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마태 17,2)
이 말씀에 앞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스도란 구약이 이야기하는 메시아를 뜻하는 단어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해방, 구원으로 이끌 왕을 기다려왔고, 그 왕을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기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으로 이끌 왕이라고 고백했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야기 하십니다. 당신은 죽임을 당할 것이고, 되살아 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베드로가 생각했던, 아니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해왔던 그런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반박하고, 예수님께 결국에는 사탄이라는 말까지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세상의 논리가 잘못되었음을 다시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볼 때, 왕을 따르는 사람은, 높은 자리에 앉고 싶은 사람은, 지식으로 혹은 권력으로 왕을 따라가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확신이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약이 이야기 한 그 메시아임을 말씀하셨지만, 그 이후의 말씀들을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정말 내가 믿고 따를 수 있는, 내가 왕으로써 모실 수 있는, 그런 분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부활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그 모습은 영광스럽게 빛나는 모습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모습에 너무 황홀한 나머지, 그 순간에 계속 머물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생각했던, 아니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모습, 찬란한 영광을 지닌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또 한 번의 반전이 나타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아.' (마태 17,5) 여기에서 말하는 '그의 말'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왕의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생각하셨던 왕의 모습, 십자가를 통해서 죽음의 길로 걸어가는 모습, 그리고 그를 따르기 위해서 우리 자신도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그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활의 화려한 모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 화려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처참함을 겪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 아니 우리에게도 온전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니, 그 화려함에 도달하고 싶지만, 그 죽음의 처참함은 겪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어떤 방식을 써서라도 그 영광에 도달하고 싶지만, 어떤 방식을 써서라도 그 고통은 피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신 영광의 모습은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없이는 부활의 영광이 없다고. 머리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영광만을 쫒아가려는 사람들의 마음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마태 17,9)
하지만 이 말은 다시 읽자면, 십자가의 고통은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첫 증인이 되셨습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은, 그것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질 것임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영광을 위해서 고통을 받겠지만, 그 고통은 그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