gentium)'과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Nostra aetate)'에서 무슬림들에 대한 존경과 두 종교가 같은 믿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는 종교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류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과거에 있었던 불신과 편견 그리고 깊은 상처들을 씻어버리는 차원을 넘어선다.
이런 차원에서 가톨릭 교회가 어느 타종교 보다 우선적으로 선택한 종교가 바로 이슬람이다. 이슬람과의 대화를 위한 노력은 1964년 설립된 ‘비그리스도교사무국’의 활동뿐 아니라 교황바오로 6세의 공헌,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무슬림에 보낸 각종 축하메세지와 1979년 터키, 1980년 케냐, 프랑스, 1981년 파키스탄, 2001년 시리아 다마스쿠스 등 세계 각지를 순방하며 행한 연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2년 케냐 나이로비를 방문한 연설에서 가톨릭 역사상 교황으로는 처음으로 꾸란을 성서로 부를만큼 무슬림인들을 진정으로 대하였다.
그 이후 개신교와 동방정교회 차원에서도 세계교회협의회(WCC)를 통해 무슬림들과의 대화의 계기를 마련하여 이슬람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면서 인권과 국제적 난민문제의 공동의 문제에 대해 함께 협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