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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유럽 수도원의 파스카 여정

by 이종한요한 posted Jun 1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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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구에서 결정한 피정 일자가 이미 약속된 수도회 피정지도와 겹치게 되었다. 피정을 미루다보면 연말에 더 마음이 편찮고 분주해질 것을 미리 해결하기 위해 안식년 기간 중에 에탈 (Ettal) 수도원에서 피정을 하기로 했다,

   이 수도원은 학생 시절에 읽은 책을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13세기 바이에른의 왕이었던 루드비히가 사면초가의 어려움 속에서 성모님께 의탁하면서 그 약속의 표지로 지은 것이 바로 이 수도원이다.

     

   에탈(Ettal)이란 수도원 이름은 바로 왕의 서약을 상징하는 약속의 계곡이란 뜻이다. 이 수도원 자리는 동양의 풍수사상에도 맞을 만큼 참으로 성스러운 차원에서 명당자리이며, 이 자리에 수도원이 세워지면서 더 유명해지게 된다.

 

   수도자들은 기도하고 일하라는 성 베네딕토의 규칙대로 모든 것을 하느님 찬미와 세상을 위한 봉사에 투신하는 삶을 살자, 자연스럽게 이 수도원은 양적으로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알차게 성장해서 유럽에서도 명망 있는 수도 공동체로 성장했다.

 

   이들은 먼저 이웃 주민들의 삶에 필요한 맥주 공장을 차려 마실 것을 제공하고 영농 개발이나 목축을 통해 개량된 영농법을 전파했다.

 

   그 다음 수도자들은 학교를 만들어 이웃 주민들의 젊은 세대 교육을 담당했는데, 이들이 만든 학교는 수도자들이 대종이 되어 가르친 덕분에 항상 주위에서 인정을 받는 우수 교육기관이 되었다.

   한마디로 봉쇄 수도원의 성격이지만 세상과 이웃에 대한 배려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큰 염원이 이런 사업들을 시작하게 했고, 이것이 예술을 통해서도 표현되고 있다.

 

   보통 수도원 식당엔 어떤 형태로던 예수의 최후만찬이 걸려 있는 게 보통인데, 이 수도원은 식당 큰 벽면 전체로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 이야기가 그려져 있으며, 이것은 수도원 시작부터 이어온 이 수도원이 겨냥했던 이웃 사랑의 서약서와 같은 것이다.

   문간 수사는 나를 손님으로 맞이한다고 했는데, 성 베네딕도에 있어 손님은 바로 그리스도라고 했으니 나를 그리스도처럼 대접하겠다는 것이다.

 

   그곳에 머물면서 그들이 나를 그리스도처럼 대접하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조금씩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들과 꼭 같은 삶의 환경에서 지내도록 배려하는 뜻이라는 것을 즉, 기도와 식사 등 모든 것을 함께 한다는 것이다.

 

   기도 시간은 일을 배려해서 4번 공동기도를 바치나, 법정 기도에 있는 모든 기도를 다 바치고 있었다. 식사시간은 전통에 따라 성경과 규칙서에 이어 시대징표를 읽을 수 있는 생활 독서가 침묵 속에서 이어졌다. 알프스 깊숙이 숨어 사는 수도자들이지만 이 시대 징표를 정확히 바로 알아야 수도자로서의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의 산 증거였다.

   식사 시간에 침묵하는 수도원 분위기는 자칫 무거워 보일 수 있으나, 실은 몸에 맞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너무도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아침 식사는 손님이 침묵에 대한 부담을 느끼는 것을 배려해서 따로 하는데, 이때 이 수도원의 장상인 아빠스가 동반했다. 식사가 끝난 후 대화를 할 수 있지만 대화를 할 것도 별로 없으니, 자연스럽게 침묵으로 이어지는 피정이 되었다.

 

   이 수도원에는 현재 45명의 수도자들이 있는데, 원채 수도원이 큰 탓인지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 수도원 전체가 침묵을 안고 있는 공간이었다.

 

   피상적으로 수도원에서 느낄 수 있는 경건한 분위기가 아니라 수도원 전체가 기도와 일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진 튼튼한 성채로 느껴졌다.

   그러나 이 수도원도 오늘 유럽 교회가 겪고 있는 고통의 십자가 길을 걷고 있었다.

 

   이 수도원에서 운영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평판을 지닌 학교에서 있었던 수도자들이 연루된 성추행과 부당한 체벌을 당했다는 학생들의 고발에 의한 소송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주로 1970년도에 있었던 사건들이 피해자들의 고발로 드러나면서 이것이 언론에 대서특필된 것이다. 현대 언론은 뉴스로 보기엔 좀 그런 면이 있는 궂은 내용의 기사가 더 선호하는 것이 특징이다.

