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천사의 부축을 받으시는 그리스도 The Dead Christ Supported by an Angel (1646- 1652)
작 가 : 알론소 카노 (Alonso Cano)
크 기 : 캠퍼스 유채 : 178 x 121 cm
소 재 지 :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성서에 주님께서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 물었을 때 제자들의 대답은 구구각색이었다. 어떤 제자는 예수님을 앞서 살면서 주님의 오심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가 하면, 어떤 제자들은 구약의 엘리야라고 했다.(마르코 8: 27- 30)
그만큼 주님 가까이 있던 제자들조차도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는 알기가 힘든 존재였다. 그분의 이상이 너무 크고 그분의 가르침은 인간의 좁은 가슴으로 받아들이기에 너무도 큰 존재였다.
교회가 로마제국에서 긴 박해 기간을 거쳐 신앙의 자유를 얻으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앙이 교리로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진면모는 받아들이기는 너무 어려웠고 더욱이 이교의 신들과 경쟁의 관계가 되면서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인간으로서의 예수보다는 하느님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강조를 하게 되었다.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희랍의 아폴로 신이나 로마 제국의 쥬피터 같은 그런 능력있는 신의 모습안에 예수님을 끼워 넣었다.
이런 처지에서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인간 예수님의 모습은 믿기에 자존심이 상하는 신이 되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표현은 자제하고, 이방의 신들과 같은 능력 있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묘사에 더 열을 올리게 되었다.
이것은 예술 표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세기까지 예수님에 대한 표현은 대부분 승리한 왕으로서의 예수, 부활하신 예수가 대종이었으며, 십자가를 제작하면서도 예수님의 모습은 부활한 예수의 모습이었고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표현은 없었다.
12세기가 되면서 서서이 그리스도 인성(人性)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으며 특히 시토회를 창설하신 중세기 큰 별이셨던 성 베르나르도에서 시작해서 성 프란치스코 성인에 와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영성이 정착되었다.
성 프란치스코가 이해한 그리스도는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십자가위에 바치신 벌거벗은 구세주였으며 이것은 예술을 통해서도 강하게 표현되었다.
그래서 곳곳에 편태를 당하시는 예수,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의 형상들이 제작되면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수난에 대한 신심을 키웠다.
작가는 스페인에서 활약한 작가로서 특히 아름답고 조화로운 모습의 예수님의 표현으로, 가장 아름다운 성화를 그렸다고 평가되고 있는 뮤릴로(Bartolomé Esteban Murillo (1617 – 1682))의 작풍을 시작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은 이런 관점에서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이 끊어지자 십자가에 내려진 상태에서 천사의 도움을 받는 모습을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을씨년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아름다운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내리워진 예수님을 천사가 부축하고 있다. 예수님은 앉아 계시는데, 죽은 상태이어서 자기 힘으로 지탱할 수 없는 처지에서 천사가 뒤에서 부축하고 있다.
예수님이 죽은 신후 천사가 부축했다는 내용은 성서에 나나타지 않는 내용이나, 십자가에 대한 신심이 발전하면서 시작된 민간 신심의 표현이다.
즉 십자가에 무력하게 달리신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착한 신자들 사이에 파급되면서 이런 형태로까지 정착되었다.
이 천사는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 대한 가없는 사랑을 지닌 신앙심의 표현이며, 이 천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위로하기 위해 어떤 희생이나 극기도 마다하지 않겠단 소박한 크리스챤들의 상징이다.
당시 예수님을 사랑하는 신자들의 신앙심 표현이다.
신앙의 표현을 너무 영성화 시킴으로서 희랍 로마 시대를 걸쳐 정착된 육체의 아름다움 표현을 극도로 억제하던 교회의 태도에 대한 반발로 육체의 아름다움을 한껏 과시하는 경향이 성 미술에도 영향을 끼쳐 르네상스 시대에는 미켈란젤로를 위시해서 여러 작가들이 성 미술에까지 과감한 육체를 표현을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자기 정화를 하는 가운데 예술 표현에 있어서도 육체 예찬의 분위기를 자제하면서 육체의 표현 역시 육체를 통한 영성 화에 관심을 강조하게 되었다.
반종교개혁 운동에 특별한 박차를 가하던 스페인에서는 이면이 더 강조되었다. 여기 십자가에서 내려져 천사의 부축을 받는 알몸의 예수님이 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렸던 알몸의 상태였으나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육체의 아름다움은 전혀 없다.
오히려 인간을 위해 한 방울의 피와 물까지 다 쏟으시고 탈진한 모습인 예수이시다.(요한 19: 31-37)
관람자에게 본능을 일깨우기보다 연민의 정을 느끼게 만들며 예수님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해야 하며, 그분에 희생에 동참해야 하다는 열정을 느끼게 만든다.
중세기에 있었던 사순절 십자가의 길 행렬이나, 간혹 있었던 편태의 신심을 연상시키며 그리스도의 죽음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동참해야 한다는 열정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게 만들고 있다.
작가는 주님 수난의 처절함을 전하기 위해 성서의 다음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함으로서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애통함과 동정심을 더하고 있다.
예수님이 임종 직전 목마름과 신체적 고통을 겪으신 것을 기억시키기 위한 것이며 성서의 다음 구절을 형상화 한 것이다
“낮 열두시가 되자 어둠이 온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오후 세 시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를 번역하면 ,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는 뜻이다
곁에 서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저것봐 ! 엘리야를 부르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을 신포도주에 적신 다음,
갈대에 꽃아 예수님께 마시라고 갖다 대며, ‘자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마르 15: 33- 37)
단순한 가운데 주님 수난의 핵심을 너무도 아름다우면서도 정확히 그리고 애잔스럽게 표현해서 순박한 신자들에게 수난 신심을 일깨운 한편의 잘 정돈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