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1822)
작가: 피에르 뽈 프뤼동(Pierre-Paul Prud'hon: 1758-1823)
크기: 유채화
소재지: 프랑스 빠리 루브르(Louvre) 박물관
뽈 프뤼동은19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 작가로 로마로 가서 유럽 조각계에 큰 영향을 끼친 카노바(Canova Antonio: 1757-1822)와 교류하면서 그의 화려한 작품성을 익히고 르네상스 작가인 라파엘로와 레오날드 다빈치에 심취하면서 그의 고유한 작풍을 창출해서 귀국 후 아름답고 우아한 화풍의 작품 활동을 했다.
그의 작풍은 상류사회의 취향에 공감을 얻어 나폴레옹의 두 왕비인 죠세핀과 마리아 루이자의 초상화를 제작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우아하고 환상적이며 세련된 장식 효과가 있는 그의 작품은 사치의 극치를 달리던 루이 16세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면서 극단의 찬사와 경멸의 평가를 받게 되었다.
우아하고 화려함을 좋아했던 그의 취향은 이 작품에서도 드러나 십자가의 주제이면서도 다른 작가에서 볼 수 있는 비참한 고통이나 비장감과는 거리가 먼 색다른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19세기에 제작된 신고전주의 영향을 받은 성미술 작품 중에 걸작의 평가를 받고 있다.
인간의 육체성을 강조하던 르네상스의 분위기를 풍기는 주님의 모습에서 신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절망의 그림자는 읽을 수 없고 희랍 조각을 연상시키는 젊은 미남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계신다.
손발의 못 자국에서도 낭자한 선혈의 모습은 보이지 않기에 더욱 생경스러움이 새로움으로 다가오면서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의문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
작가는 십자가의 고통이라는 인간적인 실패와 처절함의 그림자 없이 건장한 육체로 십자가에 달려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 십자가 죽음의 핵심 메시지인 부활을 미리 전달하고자 했다.
작가는 관객들이 주님의 처절한 모습을 보면서 자기 죄를 뉘우친다거나, 주님이 겪으신 고통에 동참하는 분위기로 이끌기보다, 십자가 위에서 시작되고 있는 부활의 희망과 생명을 더 확인하도록 했다.
전체적으로 흑갈색의 어두운 분위기에서 유독 십자가에 관계되는 모든 것은 생명의 색깔인 흰빛으로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
십자가 맨 위 "유다인의 왕"이란 쓴 현판에서부터 예수님의 몸 전체, 그분의 아랫도리를 감은 천 까지 하나같이 밝은 빛에 쌓여 있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 죽은 실패한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승리의 인간상을 제시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에서 이미 부활의 새 생명을 제시하고 있다.
전통적인 십자가 작품에는 성모님과 사도 요한과 마리아 막달레나가 등장하는데, 십자가의 양쪽을 지키거나 아니면 성모님과 사도 요한이 십자가를 우러러 보고 있는 반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참회의 상징인 십자가를 붙들고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여기선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먼저 성모님과 사도 요한은 어둠에 쌓인 채 땅 바닥에 앉아 있는데, 그리스도의 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상태이면서 자세히 보면 너무 상심하신 성모님이 사도 요한에게 몸을 기대고 있는 모습이다.
주님 십자가의 고통과 인류 구원의 시작을 지킨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하던 다른 작품에 비기면 여기에서의 모습은 좀 생경스러움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작가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복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감상적인 슬픔이나 회한의 감정에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실패가 없는 부활한 생명으로 변화된 크리스챤의 희망과 기쁨으로 초대하는 것이기에, 작가 역시 십자가를 바라보는 크리스챤들은 그 십자가에 들어 있는 부활의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 작품을 통해 이것을 표현했다.
그러면서 부활의 체험이란 자신의 죄와 잘못에서 회개하고 주님 생명에 동참하는 것으로 결론내리면서 다음 장면으로 관객을 초대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발치에 앉은 성녀 막달레나는 오른손으로 십자가에 못자국이 있는 주님 발 가까이 손을 두고 엎드려 있다.
막달레나는 죄녀였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항상 화려한 옷차림으로 등장하던 것과는 달리 여기는 청순한 소녀처럼 흰빛의 옷을 입고 있으나, 옆으로 보이는 홍조 띤 옆모습은 대단한 미인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막달레나의 엎드린 몸 위로 주님 몸을 비추고 있는 강한 빛이 쏟아지고 있다. 즉 주님의 몸과 막달레나가 같은 빛 안에 있으면서 어둠에 가려져 있는 성모님과 사도 요한과 달리 주님께 더 가까운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장면을 통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 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 7) 라는 주님 십자가 사건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작가는 성모님과 사도 요한의 가려진 모습과 주님의 빛 속에 드러난 성녀 막달레나를 통해 회개에의 권유를 더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어느 명강론 못지않게 십자가 사건의 결실인 생명과 희망, 기쁨의 메시지를 너무도 아름답게 전달하고 있다.
또한 주님 발치에 엎드리고 있는 막달레나의 모습에서 주님의 죽음을 애통하는 인간의 모습보다 자기 죄의 뉘우침을 통해 새로 태어난 새로운 인간의 모습, 생명으로 충만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막달레나에게 있어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사랑하던 주님을 잃었다는 애절한 슬픔이 아니라 부활사화에 나타나고 있는 주님의 부활 사건을 알리는 막달레나의 고백을 상기시키고 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당신의 모습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가장 먼저 드러내시는데, 막달레나는 자기 죄의 뉘우침을 통해 주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이후 그녀의 삶은 스승이신 주님에 대한 열렬하고 순수한 사랑이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막달레나는 기쁨에 겨워 다음과 같이 외친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요한 20,18)
작가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주님 부활이 주는 생명과 희망과, 자기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난 막달레나의 신앙 안에서의 고귀한 존재성을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그의 화려하고 우아한 작품 때문에 생전에 비난도 받아야 했던 작가는 이 작품에서는 다른 작가가 표현하지 못했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부활 신앙의 밝음을 너무도 아름답고 시원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고통 중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도 그동안 접해왔던 성화와는 많은 차이를 보이구요...
신부님. 건강하시지요? 소식을 자주 전하지는 못하지만 틈나는 대로 방문하여 흔적없이 가곤합니다. ㅎㅎ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천사지만 하느님께서 늘 함께 해주셨음 바랬어요.
감사히 옮겨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