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는 중세기 서양에 있었던 특별한 신분으로 이 단어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슈발리에(chevalier)라는 말은 중세 봉건시대의 기사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기사도 교육 과정은 복음에 바탕을 둔 크리스챤적인 도덕성과, 악의 세력을 강하게 응징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 게르만족의 무사정신을 결합시켜 탄생한 것이다.
이런 성격의 기사가 되기 위해, 첫째로 하느님께 대한 충성의 표현으로서 신앙의 서약과, 둘째로 봉건적 군주에 대한 충성의 표현으로서 왕에 대한 충성서약, 셋째로 부인에 대한 충성의 표현으로서 의협의 서약을 하였다.
하느님, 왕, 여자에 대한 특별한 태도를 서약한다는 것이 현대적인 안목에서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열악했던 중세 봉건 사회 체제에서는 “하느님과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마태 22,37) 계명의 산 실천과 같았다.
이런 기사 계급들이 보여준 멋지고 용감한 삶의 감동은 역사안에 면면히 이어지면서 중세인들에 대한 많은 낭만적인 신화 수준의 감동을 창출했으며 문학이나 예술을 통해 기사들의 멋스러운 모습이 표현되었다.
기사들의 삶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는 바그너( R.wagner : 1813- 1883)의 작품 “탄호이저”(Tunnhauser) 와 문학작품은 영국의 “원탁의 기사” 프랑스의 “에렉과 에니드”(Erec et Enide), 독일의 “그레고리오”(Gregorius) 등이 있다.
그러나 기사도는 어디까지나 봉건 사회체제를 기본으로 했기에 봉건체제가 무너지면서 퇴색일로를 걷다가 이것이 종교적 차원에서 재조명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띄다가, 놀랍게도 이것이 수도생활로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칼을 든 수도자“란 아무리 생각해도 의아한 발상은 철저히 복음적 이상을 시대적 현실에서 표현하고픈 갈망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런 발상에 영적 근거는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Bernard of Clairvaux : 1090–1153) 성인이 마련했다.
그가 다룬 주제 중에 “새로운 기사도의 찬양”이라는 글이 있는데, 여기에서 약자들을 보호하고 교회를 위협하는 세력들을 몰아내기 위해 칼을 드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임을 강조했고 그의 매력적인 설득력에 의해 기사도가 수도생활의 이상에 자연스럽게 접목되었다.
이런 정신에 의해 창설된 성 요한 기사 수도회는 오늘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데, 교회 역사에서 뿐만아니라 중세 역사의 관점에서도 특이한 성격으로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이들은 중세기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는 순례자들을 돕고 그들의 건강을 돌본다는 취지에서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신앙 차원에서 호응을 받게 되다가 십자군 원정 이후로 군사적인 색채가 더해졌다.
이들이 이상인 순례자들 보호에 큰 방해물로 등장하고 있는 모슬램 교도는 처지해야 한다는 것이 실천적 요청으로 등장했기에 순례자 돕기라는 복음적 이상은 칼을 든 기사도의 실천을 통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13세기 들어서 팔레스타인에서 이슬람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십자군 국가들이 붕괴되자, 기사단은 언젠가 다시 성지를 회복할 것을 결심하면서 성지 이웃인 키프로스 섬으로 피난했다.
1309년 터키 남쪽의 로도스 (Rhodos)섬을 정복하고 그곳에 기사단의 근거지를 삼고 병원을 세우고 활동하면서 동지중해의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독립국가가 되었다.
이들은 막강한 선단을 이루어 이 지역을 항해하는 무슬림의 상선 등을 공격 약탈하면서 생활을 유지했는데, 그곳에서의 활동은 일종의 해적 행위였다.
이 와중에서도 그들은 순례자들과 병자들을 돌본다는 그들 사명에 최선을 다한다.
1440년에서 1489년 사이에 순례자 숙소와 병원을 건축하여 운영했는데, 이 시설이 당시 유럽 수준에서도 준수한 것이어서 방문하는 사람들을 감동에 빠지게 만들었다.
병원의 시설은 위생 면에나 관리 면에서 전쟁을 하고 있는 처지에서 도저히 상상키 어려운 당시 유럽 수준에서도 고급이었으며 환자들에게 지급되는 식기는 모두 은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환자들의 식기가 은으로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인데, 이것은 혹시라도 음식에 독약이 투여되는 것을 막는 뜻도 있었지만, 기사들은 모두 귀족출신들이었기에 비록 수도자로 서약을 했지만 자기 가문의 품위를 상기할 수 있도록 자기들이 은식기를 사용했고 병원이나 쉼터를 찾는 순례자들에게도 똑 같은 예우를 했다.
