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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춤과 음악

by 이종한 posted Jun 2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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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춤 (1910)
작가: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1869-1954)크기: 켄버스 유채, 260*391cm
소재지: 러시아 상 페테르부르그 에르미타쥬 미술관

matisse-dance.jpg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o)와 함께 20세기 가장 창의적인 예술가로 평가되는 앙리 마티스는 프랑스 북부지역 중류 가정에서 출생해서, 22세 때 법률공부의 꿈을 접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야수파 형식의 작품에 심취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야수파(Fauvism)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던 인상파(Impressionism)에 이어지는 화풍으로 강렬하고 순수한 색채로 평안하게 정확성을 표현하는 화풍이며 작가가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젊은 시절 한 때 수도생활을 결심한 적이 있을 만큼 깊은 신앙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의 작품 경향은 새 시대의 요청에 적응하는 것이어서 전통적인 십자가나 성인과 같은 종교적인 주제에 접근하지는 않았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중세기 성미술의 후원자였던 교회나 귀족들의 힘이 약화되면서, 성미술에 대한 수요가 감소되자, 예술가들은 과거처럼 전통적인 성미술의 주제가 아닌 일상적 삶의 주제를 통해 간접적이면서도 어떤 때 과거 보다 더 심원한 방법으로 신앙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면에서 작가의 작품 역시 일상적인 주제를 통해 신앙의 결실인 밝은 삶의 생기와 기쁨을 표현했다.

춤과 음악이라는 너무도 일상적인 삶의 실재에 하느님의 선물인 생명과 아름다움을 담아내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신적인 것이요, 가장 신적인 것이 가장 인간적인 것”이란 견해를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표현했다.

그는 대단한 장수를 누리면서 대단한 작품 활동을 했기에 온 세계 미술관에 많은 작품이 남아 있으나 이 작품은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야수파로 활동을 시작할 초기의 작품으로서 춤과 노래라는 인간이 지닌 원초적 삶의 표현인 기쁨을 그린 것이나, 신앙의 차원에서 보면 하느님 찬미라는 크리스챤 신앙의 핵심을 표현했다는 면에서 작가로서의 대표작 이전 작가의 신앙을 표현했다는 면에서도 대단한 가치를 지닌 작품이다.

“색채의 마술사”로 불릴 만큼 작가의 작품에는 생명의 발랄함과 따뜻함과 기쁨을 대담한 색채 사용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회화에 있어 색채의 중요성을 체험한 작가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했다. “색채에는 각기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 음악이 소리 보존에 힘쓰듯 우리는 색채의 아름다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작품의 구성은 색채의 아름다움과 실천을 살리는 길이다.”

이 작품은 성당이나, 혹은 공동시설을 위한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후원자였고 절친한 친구였던 러시아의 무역상 세르게이 슈쥬킨(Sergei Shschukin)의 요청으로 저택의 벽 부분의 장식화로 제작된 것이다.

작가는 춤과 노래는 인간 삶의 환희를 표현할 수 있는 최고 형태임을 믿고 이 작품을 제작했다.

시와 음악이 시간속에 존재하고, 회화와 조각 건축이 공간속에 존재한다면, 춤은 시간과 공간속에 존재하는 어떤 의미의 삼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현대에 있어 무용은 많은 부분 즐기기 위한 기능으로 변모했으나 과거엔 종교적인 기능을 가지고 생활 전체와 연결된 것이었다.

춤은 인간 삶의 기쁨을 원초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인류문화와 함께 시작되어 원시인의 단순한 춤으로부터 고도의 기교를 강조하는 발레, 현대 무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가 있다.

극도로 절제되고 단순한 구도에 하늘을 상징하는 푸른 빛과 땅을 상징하는 녹색의 바탕에 붉은 색깔의 다섯 명의 무희가 서로의 손을 잡고 단순하고 원시적 형태의 원형을 그리며 춤을 추고 있다.

무용수의 얼굴이 드러난 것은 한 명뿐이나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무아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이 보이는 무표정이다.

황홀한 체험이 끝난 후의 충족된 안정의 모습이다. 그들은 땅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늘 끝까지 오르고픈 비상의 열망을 한껏 표현했기에 무표정한 텅빈 충만 상태를 보이고 있다.