 

   좋은 것을 알기보다 좋지 않는 것을 알고픈 호기심이 더 강한 세인들의 관심을 충족시키기에 교회 안에 있었던 어두운 이야기들은 언론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고, 독일 언론들은 이 사건을 융단 폭격식으로 터트림으로 이 수도 공동체가 위선자들이 기식하고 있는 복마전인양 착각하게 만들었다.

 

   교회가 이런 어두움의 상징으로 부각하게 된 데는 교회의 책임도 막급하다. 인간이 사는 곳에는 어디나 사고가 있게 마련이고, 독신생활을 하는 교회의 성직자 수도자들만이 아니라 결혼 생활을 하는 다른 종교 성직자들도 성문제가 생기는 것은 인간이기에 있을 수 있는 사고의 양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철저히 제도화 된 성격이 있으므로 바로 이런 성격이 이런 사고를 사건으로 확대해서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원인 제공을 하게 만들었다. 교회가 조직이 강해지면 복음적인 태도보다 조직의 강화나 유지가 곧 목표인 양 착각하게 되는데, 과거엔 이런 시도로 사건을 은폐하고 숨길 수 있었으나, 현대 정서에 의해 숨겨지지 않고 드러나면서, 교회는 시대착오적인 잘못을 저지른 대가를 톡톡히 지불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다 한수 더 뜨는 것이 바로 변호인들이다. 수입을 노리는 변호인들에게 이런 사건들은 가장 확실하고 좋은 먹잇감이기에 이들의 조종에 의해서도 사건의 범위가 더 확대 과장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마디로 피해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을 뒤에서 꼬트려 고발을 하게 만들고 이런 소송을 맡음으로서 단단한 수임료를 챙기는 것이다. 그래서 무죄한 성직자 수도자들이 졸지에 이런 혐의를 쓰게 되는 것도 흔한 일이 되었다.

 

   이 수도원의 대부분 수도자들은 이 세상과 격리된 공간에서 기도하고 일하며사는 것을 소명으로 여기며 일생을 살아왔는데, 날벼락도 보통 수준이 아닌 날벼락을 맞게 되었다.

 

   성추행이나 비행에 연루된 성직자 수도자들 역시 어떤 의미에서 피해자로 볼 수 있다. 교회가 성서에 나타나는 독신의 명분을 가르치긴 했으나,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바람직한 독신생활을 할 수 있는 심리적 사회학적 지식에 대해선 가르치지 않았기에, 이들 역시 피해자로 볼 수 있고 이런 면에서 현대에서 터지고 있는 이런 사건의 가해자는 바로 조직으로서 교회로 볼 수 있다.

 

   몇년 전 독일의 다른 지역에서 이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교육 수도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생겼는데, 장상의 지혜로운 처신으로 복음적인 해결책과 예방책이 제시된 적이 있다.

 

   어떤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수도회가 개신교가 대종인 프로이센 지역에 고등학교(Schule)를 시작했는데, 얼마 후 이 지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류 교육기관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이들의 좋은 평판에 의해 이 수도회는 그 인근 지역 여러 도시에도 학교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이 학교에서 바로 성직자들의 문제가 터지게 되었으며, 언론을 통해 교회 성추행 사건의 장본인은 성직자 개인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이라는 조직이 만든 범죄라는 결론을 끌어내게 되었다.

   이런 사건에 해결 책임이 있는 지역 교구장과 수도회 장상의 태도가 문제를 더 크게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도회 장상은 이런 문제를 일으킨 성직자를 심리 사회적 차원에서 치유하거나, 이런 진단에 의해 독신생활의 부적격자로 판단되면 내보내거나 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눈을 피하게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독일 명망있는 주간지인 슈피켈(Spiegel)은 독일 전역에 퍼져 있는 이 교육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수도자들의 과거 범죄(?)경력을 소상히 파헤쳐 보도함으로서 가톨릭교회가 성직자라는 조직원들의 범죄를 숨기는 범죄 집단의 인상을 받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박테리아를 치료하지 않고 더 분산 확산시키는 결과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수도회에 복음적으로 용감한 새 장상이 선출되면서, 전혀 다른 양상이 생기게 되었다. 먼저 이 장상은 이 사건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자체 조사를 해서 완전히 노출시켰다. 그래서 사회가 이들에 대해 부정적 호기심을 갖게 만들 수 있는 어떤 소지도 미리 원천 봉쇄했다.

   그러면서 교육 심리 사회학자들의 도움을 청하자 사회적인 분위기도 훨씬 달라졌다. 이런 변화된 장상의 태도는 그동안 교회가 보여준 위선적인 이중성에 대한 실망이나 불쾌함 보다는 오늘 교회 안에 드러나고 있는 독신과 성문제는 성직자도 인간이기에 생길 수 있는 문제이지, 결코 사악하거나 위선자들이 만든 문제는 아닌 극히 인간적인 문제이기에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긍정적 정서가 생기게 만들었다.