“손님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수도자들의 환대 (Hospitality) 정신을 귀족 신분답게 표현한 것이다.
[말타(Marta)의 성 요한 대성당 바닥에 있는 요한 기사단원들 무덤의 문장들]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은 크리스챤들 뿐 아니라 드물게 생기게 되는 모슬램 환자들도 꼭 같이 치료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이런 파격적인 선의는 당시 교회가 지니고 있던 모슬램들에 대한 극단의 증오에 대한 큰 해독제가 될 수 있었다.
당시 교황을 위시해서 수도자들까지 모슬램은 바로 악의 화신(化身)으로 여길 만큼 이들에 대한 증오가 열렬한 신앙의 표현으로 착각하는 큰 광기에 빠져 있을 때, 기사 수도회원들은 직접 모슬램과 전쟁을 하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들의 고귀한 인품과 인간애의 실천으로 모슬램들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맑은 도덕성이 주는 감동일 뿐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터키에게는 이들의 존재성은 목에 걸린 생선뼈와 같은 것이어서, 황제 슐레이만은 군사를 풀어 이들을 섬멸시키고자 결정하고 로도 섬을 공략했다.
이때 동원된 터키 병력은 500척의 배와 해군 10 만 명인 반면 이들과 싸워야 하는 기사단은 600명 남짓한 기사들과 1500명 남짓한 용병들이 고작이었다.
이런 열세 속에서도 기사단들은 하느님의 왕국을 지킨단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 6개월을 버티다가 한계를 느끼면서 항복하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정처없는 길을 떠나게 된다.
이 전투는 조그만 섬에서 일어난 전투이지만 요한 기사단은 페배라는 이름의 승리를 얻게 되었다. 이들의 전투는 참으로 군인으로서 너무도 자랑스러운 모델이었다.
치열한 6개월간의 전투에서 이슬람 교도인 술래이만 황제는 부하의 절반을 잃는 고전을 치르면서도 자기들의 원수인 기사단이 지닌 크리스챤 신앙으로 다듬어진 신사다움을 보면서 감탄과 존경의 하게 되고 휴전 상태에서 이들이 떠날 수 있는 자유를 배려하게 된다.
로도스 섬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으로 휴전 협정을 맺을 때 슐레이만 황제는 기사단장에게 다음과 같은 찬사를 남겼다.
“나는 이겼소. 하지만 귀관의 부하들 같은 용감하고 의로운 이들을 거처에서 몰아내어야 한다는 것이 몹시 슬픈 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소”라는 비감에 찬 감동의 말을 남기면서 기사단 전원에게 당시로서는 대단한 가치가 있던 주홍색 벨벳 한 두루마리씩을 선물로 주었다.“
출항 전날 기사 단장 역시 터키 황제인 슐레이만을 평하여 “그야말로 진정한 기사이다.”라는 찬사를 남겼다.
이것은 이슬람을 원수처럼 여기며 십자군을 파견하면서 전쟁을 했던 두 종교 사이에 있었던 유일한 서로의 선의와 신사다음을 인정한 사건이었다.
새로운 거처를 찾아 크레타 섬을 거쳐 여기저기를 다니는 요한 기사단에게 스페인 황제는 오늘 이태리 남단에 있는 말타(Marta)섬을 맡기며 대가로 지중해 해적들을 감시하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당시의 단장이었던 발렛타(Valetta)는 27년간의 노력으로 불모지와 같았던 섬을 로도스에 버금가는 요새를 만들고 로도 섬 못지않은 좋은 시설의 병원을 운영했다.
그러나 이들은 참으로 어이없는 사건으로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이집트 원정길에 오른 나폴레옹은 몰타에 항구와 보급의 제공을 요구하고 위협을 가해왔다. 그토록 열악한 처지에서도 터키와 전쟁을 불사했던 기사들이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기사들은 재산이나 영토를 빼앗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성지를 수호하면서 순례자를 돌보는 것이 목표였기에 어떤 이유로던지 크리스챤 들과는 싸우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순순히 나폴레옹에게 항복함으로서 1798년 역사에서 막을 내리게 된다.