무희들은 인간이 만든 무대가 아닌 하느님이 만드신 우주라는 무대의 한 가운데서 삶의 희열을 춤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섯 무희의 손잡은 형태는 서로의 일치 체험 안에서 생명의 기쁨을 나누는 숭고한 찬양의 모습이다.

녹색으로 형상회된 대지의 수평선과 터키석 같은 짙푸른 하늘의 별들 사이에 깊이 있는 공간으로 다가선다 .

이러한 수평과 수직 즉 천지간의 만남의 잔치에서 멋진 인간들은 흥겨운 춤을 통해 무한속으로 관객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작품에 나타난 무희의 모습을 보면 대단히 격렬한 몸집으로 춤을 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무(圓舞))의 기본인 타원형을 그리면서 역동적인 모습으로 춤에 몰두하고 있다. 무희들이 얼마나 빠르게 춤추고 있는지는 그들이 들고 있는 발꿈치로서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너무 흥겨워서 모든 것을 다 잊은 황홀경에 빠져 오직 춤에만 몰두하는 모습이다.

오른 쪽에 큰 모습의 무희가 너무 빨리 춤 추느라 손을 놓친 옆의 무희와 다시 손을 잡아 전체를 이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서로 간에 단절 상태의 아픔을 겪을 수가 있는데, 작가는 춤은 단절성에서 관계성을 회복하는데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하고 있다.

서로의 약점과 한계 때문에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야 하는 인간 현실에서 원초적인 춤이 줄 수 있는 회복력을 알리고 있다. 작가가 춤이란 주제를 통해 인간 삶의 기쁨과 관계성의 회복이라는 관점에 접근한 것은 초대교회의 삼위일체 영성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하느님의 주요 속성인 삼위일체의 설명을 원(circle)을 포함한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했는데, 7세기의 희랍의 신학자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삼위일체의 관계를 원무(circle dance)를 뜻하는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로 표현했는데, 이것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춤추는 하느님”이시며, 그러기에 원무는 인간이 이루어야 할 완벽한 협동모델의 상징과 같은 것으로 해석했다.

즉 작가는 삶의 기쁨과 행복을 노래에 맞춰 춤추는 무희들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는데서, 시편의 다음 구절을 연상시킨다. “온 누리 반기어 주님께 소리쳐라. 기쁨으로 주님 섬겨드려라. 춤추며 당신 앞에 나아가라.”(시편 99: 2)

오늘의 교회 전례에선 집단적 공동체적 성격이 강조되면서, 앉아서 전례를 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춤의 기능이 퇴화되었으나, 초대교회에선 층계송 부분에 춤이 도입되기도 했으며, 성서는 찬미의 중요 기능으로 춤을 사용하고 있기에 이 작품은 우리에게 잊혀진 춤과 하느님 찬미라는 기억을 일깨우고 있다.

작품의 등장 인물들은 모두 나체로 춤추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나체는 자기 삶에서 확인되는 기쁨을 하느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바치는 봉헌자의 모습이기에 우리 심성 안에 깊이 잠재되어 있는 나체 표현이 주는 관능적인 끈끈함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면서 하느님께 군더더기나 과장도 없는 순수한 봉헌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녹색의 땅을 무대삼아 하늘을 향해 마음껏 자신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무희들의 동작은 제단에서 사제가 바치는 미사처럼 하느님을 향한 그리움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춤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서로의 일치가 더 깊어지고 있다.

작가가 남긴 수많은 작품 가운데 이것은 모든 인류에게 사랑받는 춤이란 예술 표현을 통해 사랑으로 일치되는 인간 관계성의 희열을 표현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matisse-music.jpg

제목: 음악 (1910)

무용에 다섯 명의 여자가 등장하듯, 음악에는 다섯 명의 남자가 등장하며 파아란 하늘에 녹색 대지의 구도도 비슷한 쌍둥이 그림과 같다. 원근법을 무시한 상태에서 <춤>과 같은 배경에서 다섯 명의 남자가 나체의 상태로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하고 있다.