 

   에탈 수도원은 피해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고발을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수용함으로서 용감하고 정직하다는평가를 받긴 했으나, 팔백년 이상을 키워온 복음 집단으로서의 명예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들의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 의해 아직도 작은 송사나 흘리는 소문으로 이 공동체는 시련의 과정에 있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이 터졌을 때, 장상과 학교 책임자가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임을 했으나 이들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인정한 수도 공동체 회원들은 다시 사임한 아빠스를 장상으로 재 선출했고, 이 지역의 교육청도 교육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던 사임한 학교 책임자를 재임명한 것이다.

 

   말하길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것 역시 못마땅한 것 이었다. 법률 용어로 미필적 고의(未必的故意)의 관점에서 이 수도원의 결정을 못마땅한 것으로 여기면서, 손톱자국을 내고자 혈안이 된 사람들이 언론이란 탈을 쓰고 주위를 방황하고 있기에, 이 수도자들은 수도자의 끝기도에 나오는 다음 성서 구절을 몸으로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악마를 대적 하십시오” (1베드 5,8-9a)

 

   아침저녁 기도의 특징으로 다른 수도 공동체에서 볼 수 없는 장엄한 모습이 있다. 즉 기도하기 위해 성당에 그냥 들어가는 게 아니라 장상부터 서열 순대로 복도에서서 기도를 준비한다.

   어둑한 복도에 큰 십자가를 가슴에 맨 아빠스가 제일 첫 자리에 서있다. 기도 시작 종소리가 울리고 회원들이 다 도착하면 서서히 행렬을 해서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시작한다.

 

   프란치스칸 전통에서 장상의 특별한 복장이나 특별한 위치는 그리 탐탁한 것으로 보이지 않으나, 이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아빠스라는 장상직의 진정한 의미, 즉 회원들을 보호하고 교정하고 가르치면서 하늘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인도하는 책임자가 바로 장상임을 알리는 좋은 상징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떤 카리스마의 수도회이던 장상의 성격은 책임자가 되어야 하고, 이 책임이 바로 아빠스가 메고 있는 십자가와 연결되는 고통스런 책임임을 알게 되었다.

 

   이 아빠스는 회원 일부가 만든 그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모든 고통의 기억을 십자가에 담아 주님께로 나아가고 있었다.

 

   수백년을 이어 온 공동체에 생긴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을 자기가 다 감싸 안아 해결하고, 회원들을 앞장서서 성당으로 들어가는 아빠스의 모습은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진정한 착한 목자의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월 호 사건을 대하는 대통령을 위시해서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아빠스가 엄청난 시련의 시기에 자기 몸으로 실천했던 책임감이란 십자가는 오늘 우리나라 지도자들에게 가장 부족한 모습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큰 십자가를 가슴에 걸고 있는 아빠스의 모습이야 말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온갖 속이 들여다 보이는 말장난이나 잔꾀 부림도 마다하지 않는 우리나라 지도급 인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좋은 증거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일 저녁기도는 교회 전례에서 영글은 아름다운 전통인 성식만과(Vesperas solemnes)로 저녁기도와 성체강복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전례였다.

 

   두 번째 시편이 오늘 이 수도원이 걷고 있는 여정과 너무도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서 올 때 *

야만족을 야곱 집안이 떠나서 올 제,

 

  유다는 주님의 성소가 되고 *

이스라엘은 당신의 나라가 되었도다.

 

  바다가 보고서 도망을 치고 *

요르단이 거슬러 흘러갔도다.

 

  산과 산은 숫양처럼 뛰놀았으며 *

언덕들은 어린 양처럼 춤추었도다.

 

  바다여 너 어찌 도망쳤더냐 *

요르단아 너 어찌 거슬러 흘렀더냐.

 

  산들아 언덕들아 숫양과 어린 양처럼 *

너희는 어찌하여 뛰놀았더냐.

 

  땅이여 소스라쳐라 주님의 면전에서 *

야곱의 하느님 그 면전에서.

 

  주님은 바위가 못이 되게 하시고 *

차돌을 샘솟게 하시었도다.“ (시편 131)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 노예 살이에서 벗어나 광야를 헤 메던 시기를 회상케 하는 이 시편은 하늘나라를 향한 여정의 삶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의 삶과 너무도 어울리는 것이기에, 새 주간의 삶을 준비하는 주일 저녁 기도 때 이 시편을 장엄하게 노래하고 있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 복지를 향하면서도 자신들의 약한 심성과 믿음 부족 때문에 갖은 시행착오를 저지르고, 어떤 때는 하느님으로부터 따끔한 벌을 받기도 했으나, 뉘우치며 앞을 향하는 파스카 여정은 수도자의 삶과 너무도 어울리는 것이다.