이 항복을 통해 그들은 전투 집단이 아니라 복음 집단임을 드러내게 된다. “크리스챤 국가는 복음의 이름으로 서로 싸워서 안 된다.” 는 것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안타깝고 부끄럽게도 유럽 역사에서 그 많은 전쟁의 대종이 크리스챤들 끼리의 전쟁인 것을 생각하면 이들의 항복은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보여준 복음의 향기를 풍기는 꽃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 초에 기사단은 세력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결국 1834년 로마에 정착하였다. 이때부터는 군사적인 측면은 거의 사라지고 인도주의적·종교적 조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현대기사단의 행렬]
현대에 와서 교회 수도생활은 양적으로 급격한 감소 현상을 보이면서 수도생활을 내일에 대해 비관적인 정서가 퍼지는 가운데, 수도생활의 새봄을 맞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 세계를 놀라게 만드시는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지난 11월 30일부터 로마와 온 세계가 수도생활의 고귀함과 소중함을 깨우침에 역점을 둔 수도생활의 해를 시작하셨다.
현대에 와서 수도생활의 양적인 급감 현상은 쇄신과 적응이라는 두 가지 원칙에 있어 적응에 실패한 것에서 큰 원인을 찾고 있다.
즉 급격히 변화하는 현대 사회의 리듬에 과감히 적응을 시도하기보다 시대착오적인 전통이나 법 조항에 안주함으로서 오늘의 비참한 현상을 자초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래 이스라엘 고고학 연구팀은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 있던 큰 유적지를 발굴했는데, 이것은 기사 수도회원들이 운영하던 병원으로 수용 능력이 2000명이나 되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 기사단 문장]
그 다음 기사 수도회가 주고 있는 교훈은 출신 성분이 신분적 귀족임과 동시 귀족으로서 일생을 성지 수호에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사람들은 정신적인 귀족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일반 수도자들처럼 정결 서약에 있어서도 그리 철저하지 않아 여자 친구를 지닌 사람들도 있었고, 앞에 언급한 대로 자기 귀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은 식기를 사용할 만큼 가난의 실천에 있어서도 현대 수도생활의 기준에서 보면 좀 느슨한 면이 있었으나, 인간적인 품위를 중요시했기에 어떤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도 고귀한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슬람과 전쟁을 하다보면 간혹 포로가 될 수 있었고, 이슬람들은 이들의 탁월함을 알았기에 이슬람으로 전향하면 높은 지위와 화려한 삶을 약속했으나 대부분의 기사들을 이것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함으로서 이슬람 교도들로 부터도 고귀함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의 동기만이 아니라 배신은 자기 인격과 가문에 대한 최대의 먹칠이라 여겨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들이 이렇게 영토와 자주권을 잃으면서 새로운 생명력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은 이슬람과의 전쟁이 아니라 세상이 필요로 하는 복지 사회사업에 투신함으로서 기사 수도회는 현대 실정에 맞게 새로 태어나게 되었다.
이들은 크리스챤 국가 뿐 아니라 아프카니스탄과 같은 이슬람 국가는 물론 타일랜드 같은 불교 나라에서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이슬람들을 원수처럼 여기며 전쟁을 했던 교회의 옹졸한 모습이 만든 부정적 정서에 대해 새로운 치료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더욱이 개신교 국가에서 이들의 조직을 받아들여 자기들의 처지에 맞게 개량해서 독일 스웨덴 영국 네덜란드에 25000명 이상의 회원들을 확보하고 있는데 이들은 주로 사회사업에 헌신하면서 고귀한 신분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성 요한 기사 수도회는 기사도라는 중세 크리스챤 문화 현상을 복음적 이상과 접목시키면서 중세기에 꼭 필요했던 성지 순례자들의 보호와 치료에 헌신하다가 시대가 바뀌면서 인류 전체의 복지를 구현하기 위한 사회사업 단체로 변신시켰다.
오늘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복음적 삶의 고귀함을 전하고 있는 것은 중세 사회의 자랑스러움이 오늘까지도 새로운 생명력으로 이어오는 탁월한 아름다움의 하나이다.
“한 손에는 칼, 다른 손에는 코란”이라는 말은 이슬람의 호전성와 야만성을 드러내기 위해 크리스챤들이 만든 거짓임이 드러나고 있다.
며칠 전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터키를 방문하실 때 이스탄불의 블루 모스크에서 이슬람 지도자들과 함께 기도하셨다
교종께서는 이슬람 지도자들이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것과 같은 몸짓을 보임으로서 이슬람과의 화해 무드 조성에 새로운 역할을 하셨다.
이런 관점에서 요한 기사 수도회의 존재성은 단순히 기사들의 일화가 주는 낭만적 감상의 존재가 아니라 현대 교회에 꼭 필요한, 양적으로 붕괴하고 있는 수도생활 소생에 필요한 산소를 제공하고 있다는 인상도 받게 된다.
요한 기사 수도회의 존재야 말로 “새 술은 새 부대” 에라는 복음 말씀을 너무도 적절하면서도 과감히 실천함으로서 오늘까지 명맥을 이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복음적 삶의 멋스러움과 고귀함을 증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