음악은 일반적으로 시간 예술로 표현되고 있다. 왜냐하면 음악은 문예나 무용과 더불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성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에 보면 “노래하고 춤추라”는 권고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하느님을 향한 찬미는 크리스챤 신앙의 기본이며 시작인데, 이것은 기뻐하고 감동하는 영혼을 전제로 하며 춤과 음악이 이것의 가장 좋은 표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하느님 찬미는 기쁨의 외침으로, 환호로, 그리고 갈채로 표현될 수 있으며, 공동체 차원에서는 대부분 노래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흐뭇이 즐거워하여라. 올바른 이라야 찬미가 어울리도다. 비파로 주님께 감사드리며 십현금 맞추어 읆조리어라. 새로운 노래 불러 찬미하여 풍류소리 드높게 고운 가락 내어라.” (시편 32: 1-3)

작가에게 있어 음악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가장 기본이었으며 음악에 맞추어 춤이 연출되면서 환희의 극치에 이르게 된다. 노래하는 사람을 통해 삶의 진실하고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음악과 무용은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도 정착된 인간 삶의 원초적 표현을 작가는 성서와 연결시키고 있다.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 17)

현대에 있어 음악의 영향력은 대중 가수들의 영향력을 통해 증명되고 있으나 크리스챤 삶에서 이것은 단순히 복음 선포의 도구가 아니라 복음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에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개신교 신학자인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음악을 신학 다음으로 높이 산다. 커다란 이익이 있다 해도 음악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적은 지식과 바꾸고 싶지 않다.”

1998년 교황 요한 바울로 2세가 라틴어로 묵주 기도문을 암송하고 성가를 곁들인 음반을 제작한 것은 현대의 육체는 하나의 거대한 귀처럼 시각이 진동에 결합되어야 전달이 쉬워진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서양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살아라.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 치고 악한 사람은 없다.”

마르틴 루터는 때때로 교회 전례에서 사용하는 연도(litany)의 일부분을 적당한 성가로 바꾸는 게 효과적이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음악은 마귀를 멀리 쫓으며,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음악을 통해 사람들은 많은 분노, 외설스러움, 교만 그리고 악한 생각들을 잊을 수 있다. 현대 여러 형태의 음악이 지배하는 처지에서 그레고리안 성가가 범상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을 듣는 이의 영혼을 정화하고 복음적 열정으로 재충전하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노래하는 것은 두 번 기도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신앙 안에서 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작품에서 두 사람은 서서 악기를 연주하고 세 사람은 앉은 상태에서 참으로 평화로운 표정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들의 표정을 살피노라면 들판에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이란 성전 안에서 하느님께 경건한 찬미를 바치는 성가대를 연상케 한다.

사도 바울로는 콜로사이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격려를 보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원시적인 정서까지 풍기는 이들의 평화롭고 단순한 표정은 천상 영광을 앞당겨 체험하고 있는 성인들의 모습처럼 기쁨 이전에 경건함을 표현하고 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R. Tagore: 1861-1941)는 음악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열심히 일할 때 하느님은 너를 대견히 여기시지만, 네가 노래 할 때 너를 사랑하신다.”

너무도 많은 값진 예술품을 전시하고 있는 빠리의 루브르 박물관에는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모날리자” 앞에 수 많은 관람객이 몰려 있듯이, 에르미타쥬의 이 작품 앞엔 많은 사람들이 발목이 묶인 채 음악과 춤이라는 쌍둥이들이 주는 생기를 맘껏 즐기면서 작가가 생전에 남긴 다음 말을 생각하며 작품 속으로 빨려 들고 있다.

“나는 삶에 지치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낙담하는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고 평화와 위로를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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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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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페이지 소진 2012.03.31 15:35:40
    신부님! 이렇게 순수하고 꾸밉없는 원초적 표현한 그림을 보게된것 감사드립니다.
    그림감상 해설 잘 읽고 옮겨가겠습니다. 늘 건강하셔요.
  • ?
    홈페이지 에디따 2012.03.31 15:35:40
    쉐마가 떠올랐어요. 그 모습과 참 많이 닮았다...싶어요.
    기도 부탁드려도 좋은지 모르겠어요. 많이 필요하네요.^^
    감사히 읽고 그리고 옮겨갈께요. 더위 조심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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