 

   이 공동체 역시 소수 회원의 실수 때문에 큰 소문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으나, 하느님을 신뢰하며 뉘우치면서 고통 속에서도 아빠스라는 책임자의 인도로 파스카의 여정을 계속하고 있었다.

 

   초기 사막 교부들의 교훈에 이런 내용이 있다. 어떤 수련자가 수련장에게 수도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수도자는 하늘나라를 향한 여정의 삶에서 넘어지면 일어서고, 다시 넘어지기와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앞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수도원은 이런 면에서 사고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수도 공동체가 아니라 이 시대 파스카의 여정을 살아가는 공동체로 보였다.

 

   나의 성격상 피정도 자신이 계획했던 방향으로 치밀하게 끌고 가는 게 보통인데, 여기서는 자연스럽게 이 분위기에 나를 맡기는 것이 좋은 피정으로 변했다.

 

   인간의 노력 보다 하느님의 은총, 즉 하느님께 온전히 나를 맡기며, 수영에 비기면 아무 기교도 부리지 않고 그냥 물에 떠있는 자세(floating)가 된 것 같아 마음도 가볍고 개운하다.

 

   항상 머물 다 떠날 땐 밥값으로 봉헌 금이라는 것을 준비한다. 나는 살아가면서 성격 탓인지 앞으로 우리 형제가 이곳을 찾을 때 나의 악행은 아니더라도 신사답지 못한 천박한 처신으로 좋지 못한 인상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항상 봉헌 금을 지불했다.

 

   이 공동체는 프란치스칸이 아닌 다른 수도회이니 더욱 의무 차원의 봉헌 금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들의 손님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삶 전체로 느껴지는 정성을 봉투로 답례한다는 것은 경박한 실례가 된다는 생각에 망설이다 봉투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이 수도원은 다른 유럽 수도원과 달리 상대적으로 젊은 회원이 많은데, 이유는 수도원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수도원으로 입회한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갓 입회했다는 지원자와 성소피정을 온 젊은이를 보면서 이들의 눈빛이 수도생활을 해보고픈 강한 열망의 강한 빛을 보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시련 중에 있는 수도원에 입회를 결정한 젊은이들은 성소 결단에서 세상에서 이루기 어려운 어떤 야망 실천과 같은 어떤 부정적이거나 안일한 삶의 서식처로서 수도생활이 아닌 참으로 그리스도의 전사(戰士)의 자세를 지녔음이 분명하다.

   떠나기 전, 아빠스에게 배려 덕분에 좋은 피정을 했다는 인사를 하니, 그분은 찾아가서 만나야 할 당신이 이렇게 찾아와 준 것이 너무 고맙고, 자기 형제들도 기뻐한다는 인사를 하셨다.

 

   나는 이 피정 동안 이 공동체와 당신을 위해서도 기도했고 앞으로도 기억하겠다고 하니 어린이 같은 순진한 표정으로 반가워 하셨다. 이때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분의 손에 더 힘이 가는 것을 느꼈다.

 

   이 수도원 성당엔 걸작의 작품이 두 점 있다. 바로크 형식으로 지은 이 성당엔 베드로 대성당에서 볼 수 있는 둥근 지붕(Cupola)이 있는데, 앞면의 천정에는 베네딕토 수도회 성인 성녀들 205명과 천사와 등장인물을 합해 400여 명이 하늘로 오르는 성 베네딕토를 영접하는 장면이 있고, 그 뒤편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흔적이었던 십자가를 드시고 천상으로 오르는 장면이 있는데, 원근법적인 방법으로 그린 이 천정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자신도 성인들의 뒤를 따라 천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황홀하고 벅찬 기쁨의 착각에 빠지게 된다.

 

   나는 피정 중 자주 이 성당을 들러 이 천정화를 바라보노라면 다음 성서 구절이 떠오르면서 마음을 맑게 만들었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 추구하십시오.” (콜로새서 3:1)

 

   마지막 인사로 성당에 가서 이 천정화를 우러러 보며 감사의 기도를 바쳤다. 그러자 황홀한 기쁨과 감미로움의 향기가 온몸에 스미면서 성 프란치스코의 말씀이 생각났다.

 

   “우리는 큰 것을 약속했고, 우리에게는 더 큰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고 약속된 것을 갈망합시다. 쾌락은 일시적이고 형벌은 끝이 없습니다. 고통은 짧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첼라노 2생애 191)

 

   베네딕토 수도원에 와서 복음적 기쁨과 휴식을 즐기고 나니 성 프란치스코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다. 좀 엉뚱하지만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핏줄은 속일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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