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유다의 배반 (1350- 1355)
작 가 : 바르나 다 시에나 (Barna da Siena: 1330 - 1360)
크 기 : 프레스코 벽화
소재지 : 이태리 산지미야노(San Gimignano)
미켈란젤로는 성공한 예술가의 우상이면서 장수를 누렸으나, 반대로 작가는 비계 위에서 작업을 하다 떨어지는 사고로 단명했기에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얼마나 대작을 남겼을까 라는 그리움을 남긴 작가였다.
피렌체와 쌍벽을 이루다 전쟁에 패함으로서 고틱 도시로 머문 시에나에서 활약한 작가는 지금 남긴 작품만으로도 그의 기량이 평가되는 작가이다.
작가는 성주간의 핵심이 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부활로 가시는 주님 생애의 극적인 시기 즉 최후만찬에 이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 이어 체포되는 극적인 시기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체포와 유다의 배반이라는 주제를 많이 다루었다.
이 작품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바쳐 가르치고 사랑했던 제자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극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수난복음에서 이 장면은 숨막히는 긴장감을 주는 것인데, 작가는 이것을 박진감있게 표현했다.
마태오 복음의 수난사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 예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바로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왔다. 그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큰 무리도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그분을 팔아 넘길 자는, 내가 입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붙잡으시오. 하고 그들에게 미리 신호를 일러 두었다.
그는 곧 바로 예수님께 다가가, “스승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나서 그분께 입을 맞추었다. 예수님께서 “친구야 가서 네가 하려온 일을 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때에 그들이 다가와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
그러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들고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귀를 잘라버렸다. 그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마태 26: 47- 53)
얼핏 보면 이 장면은 선과 악의 대결 같은 판전승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작가는 이 장면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지고함과 악의 유혹에 빠져 배신이라는 죄를 저지르는 인간에게도 볼 수 있는 인간적인 회한과 아픔을 담고 있다.
오직 자기를 체포하기 위해 엄청난 무장을 한 일군의 적군들 가운데 포위되어 있는 예수님께 그분이 사랑했던 제자이자, 스승을 보호할 인간적 책임이 있는 유다가 친밀한 표시의 키스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키스는 순수한 우정과 사랑이나 위험에서 구하겠다는 표시가 아니라 배신과 고통의 시작을 알리는 어두운 묵시록의 음흉함을 담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선과 악이라는 원색적인 표현이 아닌 하느님 사랑의 심원함과 인간의 약함 속에도 들어 있는 슬프면서도 아련한 인간의 선성을 표현하고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돌발적인 상황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이나 아니면 극단의 분노를 통해 자기를 방어할 것이나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도 숭엄함을 풍기는 초연한 표정으로 자기에게 배신의 키스를 하는 제자를 바라보고 있다.
이 상황에서 통념적으로 보일 수 있는 분노나 경악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런 모습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음의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인간적으로 가장 친밀과 존경의 표시를 보이는 위선적이며 가증스런 유다를 연민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예수님의 눈빛엔 어떤 분노나 실망도 없이 연민의 눈빛으로 제자란 이름의 배신자를 바로보고 있다. 교회는 많은 강론과 글을 통해 이것을 원수사랑, 용서 등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으나, 이 작가는 신앙을 살아가는 인간의 심리적 차원에 접근해서 신학이나 교리가 표현하지 못한 심원한 삶의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
스승을 팔아먹기 위해 배반하는 유다야 말로 악인의 상징이다. 우리에게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익숙해있기에 유다를 너무도 쉽게 악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오죽하면 성서에서 조차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려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르14: 21) 라는 말로 그 인생 자체가 실패의 상징처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스승을 팔아넘기기 위해 키스하는 유다의 표정은 예수님의 표정과 또 다르게 관객을 하느님의 자비에로 인도하고 있다. 그는 스승을 팔아넘기기로 약속하고 그 대가로 당시로서는 거금인 돈을 챙긴 처지이나, 스승을 팔아넘기기에 그의 마음은 너무도 정리되지 않고 착잡한 처지임을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자기의 능력을 믿고 그리 대단찮은 제자 공동체이지만 금고를 자기에게 맡긴 스승, 그동안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주었던 그 스승을 배반해야 한다는 것이 그에겐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임을 그 표정에 드러나고 있다.
작가는 이런 유다의 얼굴에서 약한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심리적 갈등,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그 깊은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선성을 씨앗을 제시함으로서 관객에게 단죄의 결단이 아닌 하느님의 자비로 관심을 돌리게 만들고 있다.
비록 유다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스승을 배신한 인간이지만 하느님의 자비에서 제외된 인간이 아니라는 구원의 희망을 보이고 있다.
작년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종님을 모시고 순교자 124명을 시복하는 감격스러운 기회를 가졌다. 순교는 크리스챤이라면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신앙의 정점이며 목표이나 허약한 인간들은 순교 못지않게 배교를 많이 한 것이 현실이다.
종교 박해가 끝난 교회가 가장 고민한 것 중 하나가 배교자를 어떻게 처리하는냐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순교와 배교라는 이분법적인 잣대로 평가하는데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다.
몇년 전 세상을 떠난 일본의 가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쿠 작품의 주제는 바로 배교자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다룬 것이 많다. 일본 교회의 박해시대엔 우리와 달리 선교사가 배교를 한 충격적 사건이 있었다.
엔도 슈사쿠는 선교사의 배교 과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당시 일본 관헌들은 크리스챤들을 고문하면서 후미에(踏畵)라는 것을 사용했는데 예수님이나 성모의 모습이 그려진 널빤지를 놓고 그것을 밟으면 배교로 간주하고 석방했으며, 그냥 건너뛰면 잔인한 고문 후 사형에 처하곤 했다.
그 선교사가 후미에에 그려진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예수님은 그에게 '나직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밟고 지나가거라. 나는 지금 나를 밟아야 하는 네 발의 아픔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나눠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던 것이다.” 선교사는 이런 주님의 뜻을 따름으로 배교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스승을 팔아넘기기 위해 키스하는 유다의 표정에서 엔도 슈사쿠 작품의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그는 배교자이기에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이 아니라, 충실한 제자와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는 제자임을 알리고 있다.
작가는 우리들에게 구원과 멸망, 선과 악, 순교와 배교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배반당하는 예수와 배반하는 유다 안에서도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선성을 보도록 초대하고 있다.
교회는 이런 순간에 용서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 사용한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이보다 더 넓고 심원하다. 폭력의 악순환으로서는 결코 참된 복수도 승리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금요일 저녁기도 성경소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매 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택으로 여러분의 상처는 나았습니다.”(1베드2: 24)
작가는 자기를 죽이기 위해 체포를 하는 기성 교회의 어두운 세력들에 둘러 쌓인 가운데, 극진히 믿고 사랑했던 제자의 배신을 바라봐야 하는 긴장의 순간에도 십자가에서 팔을 벌려 모든 사람을 다 자기 품에 안으시는 구세주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모습을 관객들에게 제시하면서 신앙이 주는 평화와 위로로 우리들을 초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