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이 이제 곧 제자들을 떠나
성부께로 가실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한 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당신이 기어이 돌아오시겠다고 하시는데
그것이 실은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최후의 심판 때에 다시 오신다는 뜻도 있지만
당신 대신에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성령을 보내실 것이고,
성령과 함께 당신도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말씀이신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비슷하지만 다른 두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너희는 안다>와 <너희는 깨닫게 될 것이다>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에 대해서는 세상과 달리 이미 알고 있지만
주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제자들은 주님 안에서 있으며,
주님도 제자들 안에 계시다는 것은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고
주님께서 떠나시고 난 뒤에야 깨달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성령에 대해서는 알게 될 거라 하지 않으시고
이미 알고 있다고 아주 단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제자들은 아무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분명히 말하는 토마스나 필리보도 아무 소리 않습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지난주일 복음에서, 그러니까 오늘복음 바로 앞부분에서
당신이 가는 곳을 제자들이 알고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토마스는 모른다고 분명히 말하였고,
이제부터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뵌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이번에는 필리보가 나서서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이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 소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성령에 대해서 진정 알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바로 앞에서 나무람을 들었기에 그저 잠자코 있는 겁니까?
제 생각에 제자들이 성령에 대해 알고 있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들어 아는 정도지 경험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세상과 달리 성령께서 제자들 안에 머무르시어 함께 계신다는 것도
요한복음이 쓰일 당시의 신자들의 경험을 소급하여 얘기하는 것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앎이란 경험을 통한 깨달음으로 이어져야 하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날, 너희는 깨닫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날>이란 언제를 말하는 것입니까?
제자들에게 그날은 모든 것을 상실한 날일 것입니다.
먼저 주님을 잃을 것이고,
주님을 잃자, 주님을 통해 이루려 했던 이 세상의 꿈도 잃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도 잃고, 이 세상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은 그날
제자들은 깨달음도 얻고 성령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깨달음과 성령은 이 상실의 대가이고,
그래서 상실은 그저 상실이 아니라 은총입니다.
얻는 것만이 아니라 잃는 것도 은총이니
이를 <상실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마리아인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는데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안수하자 비로소 성령을 받습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물로 세례를 받은 날부터 성령의 세례를 받는 날까지
우리도 제자들처럼 상실의 경험을 해야 함도 알아야 할 겁니다.
그리고 이 상실의 경험이 그저 상실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고 성령을 받는 은총이 되도록 상실을 귀히 여겨야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