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무덤을 찾은 여인들 ( 1887)
작 가 : 윌리엄 아돌프부기로 (Willaim Adolphe Bouguereau: 1825- 1900)
19세기 유럽 화단에서 대단한 각광을 받던 작가는 인체, 특히 여성의 인체 묘사에 탁월한 경지를 보여 그의 작품은 탁월한 예술성 못지않게 대중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던 작가였다.
프랑스 포도주 공장의 아들로 태어나서 , 가업을 이어야 할 처지였으나 예술과 문화에 일가견이 있던 사제인 숙부의 도움으로 예술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예술의 분야 중에도 특히 인체 묘사에 대단한 흥미를 가졌던 작가는 인체의 신비를 파악하기 위해 해부학을 공부하고 실습함으로서 인체를 정확히 그릴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중세의 의상학이나 신화를 공부함으로서 여성의 묘사 능력에 탁월성을 키웠다.
그는 이태리 르네상스 화가였던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o Sanzio: 1483- 1520)의 화풍에 심취해서 인간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찍은 듯 정확히 그림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사랑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부드럽고 아늑하면서 화려한 것을 선호하는 부호들의 기호를 충족시킴으로서 유럽 뿐 아니라 미국에 까지 알려져서 부잣집 거실을 장식하는 명품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이 작품은 그가 그린 몇 편의 성화 중 하나이며 신약 성서 마르코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부활사화를 그린 것이다.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래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날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에서 굴러 내 줄까요?"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러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십자가에 목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 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마르코 16: 1- 8)
이 장면은 세 명의 여인들이 무덤에 가서 무덤을 막았던 돈이 이미 굴러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면서 안을 들여다 보는 순간 젊은이 모습의 천사를 발견하고 그의 말을 들으면서 놀라움을 표시하는 모습이다.
오늘편 손에 대야를 들고 흰 수건을 쓴 여인은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굴러나있는 것을 보면서 무릎을 꾾은 자세로 돌에 손을 대고 무덤안을 들여다 보고 있다. 이 여인이 손에 든 대야는 이 여인들의 심정을 너무도 잘 대변하고 있다.
이 여인들은 주님이 생전에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그것을 믿지 않았기에 지금 이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러 온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너무 사랑하시던 주님, 그토록 비참한 죽음을 겪으신 주님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왔다.
주님의 시신을 씻어 향료로 발라 드리기 위해 왔다.
이들이 이 동굴에 온 것은 살아계신 주님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신 주님의 시신을 보기 위해 온 것이다. 즉 이 세 여인들은 주님 가까이서 여제자로서의 충실히 주님을 따르면서도 주님이 말씀하신 부활은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활 사건은 이처럼 예사로운 사건이 아니기에 인간 지성으로 수용할 수 있는게 아니라 큰 신앙이 있을 때만 가능한 사건임을 알리고 있다.
그러기에 이 세 여인의 표정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인간의 기쁨이나 희망, 확신이 아니라 슬픔 , 의혹 , 호기심 어린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미사 때 성찬례의 순간에 바치는 "신앙의 신비"라는 환호에서 이것이 너무도 잘 표현되고 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이 여인들의 표정은 바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크리스챤들이 주님 부활의 확신에 이르는 과정에서 체험하는 신앙의 어두움((Obscuritas fidei)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현실 삶의 여정에서 많은 방황과 갈등을 느끼는 우리의 삶은 주님 무덤에 다다른 이 여인들의 여정과 같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에 삶의 확신도 없이 의혹과 두려움에 흔들리고 있는 우리의 처지이다.
이 여인들의 어둡고 완고한 심정을 대변하는 돌무덤과는 반대로 그들 앞에 열려진 무덤안은 바깥과는 전혀 다른 생명으로 충만한 곳이 되었다.
어떤 장애도 없이 모든 것이 다 개방되고 열린 모습이 반쪽을 보이고 있는 천사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주님 부활을 알리는 천사가 있는 무덤안의 공간은 죽음으로 대변되는 돌무덤 공간에 비길 수 없을 만큼 작은 공간이지만 그 안엔 돌로 만들어진 무덤이 주는 어떤 제약이나 장애도 없는 하늘처럼 열린 공간이다.
여인들이 서있는 무덤 밖의 넓은 공간은 넓지만 경직된 처지에 있고 천사가 있는 무덤안의 공간은 좁지만 더 없이 개방된 공간임을 통해 주님 뜻따라 살아가는 신앙인이 누릴 수 있는 참된 자유와 해방의 경지를 암시하고 있다.
주님은 더 이상 죽음에 머물지 않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시어 이 여인들의 삶의 현장인 갈릴래아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한다.
크리스챤들이 일상의 평범한 삶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그가 몸담은 삶의 현장에 함께 하심을 믿는게 바로 제자의 길이며, 이 여인들은 모습은 이런 여정의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 크리스챤들의 모델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